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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기억(3)
모르프란 숲 정화 의식을 위한 대 제단은 10년 전 아이작 모르프 공 작이 폭주했던 바로 그 숲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쓸데없이 거창하긴·’
정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제사 복을 입어야 했는데 몸 전체를 뒤
덮는 이 특수한 로브는 신성 연방에 서 제작된 것으로 특별한 인챈트가 되어있어 흑마나 방호력이 탁월하다 고 한다·
열두 명의 의식술사와 여섯 명의 결계술사 두 명의 대마법사와 세 명의 사념술사가 홍비연을 뒤따라 진중한 표정으로 걷는다·
대제단으로 향하는 길목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닦여 있었는데 하얀색으 로 대충 칠해놓으면 뭐든 순결할 거 라 생각하는 신성 연방의 고지식한 생각이 참 우습기 짝이 없었다·
‘푸른색이 더 깨끗한데 말이야·’
유난히 푸른색을 좋아하는 홍비연 으로서는 붉은색 줄무늬가 쳐져 있 는 흰색 로브가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붉은색과 횐색은 그녀가 제일 싫 어하는 색이었으니까·
‘그나저나···
홍비연은 옆을 힐끗 쳐다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사복을 입 은 사예란 오르칸이 창백한 안색 그대로 따라서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인형처럼
똑같다· 그러나 홍비연은 사예란을 자주 마주해 오며 그녀의 표정 변 화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 게 되었다·
사예란 오르칸은 지금 굉장히 기 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기분 따위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나 저렇게까지 대놓 고 표정에 저기압을 드러내고 있다 는 건 이 상황 자체가 상당히 마음 에 들지 않는단 의미
‘무슨 상관이야·’
사예란에게 굳이 신경 써봐야 의미 는 없었기에 홍비연은 뒤돌아 태리
번에게 말했다·
“제사장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억지로 예의를 차리자니 역겨움 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다·
“예 말씀하시지요 공주님·”
“내가 왕가의 화령진을 발동해야 되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 이유 를 모르겠네요· 화령진은 봉인보다는 차단에 특화된 마법이거든요·”
그러자 태리번은 실눈을 가늘게 뜨 며 홍비연에게 답했다·
“그래··· 그렇군요· 공주님은 아 직 의식을 치르기 위한 조건이 하 나 부족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우뚝·
태리번이 발걸음을 멈춰 세우자 뒤따르던 마법사들 역시 석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홍비연은 몸에 긴장감을 일으키고 서 그들을 천천히 노려보았다·
“공주님· 모르프란 숲의 정화 의식 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 건이 있습니다· 이는 여왕님께서 결 정하신 사안으로 왕족 또한 예외는 아니지요·”
그리 말하며 태리번이 고갯짓을 하자 뒤쪽에서 흰색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 두 명이 커다랗고 얇은 나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순간 눈에 띄게 굳어지는 사예란 의 표정· 홍비연은 다음의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달칵!
태리번은 상자의 뚜껑을 열더니 두루마리 스크롤 하나를 꺼내서 촤 르륵 펼쳐 보였다·
“’금제’입니다· 내부에서 무엇을 보 았건 들었건 느꼈건· 공주님은 그 사실을 절대 외부로 발설해서는 아 니됩니다·”
“···그렇군요·”
예상했던 부분이다·
모르프란 숲의 정화 의식에 참가하 는 모든 귀족에게 강제로 금제를 걸 었다는 사실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 었으니까·
“주세요 제가 직접 할 테니까·”
저 금제 문서는 왕가의 마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렇기에 내부에 무슨 속셈을 저질러놨다면 금방 파 악할 수 있을 터·
홍비연은 꼼꼼하게 금제 스크롤 을 역산하였다·
‘아돌레비트의 유산·’
틀림없는 여왕 홍세류의 마법·
왕가의 마법은 제아무리 수석 마법 사였던 태리번이라고 할지라도 감히 조작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가 이걸 마음대로 써준대?’
이때를 대비해서 왕가의 마법진 의 수식을 변형하는 연습을 충분 히 해두었다· 무려 8클래스의 마 법사 홍세류가 제작한 스크롤이었 으나 흥비연은 그 괴물 같은 두뇌 로 자신보다 4차원이나 더 높은 마법의 수식어를 아주 극히 일부
나마 변질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
금제와 같은 예민한 마법은 조금 이라도 뒤틀리는 순간 그 본질이 비 틀려버릴 터·
그런 마법을 체내에 부여했다가는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르겠으 나 직계 혈통 마법이 자신에게 치 명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다고 판 단한 홍비연은 과감한 수를 던지기 로 하였다·
마나를 부여하자 스크롤이 불꽃 에 휩싸여 타오른다· 이윽고 허공 에 생성되는 붉은 마법진·
그것은 순식간에 홍비연의 몸을 에워싸더니 흡수되어버렸는데 거 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초·
고작 4클래스의 애송이 마법사 따위가 무언가 조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태리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수석 마법사는 모르고 있었다·
홍비연 스크롤을 잠시 훑어본 것 으로 마법의 본질을 파악하고 역 산하여 뒤트는 것으로 그 1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마법을 변형하여 무효화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반동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홍 비연은 비틀거리며 뒤로 주춤 물 러 섰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예···
태리번이 꼴에 부축해 주겠답시고 다가오자 홍비연은 재빠르게 손을 들 어 휘저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 노 친네 앞에서 쓰러질 생각도 그렇다 고 부축을 받을 생각도 없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은 울렁증과 당장 다리가 풀려버
린 것 같은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 으나 정신력으로 견뎌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심력·
“···가시죠·”
일반 마법사였다면 진작 탈진하여 기절해버렸을 정도의 반동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홍비연은 식은땀에 흠 뻑 젖은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예란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제사장님· 마법의 발동이····”
“예· 아가씨·”
그러다 홍비연의 상태를 다시 보 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공 주님· 금제의 반동이 상당한 모양 이군요· 이런 경우는 특이한데···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시간을 뒤로 조금 미뤄도 괜찮습니다·”
“아뇨· 지금 당장 해도 괜찮아요·”
억지를 부리는 것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다· 태리번 따위에게 동정받기 는 죽기보다 더 싫으니까·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집중· 또 집중·
‘명상해·’
체내에 마나가 스며들어와 서서 히 정신이 맑고 깨끗해지기 시작 했다· 걸으면서 명상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나 홍비연에게는 가 능한 일이다·
반복 학습 암기·
그녀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
두통이 사라져간다·
풀렸던 다리근육이 돌아왔고 식
은땀이 마나로 인해 증발하며 혈색 이 되돌아와 붉은 뺨이 살아났다·
몰랐다·
스텔라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명상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어쩌다 알게 됐더라·’
명상의 사념 속에서 홍비연은 문 득 기억을 헤매었다·
여름방학 초·
풀레임과 에이젤·
성격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속성도 다른 소녀들과 모여서 백 유설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여 행을 떠났을 때·
숲속에서 야영하던 어느 날 밤·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멍하니 모 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에이 젤 혼자 구석에 처막혀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을 보고서는 물었다·
왜 그런 걸 하느냐고·
처음에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서 그 생각을 단단히 고쳐먹을 수밖 에 없었다·
-네? 명상이요? 어 으음··· 백유 설 씨가 이거 하라고 알려줬거든요· 그때부터 그냥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였다·
홍비연이 저도 모르게 명상을 시도 하게 된 계기는·
명상 수업을 따로 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명상 교재를 따로 찾아 읽으며 기숙사에서 몰래 혼자 시도하였고 그 결과 자신의 체내에 서 증폭되는 어마어마한 마나의 홍 수를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바다와도 같은 마나를
타고난 그녀에게 명상까지 겹쳐지 니 그야말로 무한한 시너 ス]·
그렇게 대제단에 도착할 때 즈음 완벽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 도 제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화 령진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상태·
대제단에 올라선 홍비연은 제단 의 정중앙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의식의 예행연습을 한 번쯤은 미 리 해보는 것이 기본이거늘 저들 은 홍비연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대놓고 망신시키려는 의도 가 뻔히 보였으나··· 상관없다·
연습 따위 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완벽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뭐야?’
대제단에 올라선 홍비연은 이 제 단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상자처 럼 생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 다·
주변에는 무언가를 가둬두기 위한 차양 결계가 다섯 겹이나 둘러져 있 었고 외부에 커다란 결계가 추가로 하나 더 쳐져 있었다·
‘정말로 정화하려는 게 맞는 거。ド?’
정화 의식은 신호없이 조용히 시작 되었다· 제사장 태리번이 홍비연의
맞은편에 서서 율법서를 펼쳐 허공 에 룬어를 하나씩 새기기 시작하였 고 열두 꼭지 지점에 위치한 마법 사들이 양팔을 높이 치켜들어 마법 진을 공중으로 끌어올린다·
그 타이밍에 맞춰 홍비연은 지팡 이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불꽃이여·”
화르륵!!
불길이 일어나 제단을 휘감는다·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불꽃의 결 정체· 홍비연은 지팡이를 유연하게 흔들어 불꽃을 제어하였다·
“그대를 수호하소서·”
이윽고 거대한 돔의 형태로 드넓 게 펼쳐지는 붉은색의 배리어·
통상적으로 실드 마법은 절대 곡 선의 형태로 만들 수 없다고 알려 져 있다· 하지만··· 아주 극히 일 부 극한까지 발달된 궁극의 결계 는 그러한 관념마저 깨고서 완벽 한 구의 형태를 이루고는 했다·
화령진은 전 세계에서도 열 손가 락 안에 드는 최고의 결계술·
먼 과거 선조 아돌레비트가 만든 것으로 현대의 마법으로는 복제가 불가능하나··· 재능이 뛰어난 직 계 혈통의 마법사가 재현하는 것
은 가능했다·
“오호···
태리번을 포함하여 정화술사들이 살짝 놀란 눈으로 홍비연을 바라 보았다· 직계 혈통 마법은 제아무 리 아돌레비트라도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녀는 방금 막 금제를 받았으면 서도 저것을 문제없이 펼쳐낸다·
일부로 그녀가 실패할 것을 유도 했는데도 말이다·
몇몇 귀족 마법사들은 영 불편하 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홍비연이 실패해야만 홍시화 공주
님의 비밀을 지켜낼 수 있었을 텐 데 기어이 성공해내다니·
그에 비해 태리번은 이 상황을 별 문제 삼지 않고서 순수하게 호기심 어린 마법사의 눈으로 홍비연을 바 라보았다·
‘과연 저것이 진정한 아돌레비트 란 말인가·’
태리번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 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 붉은 영혼 같은 것 이 넘실거리는 광경이 그의 눈동 자에는 똑똑히 비춰보였다·
‘역겨운 년이군····
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 는지도 알지 못한 채 흥비연은 식 은땀을 홀리며 마법에 열중하였다·
의문이다·
‘이 위대한 마법까지 사용하는 이 유가 대체 뭐냐고·’
무얼 위한 의식인가·
정말로 흑마력을 정화하기 위함인 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대체 왜 궁극의 결계까지 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흡!”
무수히 많은 고민을 날려보내며
홍비연은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 었고 그 순간 돔 형태의 마법진이 제단을 에워싸더니 바닥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윽?!’
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으나 애써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쿠구구궁···!!
그리고·
거대한 제단이 반으로 나뉘며 드 러나는 내부의 모습·
“아···
홍비연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
뱉자 태리번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고서 말했다·
“공주님· 감상이 어떠십니까?”
서늘하게 풍겨오는 냉기·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그 차디찬 냉기를 버텨내며 홍비연은 제단의 아래에 봉인되어있던 무언 가의 정체를 두 눈으로 웅시하였다·
“이럴 수가····”
아이작 모르프·
10년 전 흑마화하여 폭주했으나 홍시화 아돌레비트에 의해 제압되 었다고 알려진 바로 그자의 육신 이··· 제단 아래에 봉인되어 있었다·
마치 아직도 살아 있다는 듯 싸늘 한 냉기를 풍겨가면서·
그러나 홍비연이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흑마인이 죽어서도 이만한 기운을 남긴다면 그건 틀 림없이 ‘흑마력’이어야만 할 터·
하지만 이 시리디시린 한기는··· 틀 림없는 푸른색의 마나·
즉 그는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는 의미가 되었다·
“어째서····”
“어째서냐고 하셨습니까? 그런 의 문을 품으실 줄 알았지요·”
태리번은 한 발자국 홍비연에게 다 가가며 말했다·
“홍시화 공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뭐···r
“공주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저희 는 이 선택을 했습니다· 매년 자꾸 만 깨어나려고 하는 아이작 모르 프를 봉인하여 다시 잠재우는 것·”
“그런 미친 짓을···!”
“미친 짓? 그럴 수 있겠지요·”
노인은 새된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미친 짓을 했든 공주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 다· 그저 바쁘신 홍시화 공주님을 대신하여··· 봉인을 마무리 짓는 것 외에는 말이지요·”
홍비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사 예란 오르칸과 눈을 마주하였다·
차갑게 식어 있는 눈빛·
그래 그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 겠지· 이곳에 잠들어 있던 비밀을·
‘이런 이건···
갑자기 모든 게 역겨워졌다·
속에서부터 구토감이 치밀어 올 랐으나 애써 꾸역꾸역 견뎌냈다·
하지만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아돌레비트라고···?
아무리 정적이라지만 자신과 혈 통을 나눈 언니가 이런 끔찍한 짓 을 벌였고··· 아돌레비트의 여왕 은 이 사실을 비밀로 묻어버렸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참 을 수가 없어서 홍비연은 차오르 는 눈물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저런 공주님의 충격이 크신 모 양이군요· 사예란? 공주님을 아래
로 모시도록···
“아뇨 아뇨· 괜찮아요·”
홍비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서 붉 게 충혈된 눈으로 태리번을 노려 보며 말했다·
“의식을··· 끝까지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십니까?”
태리번은 싸늘한 눈빛으로 홍비 연을 바라보더니 마법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서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정신 차려 아직 끝이 아니야·’
홍비연은 품속에 감춰둔 ‘기억의 나침반,을 느끼며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단순히 아이작 모르프의 육신이 이곳에 잠들어 있단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로 돌아가··· 그 진실을 모 두 알아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