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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실전 훈련(6)
하월평야 연꽃 객잔·
하늘 위에 핀 거대한 연꽃에 세워 져 여행에 지친 모험가들이 이정표 로 삼기도 하는 이 신비로운 객잔에 는 단골 손님처럼 찾아오는 도박꾼 이 한 명 있다·
“그 흰머리 영감탱이 말이오? 최근
에는 도통 찾아오질 않는군·”
“글쎄· 올 때마다 죄다 쓸어가서 짜증 났었는데 차라리 잘됐지·”
“이참에 아예 안 왔으면 좋겠군· 판을 완전히 망쳐놓는다니까?”
아니 찾아오던 도박꾼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최근에는 자취를 완전 히 감춰 버려서 도통 찾을 수 없었 는데 도박이 유흥거리로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백전백승의 도박꾼을 꺼 리는 탓에 그 행방을 찾으려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가씨·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 다· 그날 이후로 완전히 흔적이 사
라졌더군요·”
은세십일월로 추정되는 도박꾼을 수색한 지도 벌써 이주일째·
상황이 진전되지 않아 최후의 보루 로 연꽃 객잔에서 그의 행방을 수소 문했거늘 역시나 아는 사람이 없다·
“···곤란하네·”
젤리엘은 입술을 어루만지며 딱딱 하게 굳은 표정으로 객잔을 응시했 다· 사람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카드나 주사위 등을 숨긴다·
이곳의 사행성 도박을 모조리 쓸어 버린 장본인이 바로 젤리엘이었기에 어느 정도 노름이 합법이 되었다지
만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저 때문에 사람들이 눈치 보는 것 같네요·”
“···아! 넵!”
그녀를 따르던 마법사들은 전혀 의 외의 말이 젤리엘의 입에서 나오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타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던 젤 리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배려하는 말이 흘러나왔기 때문이 다·
연꽃 객잔 최상층 별구름 상회 전 용 VIP룸으로 돌아온 젤리엘은 자 신의 책상이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대략 한 달 정도 됐을까·
백유설을 구하기 위해 은세십일월 이 찾아온 그 날 이후 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꾸준히 추적을 해왔 으나 도통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흔적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다·
은세십일월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서 살아가기를 좋아했고 조금만 수 소문을 하면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어느 한 순간을 기점 으로 은세십일월이 완전히 사라졌다·
젤리엘은 서랍의 자물쇠를 열어 노 란색 파일을 꺼내 그 안에 들어 있 던 사진을 꺼냈다·
아이테르 극동부 이스터스 단구·
천룡절벽·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니 흑마력 에 침식당하여 100년 동안이나 인 간의 발걸음을 거부했던 이곳이 최 근 완전히 박살 났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사진 속 이스터스 단구는 예전의 그 아름다운 천룡절벽의 모 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는데 마치 운석이라도 여러 개 떨어진 듯 혹은
거인이 짓밟은 듯 뭉개져 있었다·
‘이곳에서 9클래스 이상의 마력이 최소 두 개 이상 감지됐다고 했어·’
은세십일월의 마지막 흔적이 이스 터스 단구로 향했다고 조사됐으니 아마 그가 누군가와 충돌하여 천룡 절벽을 망가뜨리고서 사라졌다고 추 정해도 좋을 것이다·
‘설마 그곳에서 죽은 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은세십일월은 시간을 다루는 전능 한 존재· 쉽사리 죽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이유 가 있어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건
데····
“아가씨·”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는데 비서 가 찾아와 그녀에게 서류를 건네주 었다·
“별꽃나무 마법학교의 연화련 교수 가 우편을 보냈습니다·”
“아·”
연화련 교수는 별구름 상회에 묶여 있는 하이엘프 마법사 중 한 명으로 서 사실상 젤리엘의 측근이나 다름 없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최고의 요정 학교나 진배없 는 별꽃나무 내에서 벌어지는 몇몇
사건에 간섭할 권한이 생겼는데 지 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최근 어떤 일에 젤리엘이 관심을 가졌다·
[스텔라 아카데미 교환학생]
인간들의 마법학교 스텔라와 요정 들의 마법학교 별꽃나무의 교환학생 프로젝트· 매년 있는 일이었기에 크 게 다를 건 없겠으나 올해의 젤리 엘은 명단에 유독 관심을 가졌다·
교환학생 목록을 천천히 훑어보던 젤리엘은 어느 학생의 이름에서 시
선을 멈추었다·
백유설·
그는 교환학생 목록에 기재되어 있 지 않았다· 여기서 젤리엘이 펜대를 쥐고서 단 3초만 투자해도 백유설을 데려올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혹여나 백유설에게 바쁜 일정이 있 을 수도 있는데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되니까· 차라리 나중에 직접 만나서 의사를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
“말씀하세요·”
“백유설 학생이 최근 풍제국에 입 국했다더군요· 스텔라 파견 임무라 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젤리엘의 표정이 굳었다·
풍제국에 올때 한마디라도 해주었 다면 좋았을 텐데·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 걸까·
아니 그럴 수 있다·
그는 굉장히 바쁜 삶을 보내고 있 으니까· 자신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 지 않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 가고 있지 않던가·
오히려 나 따위에 백유설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더욱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잠깐 얼굴 정도는····’
그 정도는 상관없이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젤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은세십일월을 찾아 내는 것도 급하지만 그보다 더 중 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 * *
“모두 브리핑은 완벽히 들었나?”
2학년 S반 독철광의 말에 풀레임 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무슨 브리핑이요?”
그녀가 되묻자 독철광이 가슴팍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고서 말했다·
“적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뜨겁게 불타는 열정을 폭발시켜 부숴 버리 는 것! 그것이 최고의 몬스터 상대 법이다·”
“아니 열정이 어딨는데요·”
“가슴에!”
“그걸 폭발시키라구요? 그럼 죽어 요·”
“남자에게는 두 개의 열정이 있다!”
“저는 여잔데요?”
“열정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지· 너에게도 하나 나누어주마·”
“필요없거든요!”
풀레임은 완전 질색이라는 표정으 로 물어났다· 하필이면 몬스터 사냥 임무의 조교로 온 사람이 독철광이 라니·
그의 인품은 썩 나쁘지 않았으나 전투 방식이 너무 무식해서 파티에 받아들이 기엔 영··· 꺼려졌다·
“너희는 괜찮냐?”
그녀가 피곤하단 표정으로 묻자 마 유성과 해원량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풍하랑은 반응하지 않았 다·
“난 상관없다·”
“저 선배님 재미있으시고 좋은걸?”
뭐가 괜찮다는지 모르겠다·
“에라 뭐 어떻게든 되겠지·”
풀레임은 기지개를 쭉 켜며 주변 의 풍경을 감상하였다·
바람 위에 세워진 나라 풍제국·
아름답기로는 어지간한 요정 나라
뺨친다는 이곳에서 맑은 공기를 들 이마시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쫙 풀 리는 느낌이었다·
“야 풍하랑· 여기 네 고향이잖아· 뭐 관광 코스 같은 거 없냐?”
“음! 이곳은 내 고향이기도 흐卜지! 아주 좋은 관광 코스가 있다·”
독철광이 끼어들며 어딘가를 손가 락으로 가리켰다· 딱 봐도 완전 위 험해 보이는 어둑어둑한 동굴이었 다·
“저곳이다·”
“···저게 뭔데요?”
“모른다· 하지만 재밌어 보이는군!”
“저기요 선배님···r
이런 미친놈이 다 있을까·
풀레임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해원량이 나서서 중재했다·
“우리는 관광 코스를 찾을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빠르게 몬스터를 찾 아서 해치우고 돌아가야 흐]!· 덤으로 그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도 대 비해야 하고·”
“어흐··· 그렇긴 하지·”
그래도 조금은 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만약 백유설이었다면 ‘응? 그 럴까? 좀만 놀다 갈까? 잠깐이면 모르지 않을까?’라며 풀레임의 의견
이 동조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관광은 조금 재미있을 것 같 은데···
“시끄럽다·”
그나마 풀레임의 편을 들어주는 사 람은 마유성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해원량에게 묵살당했다·
‘그래도 파티 구성은 최고네····’
나이트 포지션의 마유성과 독철광·
최고의 비숍 해원량 풍하랑까지·
어지간한 4리스크 이상의 보스 몬 스터가 나와도 문제없이 박살을 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에휴··· 그래 빨리 해치우고 남 는 시간에 놀자고· 야 현지인· 안내 해·”
풍하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저 멀 리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공기가 영 좋지 않군·’
풍제국의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이 렇게 불안한 이유는 곧 왕위 계승식 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일까·
바람의 일곱 가문 중 가장 강력한 풍가문의 후계자라지만 풍하랑의 위치는 실로 위태롭기 그지없다·
열일곱의 형제들 그 사이에서 막 내로 태어난 풍하랑에게 애초에 계
승권이 돌아올 일도 거의 없을 테니 까· 다른 가문과의 정쟁은커녕 내부 에서부터 풍하랑의 입지는 삐걱거리 고 있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할 때가 아 니었군·’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풀레임의 뒤를 쫓았다·
아넬라 디 폴란체·
스텔라 잠입을 위해 아넬라의 가짜
이름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아넬라 라는 이름은 진짜였으나 어째서인지 가명에 본명이 들어갔다·
흑마인놈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라고 생각해도 본인 역시 아직은 흑 마인이었기에 할 말은 없다·
“아넬라· 정신 좀 차리지·”
흠칫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넬라는 고개를 돌렸다·
온몸에 뿔이 돋은 기형적인 외모를 가진 흑마인이 위협적인 눈으로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텔라 잠입 임무를 대차게 실패 해 놓고서 최근에는 아예 모든 임
무를 거부하고 있더군· 마법의 피조 차 받아먹지 않고···· 이상한 생각 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넬라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흑마인으로서 회의감이 드는 바람 에 인간의 마력을 흡수하지 않은 지 도 벌써 한 달째·
임무도 모두 거부하고서 조용히 틀 어박혀서 지내고 있으면 아무도 모 를 줄 알았으나 이전번 임무 실패 때문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네게 지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거절했다가는 블랙킹던께서 노하실
텐데 그래도 거부할 거냐?”
“아니····”
아넬라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고 민했다· 40대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양 갈래 머리로 땋은 이후 버릇처럼 이 머리를 유지하게 되었 는데 그 원인이 블랙킹던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녀는 블랙킹던을 누구보다 두려 워하고 증오하였으니까·
“거부하면··· 죽겠지?”
“그래· 다른 흑마인이었다면 진작 에 몇 번이나 죽었을 것이다· 블랙 킹던님이 이해가 안 가는군·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네년을 아직도 살 려두고 있다는 게·”
아넬라는 흑마인으로서의 삶에 회 의감이 들었으나 이 운명에서 쉽사 리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랙킹던에 의해 흑마인의 씨앗이 몸에 심어진 탓에 어디론가 멀리 도 망쳤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 것이다·
‘조금만 견디고 버텨·’
스텔라를 떠나기 전 백유설이 그 리 말하며 건네주었던 자그마한 부 적 하나·
망가지고 찢어져 효력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건의 정체가 사 실은 무려 ‘사령의 원혼 부적’으로 서 신화급 아티팩트라는 것을 아넬 라는 과연 알기나 할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사령 의 원혼 부적은 효력이 완전히 다해 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상태였다·
백유설이 대체 이것을 왜 건네주었 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적을 가지고 견디고 버티면 이 족쇄와도 같은 운
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꿋꿋 하게 참고 이겨낼 것이다·
“임무는··· 뭔데?”
“어려운 건 아니다· ‘마녀의 왕’이 활동을 시작했더군· 갑자기 왜 그렇 게 싸돌아다니는진 모르겠다만 어차 피 분신일 거다·”
“마 마녀의 왕?”
아넬라가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부여잡자 흑마인이 짜증 난다는 표 정을 지었다·
흑마인이 되면서 대부분은 쓸데없 는 감정을 내버릴 터· 저 머저리 같 은 여자는 흑마인의 수치나 다름없
었다·
“쯧 한심하긴· 마녀의 현재 위치는 풍제국이다· 찾아가서 감시해라· 그 게 블랙킹던께서 내린 명령이다·”
“그 그런 임무를 나 따위에게 맡 겨도 좋은 거야? 난 이미 임무도 실패했고 마녀를 감시할 정도의 수 준도 되지 않는데····”
마녀와 관련된 임무는 최소한 7리 스크 이상의 흑마인이 아닌 이상 수 행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터·
아넬라의 떨리는 목소리에 흑마인 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아직도 모르겠나? 가서 죽으라는
의미다· 뭐 여기서 도망쳐도 죽겠지 만· 잘해보라고 머저리 흑마인·”
“아····”
순간 현기증이 올라와 아넬라는 이 마를 부여잡았다·
‘마녀라니 마녀의 왕이라니이···
믿을 수 없다·
흑마인으로서 근처에 기척을 내는 것만으로도 마녀에게 순식간에 살해 당할 게 틀림없단 말이다·
‘정말··· 나를 이렇게 버린 거 야···?
나의 마지막 가치는 마녀의 실체를
파악하고 죽어버리는 것· 정말로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
,아냐· 생각해 보면 당연해···
임무도 거부하고 인간의 피를 마시 는 것조차 하지 않는 흑마인을 과연 흑마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블랙킹던의 입장에서 아넬라는 더 이상 살려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쓸모를 다한 뒤 죽어버리라는 뜻이겠지·
평범하게 심장을 터뜨리는 게 아니 라 끝까지 도구처럼 사용하다 버리 는 모습은 참으로 흑마인답다고 해 야 되는 걸까·
아넬라는 고개를 천천히 놀려 발카 믹 왕가의 폐허에 지는 노을을 바라 보았다·
‘나··· 정말로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부적을 꽉 쥐어 가슴에 끌 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번 백유설을 만날 수만 있 다면 좋을 텐데·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해· 조 금만 더 힘내자·’
아직 죽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죽 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는가·
아넬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먹 을 꽉 쥐고서 힘껏 하늘로 뻗었다·
좌절과 절망은 영혼을 갉아먹을 뿐 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닫지 않았던 가·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해보는 거야!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