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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여름의 끝(4)
유난히도 길고도 길어서 영원히 끝 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하월평원의 장마철도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는 아침마다 따사로이 쏟아지 는 햇살을 만끽할 수 있었고 창밖 으로 매미 소리와 참새 지저귀는 소 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월평원의 장마철이 끝났다는 의 미는 여름의 끝이 도래했다는 뜻이 기도 했기에 상인들은 그제야 마음 을 놓고서 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
“···이야·”
연꽃 객잔 평원의 심장부라 불리 는 장소에서 아침을 맞이한 나는 창 밖으로 펼쳐진 하월의 평야를 넋을 쏙 빼놓고서 바라보았다·
한 개의 무지개만 떠 있어도 신기 하고 예쁜데 저 드넓은 하월평야에 는 무려 수십 개에 달하는 무지개가 구름을 장식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하월평야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장관·
“예쁘네···
하월평원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 답다고 할 수 있거늘 거기에 수십 개의 무지개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은··· 정말이 지 인간의 표현력으로 전부 구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똑똑一!
멀거니 경치를 구경하는데 들려오 는 노크 소리·
“예· 들어오세요·”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문이 열리 며 정장을 입은 웨이터들이 호텔에
서나 볼 법한 고급 호텔카트를 끌고 서 들어왔다·
“조식을 준비했습니다·”
“아··· 네····”
상당히 부담스럽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 이 아닌데· 눈치 보는 내 심정을 아 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정중하게 테 이블 위에 식사를 마련해 놓고서 빠 르게 사라졌다·
아침이라 그런지 막 엄청 휘황찬란 한 식사는 아니었다· 트러플인지 뭐 시긴지로 만든 스프에 구름보다 부 드러울 것 같은 말랑말랑하고 촉촉
한 빵에다가 샌드위치 등·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식사여도 역 시나 고급이라 그런ス] 차원이 다른 맛이기는 했다·
“···맛있긴 하네·”
천천히 스프를 떠먹으며 이전번의 일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 그러니까 내가 10년 전 과거의 시간대에 갇혀 있을 때 기 적처럼 나타나 나를 꺼내준 사람은 젤리엘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나타났는가·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 나 하여튼 중요한 점은 그녀가 나를
구해주었으며 남은 방학 동안 내가 이곳에서 머물기를 희망했다·
개학하면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든 말든 무 슨 상관이지? 우리가 크게 접점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뭐··· 일전에 내가 젤리엘의 아버지를 구해주기는 했다만 그에 대한 정당한 보수도 받기로 약속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식사를 끝마치자 웨이터들이 다시 돌아와서 맛이 좋았느니 편안한 식
사가 되었냐고 물어보며 커피까지 직접 타주었다· 아니라고 답하면 바 닥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라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후우····”
그들을 돌려보낸 뒤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토요일· 이제 다음 주 월요 일이면 스텔라의 개학이 시작된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 이기도 했다·
* * *
현대로 돌아온 뒤 일주일간 연꽃 객잔에 머무르면서 매일 점심과 저 녁 식사는 젤리엘과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이 이상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바람에 식사를 같이 하는 정도밖에 못 한단다·
뭐가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돌아가는 거야?”
젤리엘은 항상 딱딱한 무표정만을 고수하였다· 나에게만 그런 건ス】 아 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는 건 지는 모르겠지만 표정 자체가 워낙 에 살벌해서 가끔은 웃었으면 할 때
가 있다·
“여기서 등교할 수는 없잖아·”
고기를 썰어 먹으며 대충 답하자 젤리엘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뭐 가끔 놀러 갈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굉장히 싫어 한다· 단둘의 식사 자리에서 둘 다 침묵을 고수하면 상당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쉴 새 없이 떠드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젤 리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받아주는 게 전부였다·
원체 말이 없는 건ス 1 아니면 대화
하는 게 싫은 건지·
한참 동안이나 나 혼자 떠들던 와 중 드디어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최근··· 사업을 하나 시작했어·”
“사업?”
그녀는 내게 서류철 하나를 내밀어 서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웬 [사랑 의 나눔]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써 있었다·
“이건··?”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 보려고·”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위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가·
나 또한 별구름 상회에서 본격적으 로 복지 사업을 추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이야기 꺼낼 기회 를 노리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내 가 제대로 부탁하기도 전에 젤리엘 이 먼저 시작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소소하다고?”
전혀 소소하지 않다·
서류를 대충 읽어보아도 알 수 있 었다· 기부금이 다른 데로 새어 나 가지 않도록 7중으로 감사 시스템을 도입했다느니 국제 재난 구호라든가
자원봉사자들을 돕는 정책이라든지 하여튼 뭐가 굉장히 체계적이고 계 획이었으며 본격적이었다·
“기아 대책을 먼저 시작할 거야· 그다음으로는 재난구호와 위기가정 을 위한 긴급 지원 시스템을 도입할 거고·”
“어 어··· 그러냐·”
저 정도만 해도 충분히 대단해 보 였는데 그녀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내 도움을 필 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어·”
그럴 수밖에·
그들이 겪는 많은 불행 중 하나는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클 테니까·
“그런데··· 나는 여전히 누가 어 디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전부 상세히 파악할 수가 없어·”
정보력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
지구보다 정보 전달력이 뒤떨어지 면서도 재난 및 재해가 워낙 많이 발생하는 세계였기에 그 정도는 더 욱 심할 것이다·
“그건····”
“재단을 설립할 거야·”
“엉?”
“전 세계에 ‘사람의 나눔 재단’ 지 부를 세울 거야· 내 눈과 손이 닿지 않는 장소가 없도록·”
뭔가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느낌이 었다·
“사소하지만··· 우선은 이렇게라 도 속죄를 시작해야겠지· 이번 업무 를 모두 끝마친 다음에는 내가 직접 뛰어다닐 생각이야·”
젤리엘· 그녀는 정말로 ‘죄책감’이 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에 대 해 스스로 속죄하기를 원했다·
그건····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결론
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 의 모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는 인성파탄자 소시오패스 젤리엘 이 죄책감을 느끼고서 스스로 기부 재단을 설립할 정도로 바뀌다니·
물론 그런다고 그녀가 지었던 죄가 완전히 씻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 만 그녀가 지금부터라도 선행을 펼 친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했다·
여태 저질러왔던 악행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선행을 한다면··· 그녀로 인해 세상은 틀림없이 변화 할 테니까·
“훌륭해·”
그래서·
나는 젤리엘을 마주하면서도 더 이 상 불편하지 않았기에 활짝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아····”
내가 웃자 그녀 역시도 따라서 웃 는다· 억지로 연기를 위해 끌어올린 웃음이라는 이름의 가면이 아닌 진 실된 웃음·
저렇게 활짝 웃으니 원체 여주인공 급으로 미인상이었던 덕분인지 훨씬 예쁘게 보였다·
젤리엘이 감정을 알게 되어서 참으 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텔라 아카데미로 복귀하는 길에 는 열차를 이용했다· 저녁 늦게까지 젤리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스텔 라 직행 비행선이 끊겨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마법 도시 아르카니 움의 위성 도시로 열차로 향하여 근 방에서 출발하는 비행선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
열차 여행·
나쁘지는 않다·
하월평원이 원체 예쁜 것도 있었지 만 가끔은 이렇게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아이테르 월드에 떨어 진 이후로 참 바쁘게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도 쉴 새 없이 메인 에피소드 니 십이신월이니 신물이니 무언가 목적을 두고서 뛰어다녔고 그 덕분 에 많은 인연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나는 배낭에서 새하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 에피소드를 완 료하여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
[498마녀의 수정 구슬]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라 고 하면 대표적으로 ‘새벽의 수레바 퀴’가 있겠으나 일전에 소모품처럼 사용해 버려서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벽의 수레바퀴는 안정적 인 대신 장기간 아주 조금씩밖에 성 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심지어 나는 마력누설지체라서 그 효율도 지극히 떨어져서 게임을 하
던 시절에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 았다· 하지만 이 마녀의 수정 구슬 은 조금 다르다·
위험한 대신 한 번에 큰 도약을 목표로 할 수 있었으니까·
이곳은 현실이고 목숨은 하나뿐이 었기에 엄청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 겠다만 나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조 금 더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동 안 마유성은 한 층 더 파워업을 했 을 거고····’
물론 제아무리 마유성이라도 1학년 에 5클래스를 달성한다는 괴물 같은
짓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름 방학 동안 그는 ‘경 험’이라는 것을 쌓고 돌아온다·
원작 게임의 스토리에 따르면 1학 년의 마유성은 강한 힘을 보유한 대 신 경험이 부족하여 해원량과 막상 막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해원량에게 라이벌 의식 을 느껴서 경험까지 쌓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 하는 것· 물론 마유성은 잘만 조율 하면 선의 편이 될 수도 있기에 분 명히 좋은 일이었으나····
문제는 마유성뿐만 아니라 다른 주
인공들 역시 여름방학 동안 어마어 마한 성장을 이루어냈을 텐데 나 혼 자만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에피소드에 내가 끼어들 어서 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하려면 조금 더 빠르게 클 필요가 있다·
‘여름방학 바로 다음의 에피소드가 뭐였더라·’
아마도 여러 에피소드가 동시다발 적으로 발생하여 그중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스토리는 역시····
‘도시 괴담이었던가·’
잠시 고민해 본다·
게임에서는 에피소드를 하나만 선 택하여 진행했지만 현실에서도 과 연 그런 편리한 기능이 있을까?
그럴 리가·
아마도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에피 소드가 동시에 나올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나는 분명히 큰 역할을 해내야만 할 테니 역시 이 마녀의 수정 구슬을 사용해서····
덜커덩! 쿵!
“윽?!”
수정을 들고서 고민하는 와중 갑
작스레 열차에 큰 충격이 발생하더 니 몸이 앞으로 쏠리고 말았다·
워낙 초인적인 신체를 가진 덕분에 빠르게 반응하여 크게 다치지는 않 았으나 마녀의 수정을 바닥에 떨어 뜨리고 말았다·
“미친···
힘겹게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보 니 온통 캄캄했다·
“뭐야··· 터널···9″
一 아니·
머릿속에 직접 목소리를 때려 박는
듯한 환청· 텔레파시라는 것을 깨닫 고서는 잽싸게 테리폰을 꺼내 소드 를 활성화하였으나 제대로 빛이 뿜 어져 나오지 않았다·
,아차···!
일전에 아이작 모르프와 전투를 벌 이면서 테리폰이 망가졌던가· 다른 지팡이로는 아직 검을 생성할 수 있 는 수준이 아니었으나 일단은 임시 지팡이를 허겁지겁 꺼내서 열차의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곳에는·
흑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로브로 머리를 가리고 있다지 만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채 공허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머리를 잘라낸 것 처럼·
一너는 누구냐·
그 혹은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뭐지? 누구지? 갑자기?
이런 열차에서 마주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직박구리 안경 을 쓰기 위해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 가려는데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一멈추어라·
“윽···!”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젠장 안경을 쓰지 않으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냐· 어째 서 마녀의 수정을 가지고 있지?
“뭐···r
마녀의 수정은 비록 아이템이나··· 현실에 나타나는 순간 ‘실존하는 물 건’이 된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직 박구리 안경처럼·
그렇다면 즉·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마녀’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 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뜻이 다·
‘이런 멍청한 새끼····)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생각이 짧았다·
게임에서는 아이템을 아무렇지 않 게 꺼냈다가 집어넣어도 이런 사소 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 ···대답하지 않는군·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며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
는지 흑색의 로브가 양손을 펼쳤다·
– 하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게 뭔···
– 나는 마녀 사냥꾼·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내가 두 눈을 크게 뜨자 검은 로브가 지 팡이를 꺼내 거대한 흑색의 낫을 소 환하여 말했다·
– 그리고 수정을 가진 너는··· 마 녀가 틀림없겠지·
그는 그리 말한 뒤 흑색의 낫을 휘둘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목을 노리는 일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