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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결한 영혼(4)
아이테르 극동부 이스터스 단구·
태양이 내리쬘 때마다 깎아 내리치 는 절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꼭 승천 하는 용처럼 생겼다고 하여 ‘천룡 절벽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관광 명 소가 하나 있었다·
100년 전부터 흑마력에 침식되어
관광지로서의 수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수많은 모험가들이 찾는 장소로서 이곳은 여전히 생명 의 숨결을 받아 마시고 있었는데····
오늘부로 그 수명이 다한 둣싶다·
바닥에서부터 구름이 피어오른다·
비유적 표현의 구름이 아니라 정말 로 하늘에 떠 있는 그 구름이 맞다·
다만 공간이 비틀리는 바람에 제 위치조차 헷갈린 채 바닥에 잠시 내 려앉아 있을 뿐·
실상 안개와 별다를 것도 없는 구 름이 바람에 휘날려 걷어 ス] 자 이제
는 더 이상 절벽이라기보다는 차라 리 분지에 가까운 지형이 모습을 드 러 냈다·
그 아름답고 위용 넘치던 절벽은 모두 폭삭 내려앉아 평지가 되었으 며 이스터스의 근간을 이루던 산맥 은 송두리째 뽑혀 강제로 위치를 교 정당하여 이곳을 찾는 모험가는 지 도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곤란하네·”
삭월의 거탑주 루드릭 할로우·
그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 매로 닦으려고 했으나 오른팔은 이 미 차원의 균열 너머로 짓이겨져 사
라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하 역시 십이신월은 아직 조금 힘드네···
회공시월과의 결투는 그에게 꽤 좋 은 경험이 되었다·
공간계 마법사들의 마법전은 평범 한 마법전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공간적 제약을 무시하고 싸우는 그 들에게는 ‘한 수 앞을 본다’라는 말 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저벅-!
구름을 걷어내며 모습을 드러낸 회 공시월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바 닥에 쓰러진 루드릭을 응시하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러는 이 유라도 있나? 마법사·”
“글쎄·”
어차피 질 것을 알면서도 덤빈 것 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 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으로 벌어질 ‘아주 사소한 사건’ 을 바꿀 수는 있었으니까·
아마 루드릭의 예상대로라면 여기 서 회공시월은 은세십일월에게서 운 명의 비틀림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물론 현재 운명이 뒤틀리고 있다 는 사실 정도는 9클래스쯤 되면 누 구라도 느낄 수 있으니 회공시월이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다만 운명이 바뀌고 있는 가장 치 명적인 ‘원인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터· 세상사에 십이신월이 함부로 개 입하는 순간 모든 사건과 이야기가 변질되어 버린다·
회공시월은 결코 무지한 상태로 움 직이려고 하지 않을 터· 틀림없이 은세십일월을 통해 운명이 비틀리는 ‘단 하나의 원인’을 찾아내 그것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된다·
회공시월은 세계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대신··· 아주 작고 사소한 것
을 볼 수 없다· 그의 치명적인 단점 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한다·
언젠가··· 그 소년이 회공시월에 게 대항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세계의 흐름이 끝나기까지는 10 년도 채 남지 않았거늘·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구나 마법사·”
회공시월은 그리 말한 뒤 허공을 응시하였다· 사라져 버린 은세십일 월의 자취를 찾으려고 했으나 발 빠른 노인네답게 순식간에 도망쳐 버려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 을 것이다·”
회공시월은 그리 말한 뒤 회색빛 공간을 통해 사라졌다·
“하아····”
뜨거운 숨을 토해낸 루드릭은 천천 히 몸을 일으켜 왼손으로 사라져 버 린 오른팔의 위치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금색의 빛무리가 어른거리 더니 잘려 나간 팔이 순식간에 자 라났다· 사라진 신체를 되돌리는 과 정에서 어마어마한 마나를 쏟아부어 야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편한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나저나 대단하시군요·”
루드릭은 마치 혼잣말처럼 허공에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 에 은색의 선이 그이더니 공간이 갈 라지며 한참도 더 전에 모습을 감추 었던 은세십일월이 모습을 드러냈 다·
“공간계 십이신월을 속이실 정도로 공간 조작에 능숙하실 줄이야····”
“시간과 공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수백 년을 도망치며 살아왔 는데 능숙해져야지·”
은세십일월은 씁쓸하게 읊조렸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모든 것을 내 려놓고 무책임하게 살아왔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루드릭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은세십일월은 자신이 모 르는 어떤 끔찍한 광경을 보았을 것 이다· 10년 뒤에 발생할 예정인 세 계의 멸망보다도 더욱 참혹하고 잔 인한 광경을·
그렇기에 그는 미래시를 포기했다·
기억조차 자신의 ‘파편’에게 담아 두어 버린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는 삶을 선택했고 그 결과 이 런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대체 무슨 광경을 보았기에 은세 십일월마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
고서 등을 돌려 도망쳤는가·’
루드릭이 줄곧 가져온 의문·
“걱정되나?”
대뜸 은세십일월이 묻자 그는 고 개를 끄덕였다·
“···예·”
그에 노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뒤돌 아 어디론가 걸었다·
“나도 참 한심한 꼬라지로군·”
그러나 그 등이 무거워 보이지 않 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짊어지고 있던 모든 업을 털어낸 것처럼·
틀림없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과 만나기 도 이전부터 결정을 내린 것일 터·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는가·
의문이 드는 순간 해결되었다·
이 세상에서 운명을 뒤흔들고 다니 는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지 않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이제 반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발도 참 빠른 소년이다·
그리 생각하며 루드릭은 눈을 감았 다· 일전의 전투로 인해 너무나도 지 친 관계로··· 조금은 쉬어야겠다·
* * *
현대에 비해 아이테르의 통신 수단 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개 인 휴대전화가 없는 건 둘째 치고 상대방이 전화기 근처에 없으면 연 락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 으니·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 도 좋아요
특히나 상대방이 엘프왕이라면 또 어떠한가· 일개 학생이 일정도 잡지 않고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나 그래도 알테리샤에게 부탁하여 기숙사에 마 련해놓은 내 개인 전화기의 번호를 넘겨줘서 간신히 연락은 가능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죠?”
-물론이죠· 제 걱정을 해주시는 건 가요?
꽃서린이 농담조로 말하자 나는 대 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어머 그러신가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얕게 웃음 을 터뜨렸다·
-후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 도 기분은 좋네요·
대답을 듣고서도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녀가 걱정이 되었던 건 둘째 치고 나 스스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내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스킬 [연홍춘삼월의 가 히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게 옳 겠다·
나 스스로의 정신력은 잘 안다·
정신에 평균을 매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럭저럭 강인한 정신력을 타고나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긍정
적으로 이겨내 왔다고 자부한다·
거기에 더해 연홍춘삼월의 가호까 지 부여받아 이제는 정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강철 같은 멘탈을 보유하게 되 었다고 생각했거늘 자꾸만 머릿속으 로 스며드는 부정적인 하나의 감정·
‘절망’
그렇다면 즉 연홍춘삼월에게 문제 가 생겼다고 보는 게 옳았으나···
-아무튼 저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복면 을 벗는 시간도 많아서 상쾌하기까 지 한걸요·
나와 같이 연홍춘삼월에게 가호를 받은 꽃서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는 건 즉 연홍춘삼월이 문제가 아니라 내 정신 자체에 문제 가 생겼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 연홍춘삼월마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부정적인 인간이 되었거나 혹은 나와 정신이 연결된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거나·
전자는 아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사를 즐기는 편이었고 당장 무슨 일이 닥 치더라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마인드로 살아가고는 했으니까·
즉 나와 정신이 연결된 ‘잎하넬’이 확실하게 원인이라는 뜻이다·
“흐음 혹시 시간 돼요?”
-···시간이요?
꽃서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을 멈추었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말실 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학생 따위인 나와는 달리 항상 바 쁘게 지내는 엘프왕에게 시간이 되 냐고 묻는다니· 세상에나 침팬지도 이딴 질문은 안 하겠다·
“아 죄송
-될 것 같아요
“···된다구요?”
-네· 업무가 너무 밀려 있어서 많은 시간을 내기는 힘들 것 같지만요····
그러면서 뭔가 걱정 가득한 한숨을 푹 내쉰다· 아무래도 일전에 오렌하 보좌관을 퇴직시킨 빈자리가 굉장히 큰 모양이다·
“으음··· 아주 잠깐이라도 괜찮아 요· 잎하넬을 보러 갈 생각이거든 요·”
-어머 정말요?
잎하넬은 꽃서린의 아주아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어쩌면 유일한 친구일 수도 있 고·
아무튼 그녀는 잎하넬을 굉장히 소 중히 여겨왔고 하이엘프로서 신령의 상태 변화에 굉장히 민감할 터·
그러한 이유 외에도 함께 잎하넬과 만나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너무 좋아요· 시간은 언제로 하면 될까요?
“이번 주 주말 괜찮아요?”
말을 하고 나서 왕은 주말에도 평 일과 다름없이 바쁜 걸까 하는 그런
사소한 의문이 들었으나 꽃서린은 망설임 없이 대답해 주었다·
-네! 그럼 주말에 볼게요·
그렇게 통화를 종료한 뒤 나는 시 계를 확인했다·
슬슬 동아리 활동이랍시며 마유성 에이젤과 함께 외식을 나가기로 한 시간이었다·
여름이라 외투는 필요 없었기에 대 충 교복 셔츠에 조끼만을 입고서 나 가니 복도에 2학년 선배 몇 명이 우르르 몰려서 어디론가 향했다·
복장을 보니 딱 알 것 같았다·
‘리그 오브 스피릿’
마법계 최고의 두뇌 스포츠가 소울 체스라면 마법계 최고의 피지컬 스 포츠는 바로 리그 오브 스피릿이라 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게도 스텔라 내에도 리그 오 브 스피릿 동아리는 존재하였는데 그 규모가 나의 맛집 동아리와는 비 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흡사 프로 선수 구단과 맞먹을 정 도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후원을 받 고는 했는데 매년 마법 학교의 청 소년 선수단이 모여 어마어마한 규 모의 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생각하 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학교가 ‘스텔라’라는 최 고의 이름값을 지니고 있는 것을 생 각하면 천문학적인 후원도 어찌 보 면 당연했다·
이건 학교간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 이었으니까·
“으음 곤란하네···
“어쩌지?”
“그냥 3학년의 말렉 선배를 데려오 자니까요·”
“그 선배는 개인 기량은 뛰어난데 팀워크가 영··· 게다가 오더를 잘 듣 지도 않고·”
“심지어 남은 TO는 무조건 1학년 으로 채워야 해· 3학년을 데리고 가 면 페널티가 있다고·”
“어쩌겠어요·”
그들을 슬쩍 지나치려는데 아무래 도 뭔가 곤란한 문제가 생긴 것 같 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서브 에피소드 플래그·’
게임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을 ‘캐 릭터 풀레임’으로 플레이하다 보면 꽤 자주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동아리에 별로 관심도 없던 평범한 평민 소녀 풀레임이 우연히 리그 오 브 스피릿의 대타를 뛰게 되었다가
눈부신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된다는 아주 흔하고 뻔한 설정·
이는 플레이어들이 온라인으로 ‘리 그 오브 스피릿’의 대전을 치르기 전에 진행하는 프롤로그 격 이벤트 로서 90% 이상의 플레이어가 겪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이벤트가·
“어라 너 1학년의 백유설이지?”
“맞네· 쟤 머리 좋다며?”
“리그 오브 스피릿 해본 적은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괜찮지 않을 까?”
그러면서 선배들이 내게 다가와 묻
는다·
“너 혹시 리그 오브-”
“안 합니다·”
빠르게 거절하고 튀었다·
“자 잠깐! 이야기라도 끝까지 들 어봐! 경기는 져도 상관없으니까!”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됐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나는 리그 오브 스피릿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팀 게임에 싫증이 났
한국에 살던 시절에 5 Vs 5 팀 대 전 게임을 질리도록 플레이하며 깨 달아버린 진리가 하나 있었으니까·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그중 한 명은 반드시 쓰레기다·’
지금 저 선배 중에서도 누가 트롤 러일지 알 수 없는 노릇·
내가 진짜 뒤지게 잘했는데 팀 운 이 안 좋아서 지면 그것만큼 빡치는 게 없다· 역시 나는 1 vs 1 개인 플 레이가 제일 취향에 맞는다·
“한 번만···
뒤에서 손을 뻗는 선배의 팔을 애 써 뿌리치고서 나는 빠르게 발걸음
을 놀렸다·
미안하지만 그런 부탁은 풀레임한 테나 가서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