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2화
292. 쇼케이스 3
“어때? 방금 내가 도와준 거 인정?”
김애련 전무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어이가 없었다.
“제 앞가림은 제가 할 수 있었습니다.”
“까칠하긴. 그보다 만난 김에 제안 하나 할게.”
왜 날 붙잡았나 했더니 그녀 역시도 유진이를 원하고 있었다.
“우리 백화점 행사에 정유진을 세웠으면 해.”
현재 김애자 부회장이 밀려나고 대천백화점을 손에 쥔 상황이라 챙겨야 할 게 많단다.
언니가 방만하게 경영하다 누적된 손해가 컸기에 그걸 메꾸려면 대규모 마케팅이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대천그룹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에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글쎄요. 워낙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스케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창 드라마 촬영에 바빠 오늘 런웨이에 서는 일정도 겨우 뺐거든요.”
“그럼 스케줄 없는 날이 언제인데? 그날에 맞춰서 백화점을 통째로 한 세 시간 비우지 뭐.”
대천백화점 본점의 하루 매출은 50억이 넘는다.
실제 영업시간을 대략 12시간 정도로 잡으면 시간당 매출은 4억 이상.
세 시간을 비운다면 무려 12억 이상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엄청난 수익을 포기하는 듯 보이지만 내가 아는 김애련 전무는 절대 손해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계산이 끝났다는 거다.
“내가 왜 이러나 싶지?”
선문답하는 그녀에게 딱 잘라 답했다.
“압니다.”
“진짜?”
“유진이를 쇼에 세우는 게 투자한 이상의 돈이 나온다고 판단하셨겠죠.”
정답을 말했는지 김애련 전무가 군침을 삼켰다.
“하여튼 척하면 척이라니까. 이러니까 내가 탐을 내지.”
김애련 전무도 L.M.L에 관한 기사를 전부 확인했다며 진즉에 유진이를 잡을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단다.
그래서 김애자 부회장이 저지른 짓을 뒤처리하기 바쁜 와중에도 이곳에 왔단다.
직접 분위기를 눈으로 확인하려 말이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바로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회사로 들어가서 윗분들과 좀 상의를 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김애련 전무가 날 빤히 쳐다본다.
“거참. 핑계는 좋아. 내 딸이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능글맞아? 그쪽이 전결권 휘두른다는 거 다 아는데?”
김애련 전무는 밑으로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장녀 이하윤은 22살 그리고 장남 이상윤은 20살의 나이였다.
투덜대던 김애련 전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다.
“말 돌리는 거 질색이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사실 정유진을 백화점 행사에 세우라는 제안은 우리 아빠가 한 거야. 그러니까 오늘 무조건 약속을 받아 가야겠어. 그쪽 우리 아빠 성격 알지?”
경영계의 살아 있는 전설 대천그룹 김부호 회장이 유진이를 찍었다고?
그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반드시 실행하고야 마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별명이 불도저였던가 그랬었다.
“아버지가 지금 LM 의류의 성장세를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거든. 그리고 기억하지? 지난번에 아빠가 그쪽 보고 싶다고 했던 거.”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야기로 날 보자고 했었지만 당시에 난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일방적인 제안에 따라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섣불리 거절했다가는 괜한 적만 만들 수도 있다.
‘어떻게 한다?’
현재 회귀 전에도 결정되지 않았던 재계 17위 대천그룹의 후계자를 내 손으로 바꾸어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여왕의 권좌를 노리던 두 자매 중 하나를 내 손으로 쳐냈으니까.
그때였다.
“걱정하지 마. 언니는 이제 아무런 힘도 못 써. 그리고 곧 내가 회장이 될 거야. 지분 승계도 시작했고.”
“부회장도 아니고 바로 회장으로요?”
“그래. 내가 부회장이고 형부가 회장이면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안 그래?”
김애자 부회장이 감옥에 가면서 그녀의 남편인 대천그룹 회장마저 직위를 잃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대천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애련 전무는 그녀의 언니처럼 연예인에게 손을 뻗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김부호 명예회장님부터 뵙고 나서 구체적인 건 그때 이야기해 보시죠.”
김애련 전무가 손뼉을 짝 친다.
“오케이. 그럼 우리 아빠랑 약속 잡는다? 무르기 없기?”
“예.”
난 결국 대천그룹의 김부호 명예회장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 * *
자리로 돌아가자 HK 의류의 홍성범 전무가 보이지 않았다.
왕룽에게 물어보니 홍성범 전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먼저 자리를 뜨더란다.
그리고 잠시 후.
대천백화점의 김애련 전무가 비어 있는 홍성범 전무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다.
그사이 다시 한번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쇼케이스 2부가 시작되었다.
2부는 1부와는 달리 가방과 액세서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쇼의 시작과 동시에 유진이와 릴리가 함께 나와 신상 백을 선보였다.
유진이는 아이보리색의 분홍꽃무늬가 있는 토트백을 들고 있었고 릴리는 분홍색의 새하얀 꽃무늬가 새겨진 토트백을 들고 있다.
두 사람이 등을 대고 자세를 취하자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음이 미친 듯 울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수많은 모델들이 가방과 액세서리를 보여주며 2부의 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L.M.L의 브랜드 쇼케이스가 성공적으로 끝이 나자 모델들은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했다.
그 중심에는 이영아 실장과 이미리 대리가 서 있었다.
오늘 무대를 꾸미는 데 큰 도움을 준 탓에 스페셜 게스트라는 소개를 받으며.
모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박수를 보내자 이미리 대리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오늘이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기억으로 남을 하루가 되었기를 바라며 나 역시 박수로 응원했다.
그렇게 모든 행사가 끝나자 관람객과 기자들이 일제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주요 바이어들은 나가지 않고 미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영아 실장과 문영미 대표가 준비한 다과를 즐기며 L.M.L은 바이어들과 제품 판매에 관한 구두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샤넬의 한국 지사장 유현아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이영아 실장과 문영미 대표가 바이어들을 만나고 있었던 터라 내 주변에 L.M.L 관계자들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샤넬 한국 지사장 유현아라고 해요.”
명함을 내미는 그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글쎄요. 별로 안녕하진 않은데. 우리 샤넬을 거부한 모델이 이렇게 잘나가니 배가 아파서 잠도 못 자거든요.”
말에 조금 뼈가 있었지만 태연히 답했다.
“잘나가긴요. 아직도 샤넬을 거절한 게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유현아 지사장이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레 말한다.
“하여간 너스레는. 그나저나 언제 기회가 되면 같이 일 한 번 하시죠.”
하지만 그녀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우리 유진이가 다른 브랜드 일을 맡기에는 발을 너무 깊이 들여서요.”
유현아 지사장이 장난스레 웃는다.
“정 팀장님 소속 스타가 유진 씨 하난가요? 난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그렇게 이쁘던데······.”
“아!”
유현아 지사장은 체리블라썸을 자신들의 광고 모델로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좀 얌체 같긴 하지만 성공적인 컴백 할 경우에 한해서예요.”
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사실 정유진 씨를 놓치고 본사에 들렀다 대판 깨졌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선수를 치려고요.”
“명심해 두겠습니다.”
샤넬 지사장과의 인사를 마치자 연이어 다른 해외 명품 브랜드 담당자들이 날 찾아와 명함을 건넸다.
일부는 유진이와의 계약이 언제까지냐고 묻긴 했지만 이영아 실장이 도끼눈을 치켜뜨자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이영아 실장이 방심할 수가 없다며 씩씩거린다.
“절대 다른 데랑 계약할 생각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지금처럼만 유진이를 아껴주시면 절대 옮길 생각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단단히 약속을 받은 그녀가 내게 말한다.
“그나저나 오늘 완전 계약 대박이에요 초대박!”
L.M.L의 제품 계약은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3배나 많은 물량으로 구두 계약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전국 백화점과 홈쇼핑은 물론 해외 업계들까지 물량을 쓸어 담아갔다나.
그렇게 L.M.L 브랜드 쇼케이스는 계약까지 성공적으로 이루며 완벽한 마무리를 지었다.
* * *
저녁 5시.
문영미 대표가 약속한 대로 ‘한우 명가’에서 이른 회식이 열렸다.
쇼의 성공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환담이 오간 뒤 곧장 식사가 시작되었다.
유진이와 릴리는 어젯밤부터 굶은 탓에 신나게 소고기를 흡입했지만 2차를 가자는 제의를 거절해야 했다.
내일 귀국을 해야 하는 데다 가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영미 대표와 이영아 실장에게 감사를 표한 뒤 우리 일행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사이 오늘 성공에 관한 기사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L.M.L의 브랜드 쇼케이스! 정유진의 화려한 변신!]
[연기 천재 정유진. 이번엔 모델 데뷔?]
[신규 브랜드 L.M.L. 성공적인 런칭! 해외 기자들의 호평이 이어져!]
[중국의 신예 모델. 릴리. 정유진과 함께 런웨이에 서다.]
[L.M.L 주요 백화점 입점 계획 발표. 성공적인 비즈니스의 첫발을 딛다!]
유진이는 또다시 실검 순위에 이름을 올렸고 릴리 또한 그 존재를 한국에 알리고 있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오늘 기사를 이야기해주자 차 안에는 소란이 일어났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유진 언니! 오늘 진짜 대박이었어요!”
쇼에서 보였던 유진이와 릴리의 모습에 링링이 신이 나 외쳐댔다.
천호동의 집에 도착하자 유진이와 미소만 내려줬다.
“어? 오늘도 같이 자는 거 아니었어요?”
유진이의 질문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아니. 두 사람은 호텔로 갈 거야. 이제부터 링링 아이돌 테스트를 좀 해야 해서.”
내일 귀국해야 했기에 오늘 밤만이 링링의 재능을 테스트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 탓에 유진이와 미소가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면 내일 가기 전에 다 같이 밥 먹어요! 호텔로 갈게요.”
릴리와 링링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유진.”
“응! 꼭이요!”
유진이와 미소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선 곧장 차를 회사로 돌렸다.
가는 동안에도 왕룽과 릴리는 여전히 링링이 한국에서 아이돌을 하는 건 반대의 의사를 보였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한국에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에 맞서 링링은 체리블라썸의 세리는 이미 3집이나 내었으니 자기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지만 딱히 먹히지는 않았다.
어차피 테스트를 받으면 금방 결과를 들려줄 수 있기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았다.
* * *
회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곧장 가수 2실로 이동했다.
“혹시 이동민 실장님 못 보셨습니까?”
가수 2실 직원이 답한다.
“우리 실장님 지금 지하 녹음실 4번 방에 계실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일행들을 데리고 지하 4번 녹음실로 갔더니 방선우가 작곡을 하는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 형?”
얼굴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게 또 작업에 빠져 밤을 지새운 모양이다.
“이 실장님은?”
“아 체리블라썸 신곡 안무 때문에 박선녀 선생님 만나러 갔어요.”
“그래?”
이대로 이동민 실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했지만 이왕 발걸음했으니 방선우에게 테스트를 부탁하기로 했다.
방선우의 절대음감이라면 링링의 가능성을 정확히 짚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선 난 방선우에게 링링을 소개했다.
“선우야. 여기는 링링이라는 친군데 아이돌이 되고 싶대. 네가 보컬 테스트 한번 해 줄래?”
“예.”
링링이 씩씩한 목소리를 내며 허리를 반으로 굽힌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방선우가 당황해 주춤거린다.
“아 예. 선생님이랄 것까진 없고요······. 일단 녹음 부스로 들어가세요.”
“예.”
링링이 녹음 부스로 들어가자 방선우가 컨트롤 패널 앞에 자리했다.
녹음 부스와 통하는 마이크를 눌러 선곡을 부탁하자 링링이 대뜸 강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선곡했다.
“하나 언니의 ‘새로운 시작’ 부를게요!”
방선우가 잠깐 고민하다 말한다.
“모창 말고 본인의 목소리로 불러줄 수 있을까요? 모창하면 제대로 된 평가가 힘들어요.”
“네!”
링링은 자신만만하게 마이크를 붙잡으며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자~ 시작합니다.”
반주가 시작되자 링링의 청아한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맑구나.’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게 아니었기에 프로라고 부르기엔 살짝 부족했다.
하지만 엔터 회사에서 보는 합격선은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다.
외모는 합격선을 까마득히 넘었고.
안도한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데 막상 이제껏 반대하던 왕룽과 릴리는 긴장한 채 서로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게 보인다.
링링이 어려서 반대를 하는 것뿐이지 아이돌이 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링링의 노래를 듣는 방선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대체 왜 그러냐고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워낙 진지한 표정이라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링링의 노래가 끝이 났다.
녹음 부스 안에선 상기된 표정으로 링링이 연신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본인도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녹음 부스를 통하는 마이크를 눌러 링링에게 말했다.
“링링. 잠깐만 기다려봐. 한 곡 더 들어봐야 할 수도 있으니까?”
-네~
일단 시간을 번 다음 마이크를 꺼버렸다.
이제 다시 녹음 부스 안에서는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없는 상황.
난 그제야 방선우에게 사정을 물었다.
“선우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방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내 곁에 있는 왕룽과 릴리의 눈치를 본다.
“괜찮아. 두 사람도 들어야지. 가족들인데.”
그제야 방선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링링은 노래를 부르면 안 될 거 같은데요.”
중국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링링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