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48· 개학(4)
하월평원을 관통하는 대하천을 따 라 남부로 내려가다 보면 흑묘족과 유와족의 부락이 나온다·
예로부터 개구리 종족 유와족과 뭍 가를 두고서 충돌이 잦아서 두 종족 은 항상 앙숙 사이로 지내고는 했는 데··· 탐험가 ‘카일라’는 이 두 부
족 사이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비 밀을 하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키햐아 바로 이맛이제!”
흑묘족이 재배하는 사향 커피로 유 와족이 재배하는 흑방울을 섞어 술 을 빚으면 아주 기가 막히는 보드 카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거 참· 특이한 인간일세·”
“저게 맛있나?”
흑묘족 주민들은 대낮부터 바닥에 다 술판을 벌여놓고서 사향방울주를
마시는 카일라를 보며 혀를 찼다·
“크흐 이 맛을 모르다니· 안타까운 친구들이네·”
떠돌이·
혹은 방랑자·
혹은 탐험가·
혹은 홈리스·
혹은··· 시간 여행スト·
세상을 정처 없이 방랑하며 살아가 기를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일전에 어떠한 이유 때문에 카라코른 산맥 에 묶여서 한참이나 나오지 못했다·
타지의 술을 마시지 못한 지도 어
느덧 수십 년째·
도중에 특별한 운명을 지닌 소녀들 을 만난 덕분에 카라코른에서의 ‘볼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게 된 그녀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 하월 평원을 방랑하며 술을 얻어 마시는 일상을 보냈다·
하월평원은 유난히 다양한 이종족 의 부락이 밀집되어 있었고 수많은 주류 문화가 발달하여 종족의 숫자 만큼이나 많은 술을 맛볼 수 있었기 에 그녀는 이곳을 굉장히 사랑하는 편이었다·
‘흐음· 마지막으로 왔던 때와는 느 낌이 조금 다른걸?’
어쩐지 이종족들의 문화가 하나로 거의 통합된 느낌· 마치 강력한 한 명의 통치자가 나타나서 그들을 모 두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버린 듯하 였지만 그런 건 사실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어찌 됐든 술맛만 좋으면 되니까!”
하월으로 돌아온 카일라는 이곳저 곳을 떠돌아다니며 밤새도록 독하디 독한 술을 즐겼다· 그녀가 주로 찾 아다니는 곳은 유명한 주류가 있거 나 혹은 제조할 수 있는 장소였다·
구릿빛 피부에 사글사글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걸고 유쾌한 농담을 내던지고는 해 서 어디서든 쉽게 이종족과 친해지 고는 했는데 그것이 바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타지에서 술을 얻어 마 시는 카일라만의 비법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커허어···어억?”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꼴아서 정신 을 잃은 뒤 길거리에서 눈을 뜬 카 일라는 뺨에 흥건한 침을 닦으며 일 어 났다·
“어욱 숙취야·”
두개골을 누가 망치로 쿵쿵 두드리 는 듯한 고통· 카일라는 헛구역질을
해대며 몸을 힘겹게 일으키다가 이 곳이 굉장히 낯선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장소였다·
그녀는 [과거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항상 ‘과거에서 발생 한 역사’가 동시에 보인다·
그런 탓에 먼 옛날 좋지 않은 사 건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최대한 피 하는 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이 죽는 광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 쳐졌고 재앙이 발생한 곳에서는 절
규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는 했는데 그것을 맨정신으 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으리라·
“···쳇· 술도 다 떨어졌네·”
숙취에 속이 뒤틀리든 어쨌든 빠 르게 술에 취해서 몽롱한 상태를 유 지하고 싶었거늘·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배 경에 시선을 두었다·
이곳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 는 싸늘한 폐허였다· 술에 취했다고 는 해도 어쩌다 이곳에 도착했을까·
도시가 멸망한 시기는 대략 반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웃음꽃 이 넘치는 활기찬 도시였다·
어느 날 갑작스레·
마나 파워 플랜트가 무너지기 전까 지는 말이다·
마력을 에너지로서 도시에 공급하 는 발전소가 폭발하는 그 순간의 광 경이 카일라의 두 눈동자에 생생하 게 새겨졌다·
보기 싫어도·
시선을 돌려도·
눈을 감아도·
과거의 잔향은 자꾸만 카일라를 괴
롭게 하였다·
“···하아·”
자리에 다시 풀썩 주저앉은 카일라 는 머리가 울렁이는 느낌에 눈살을 힘껏 찌푸렸다·
‘공기중의 마력 결정체 농도가 짙 어···· 마나 방사체로 오염된 건가·,
마력은 무형(無形)의 상태로 존재 할 때만 만물의 생명체에게 이로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화가 되는 순 간 순식간에 생명력을 앗아가는 죽 음의 파장으로 돌변하고 만다·
‘오십 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이런 농도라니···
아마도 평범한 인간이라면 출입하 는 것만으로도 마나 중독 상태에 빠 져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쓰 러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당시에는 얼마 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카일라는 빠른 걸음으로 폐허를 걸 었다· 술맛 떨어지는 이런 장소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선 누 군가의 옆모습을 보고서 걸음을 멈 출 수밖에 없었다·
회색의 머리칼을 꽁지머리로 묶은 어떤 사내가 폐허를 무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한 참상이었지·”
카일라는 본능적으로 품에서 지팡 이를 꺼내들어 그에게 겨누었다·
그녀의 스태프 끝자락에서 촤르륵 은색의 체인이 떨어지며 회중시계가 대롱대롱 양옆으로 흔들렸다·
회색 머리칼의 사내는 공허한 시선 을 돌려 카일라를 마주보았다·
“은세십일월의 조각···· 여전히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구나·”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듯한 말투에 무겁고 차디찬 목소리·
카일라는 그의 회색 시선을 마주하 며 마른침을 삼켰다· 숙취의 고통 따위는 진작 날아간 지 오래다·
“하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야· 나 같은 조각 따위에게 무려 십이신월 씩이나 되시는 분이 참관할 이유라 도 있나?”
십이신월 회공시월(灰空十月)·
세계의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저 남자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아닐까·
두려운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 으나 카일라는 꿋꿋하게 그를 쏘아 붙였다·
“아이테르 월드를 떠났다고 들었는 데 어쩐 일로 돌아왔어? 응? 간만 에 마법사들이 그리웠나 봐?”
“···은세십일월의 파편·”
“그냥 카일라라고 부르지그래?”
“그래 카일라·”
그는 회색빛 눈동자로 카일라 아 니 그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너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광경을 보고 있지?”
“뭐···r
카일라는 표정을 찌푸렸다·
저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안다·
그러면서 굳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끔찍한 광경·”
“50년 전의 참상을 보고 있겠군·”
**그거 말고 더 볼 게 있어?”
카일라가 일부러 짜증 내는 듯 말 하자 회공시월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서 주문을 외우듯 답했다·
“50년 전의 참상만이 과거는 아니 다· 어젯밤 네가 술에 취해서 비틀
거리며 이곳으로 들어온 그 순간도 과거이며 잡초 한 포기가 힘겹게 폐허의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리는 그 순간도 과거다·”
“당연한 말을 뭐 그렇게 빙빙 꼬아 서 하실까?”
“100년 전·”
카일라는 눈썹을 떨었다· 50년 전 의 비극 말고도 100년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싶어서 그날의 풍경을 보려고 했으나·
“200년 전·”
“500년 그리고 천 년 전·”
회공시월은 카일라의 은색 눈동자 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네가 볼 수 있는 과거의 한계는 정확히 거기까지다·”
“어···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은세십일월에게 ‘과 거를 보는 눈’을 물려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천 년 전의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가능했기에·
하지만 회공시월에게 밀리기 싫었
던 카일라는 이를 아득 깨물고서 소 리 쳤다·
“당연한 거 아니야? 십이신월이 그 날 탄생했으니까!”
“아니· 당연하지 않다· 시간을 다룰 수 있음에도 어째서 한계가 정해져 있는지··· 너는 그런 의문을 한 번 도 품어본 적 없나?”
없다· 애당초 이 능력을 받아서 행 복한 적도 없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하다· 파편··· 정확히는 ‘은 세십일월이라는 존재가 내다볼 수
있는 과거의 한계가 정확히 99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구백 구십 년···r
“그래·”
정확한 수치였다· 실제로 카일라가 내다볼 수 있는 과거의 한계는 990 년이었으니·
그런데····
왜 하필 천 년도 아니고 990년인 것일까·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꾸만 알고 싶지도 않았던 생각을 머릿속에 각인시키자 슬슬 괴롭기
까지 했다·
그런 사실 모르고 살아도 된다·
그저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나만의 행복을 찾으면 그만이다·
“운명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너 또 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해라·”
“···그거 나한테 죽으라는 소리 랑 다를 게 없다는 건 알지?”
“죽음은 끝이 아니다·”
“어이가 없네· 자기가 죽는 거 아 니라고 아주 막말이야·”
“너는 제때 네 위치로 돌아갈 필요 가 있다·”
돌연 회공시월의 분위기가 급변하 더니 푸르고 화창했던 하늘과 구름 이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며 카일라 의 숨통이 턱 막혀 버렸다·
“큭···!”
“그런데 이번에는 좀처럼··· 운 명을 순응하지 않는군·”
회공시월은 카일라의 행동이 진심 으로 기분이 나쁜 듯 혹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녀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너를 그리 움직이도록 만 들었지?”
“무 슨···!”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 뒤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서 회색을 거두었 다· 순식간에 날씨는 다시 화창해졌 으나 카일라의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 었다·
“상관없나· 은세십일월이 겁쟁이라 참으로 다행이군· 자신의 기억조차 파편에 나누어 찾을 수 없도록 꽁 꽁 감춰뒀으니·”
“커흑 컥!”
회공시월이 힘을 거두자 카일라는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무릎을 꿇은 채 헛기침을 내뱉었다·
눈물이 핑 돌고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두려움 그 이상·
이건··· 죽음을 목도한 피식자의 감정이었다·
‘아아 여기까진가·’
카일라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카라코른 산맥에서 해방되 어 드디어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 겠다고 생각했거늘·
여기에서 이렇게 가로막힐 줄은 전 혀 알지 못했다·
”네 위치로 돌아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회공시월이 허공을 움켜쥐자 카일 라의 몸이 공간의 저편 너머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슈욱!!
그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뒷말을 이어서 삼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저벅!
발걸음을 돌린 회공시월은 천천히 폐허를 관통하였다·
미련한 은세십일월 때문에 그는 항 상 이러한 고생을 해왔으나 항상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회 공시월은 이번에도 똑같은 시도를 반복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사 명감이었기에·
이곳에서의 일을 완벽히 끝마친 회 공시월은 공간의 저편을 횡단하며 생각했다·
은세십일월의 파편을 원래의 위치 로 돌려놓았으니 이제 은세십일월 이 그곳을 찾아가서 운명에 따라 흡 수하는 순리가 남았다고·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으음 바둑은 혼자 두니까 재미없군·”
은세십일월이 회공시월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단 것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시 포커를 치러 가야겠군·”
은세십일월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회공시월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명이 뒤틀리고 있다·
어떠한 자그마한 존재에 의해 조금 씩 서서히 그러나··· 파격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