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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여름의 끝(2)
에이젤과 풀레임이 다시 정신을 차 렸을 땐 ‘카라코르니아 폐허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장소에 위 치한 야영지에서였다·
“너희 둘 다 정신을 잃은 채로 발 견되었더군·”
카라코른 탐사대장은 씁쓸한 표정
으로 그리 말하였다·
그들이 카라코르니아 폐허를 탐사 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실종된 카일라의 행방 역시 찾아내지 못했 다고 한다·
그런 와중 풀레임과 에이젤마저도 실종되어 어찌나 걱정이 되었던ス]·
그는 ‘그나마 너희 둘이라도 찾아 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두 소녀가 쉴 수 있도록 개인정비 시간 을 마련해 주었다·
3인용 텐트에 둘만 남게 된 두 소 녀는 한동안 말없이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꿈 같은 일을 겪은 바람 에 아직까지도 현실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풀레 임이 었다·
“···어떻게 할 거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으 나 이미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 처럼 에이젤은 입술을 떼었다·
“모르프란 숲은 과거 모르프 대공 가의 영토였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
‘오염된 땅’으로 지정되어 하나의 국가와 다섯 개의 마탑 그리고 마 법사 협회에서 관리하고 있죠·”
모르프란 숲 근처에는 철저하게 결 계가 둘러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보 안 수호대가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근처로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경계 하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큰 의문을 품지 않았으 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그들은··· 어째서 그곳을 철저하 게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요?”
전설 속 마수 백요호 화령·
9리스크의 흑마인 아이작 모르프·
···거기에 백유설까지·
그 치열한 전투의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모르프란 숲의 격 전지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 땅이 바로 증거예요·”
에이젤 모르프는 이제 목표의 노선 을 확실히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모 르프 대공가를 부흥시키는 일·
그보다도 먼저 세상에 10년 전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면 서 동시에 구천을 떠돌고 있을 아버 지의 영혼을 되찾아오는 것·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프란 숲은 아돌레비트 왕국의 치부와도 같은 장소가 되었으니 결 코 그곳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며 어 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영 혼을 대체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 가·
그래도 괜찮다·
‘아버지는 배신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영웅이었고·’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계시다·’
이러한 진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수확이자 행복이었으니·
에이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운하 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가슴에 쌓여있던 무거운 짐 덩어리가 모조 리 씻겨 내려간 것처럼 상쾌하다·
“으음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으”
“탐사대는 카라코르니아를 본격적 으로 조사할 생각인 것 같아요· 그 리고 아마도···
실종된 카일라를 끝까지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이곳에 없다·
에이젤에게 과거의 잔향을 보여주
는 것으로 제 역할을 끝낸 카일라는 지금쯤 또 다른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을 테니까·
카라코르니아 폐허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못할 확률이 높았으나 열일곱 의 여학생들이 그리 주장해 봐야 아 무도 들어줄 리는 없다·
“저희는 이만 하산하겠다고 말씀드 리고 올게요·”
그리 말한 에이젤이 막사를 빠져나 가자 풀레임은 한숨을 폭 내쉬며 풀썩 드러누웠다·
“하아아아으으으··」
정말 힘겨운 여행이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이렇 게나 쭉쭉 빨릴 줄 누가 알았을까·
에이젤이 걱정돼서 정말 단 한 순 간조차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오기 직전의 일을 상기해 냈다·
백유설이 아이작 모르프의 새벽의 수레바퀴라는 신비로운 물건에 태워 서 보내기 직전·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던 혼잣 말· 아니 그건 틀림없는 ‘대화’였다·
‘저번에 약속했던 선물 아직 받지 못했어· 지금 받아도 괜찮지?’
약속 그리고 선물·
그러고 보면 원작 로맨스 판타지에 서도 유난히 ‘약속’이라는 단어가 많 이 등장하였다· 십이신월들은 누군가 와의 약속에 엮여 있었고 그것을 이 행하려는 것은 틀림없었으나····
이 역시도 제대로 떡밥이 회수되지 는 않았다·
대체 그 약속이라는 건 무엇일까·
새벽의 수레바퀴·,
백유설이 부탁하듯 무언가를 향해 말하자 잠시 뒤 허공에 거대한 수 레바퀴가 나타났다· 즉 눈에 보이지 는 않지만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 ‘누군가’가 무엇인 지 풀레임은 진작 알고 있었다·
‘콘스텔라티오 프로젝트·’
‘새벽의 수레바퀴를 돌려보내겠다·’
왜냐하면 백유설이 직접 그 입으 로 말하지 않았던가·
틀림없다·
백유설은 세계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다는 ‘별의 서고’와 소통할 수 있 으며 열람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백유설이 여태껏 감춰 왔던 무수히 많은 비밀 중 하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기 도 했다· 수만 번이나 시간을 되돌 려가며 세계 멸망과 싸우는 백유설 의 존재를 콘스텔라티오 프로젝트가 가만히 놔둘 리 없지 않겠는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설 속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별의 서고는 열두 가문의 힘을 가진 ‘주 인공’급의 소녀들조차 간신히 접근 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백유설은 아 예 그곳과 소통까지 하다니·
솔직히 말해서 백유설에 대한 비밀 은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점점 더 많 은 의문점이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즐겁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느낌이었으니까·
“···돌아갈까·”
아마 지금쯤 에이젤은 스텔라로 돌 아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테 니 함께 서두르는 게 좋겠다·
* * *
아돌레비트 왕국 수도 테할란·
서리절벽 궁전·
홍비연 공주의 활약으로 레비앙 해 안의 저주가 해제된 지금 따사로운 빛이 쏟아지는 이 절벽에 ‘서리’라 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는 의문이 었으나 궁전 내부의 분위기가 싸늘
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여전히 어울린 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아돌레비트 여왕 홍세류는 붉은빛 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넘기 며 자신의 앞에 고개를 뻣뻣히 들고 서 당당히 서 있는 홍비연 공주를 향해 말하였다·
“스텔라의 개학식이로군·”
,,예·,,
“돌아가겠느냐? 네가 원한다면 이 곳에 남아서 여태 받지 못했던 공주 로서의 교육을 받도록 하겠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분명 공주로서 받지 못했던 교육을
듣는 것도 중요하나 그건 스텔라에 서 틈틈이 공부해도 좋다·
“그러느냐· 스텔라로 반드시 돌아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스텔라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 녀는 3년의 시간을 가득 채워서 정 상적으로 졸업을 할 예정이었으니·
“네게 불리할 것이다· 왕위 계승식 은 3년 뒤로 예정되어 있고 그때까 지 너는 스텔라의 학과 과정을 이수 하느라 왕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할 터이니·”
“언제는 안 불리했습니까· 이제 와 서 배려하는 척은 그만둬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네가 자초한 일 이니 이 건에 대해서는 나를 원망하 지 말도록·”
“예·”
“돌아가도록·”
여왕과 공주의 대화라기에는 너무 나도 담백하고 건조한 마무리였다· 홍비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 아가려다가 잠시 멈칫하였다·
“무슨 일 있느냐?”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얼마 전·
홍비연은 아돌레비트 가문에 대대 로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탓에 아무리 재능없는 공주 라도 수명이 30년을 채 넘기지 못 하였으며 아돌레비트의 불꽃을 타 고난 공주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단명한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
홍시화 공주·
비록 자신에 비해 부족하다고는 생
각하지만 그녀 역시 천부적인 재능 을 타고났을 터·
“그녀는···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까?”
수명을 다하기 직전의 아돌레비트 공주는 불꽃을 제어하지 못하여 시 름시름 앓다가 삶을 끝낸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 홍시화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항상 여유만만 하고 여전히 불꽃의 마법을 자유자 재로 다루며 단 한 번도 폭주한 모 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즉 그 모습은 마치····
아돌레비트의 저주를 극복하기라도
한 것 같지 않던가·
“그런 건 아니다·”
홍세류 여왕은 딱잘라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특별한 방법 으로 그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는 말 을 해줄 수 있겠군·”
“···그렇습니까?”
“궁금한 것은 그게 전부인가?”
“예·”
역시나 어떤 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인 다·
물론 굳이 홍시화가 알아낸 역겨
운 방식으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기에 홍비연도 크게 관 심을 가지지 않았다·
뭐하러 머리 아프게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겠는가?
여왕이 되면 그만인 것을·
홍비연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젓고 서 뒤돌아 나가려고 하자 홍세류가 덧붙여 말했다·
“궁금해하지 말거라·”
“알아봐야 네게 독이 될 테니·”
궁금해할 생각도 없고 알게 된다
고 하더라도 홍시화가 알아낸 방법 을 사용하여 삶을 연명할 생각도 없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홍세류를 뒤로한 채 알현실을 빠져 나온 홍비연은 왕실 직속 기사단의 경례를 받으며 기나긴 복도를 걸었 다· 그렇게 조용히 혼자 사념에 빠 지려고 했거늘 저 멀찍이 문에 기 댄 채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유 난히 거슬렸다·
,,안녕?,,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역겨운 얼 굴·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응응! 스텔라로 돌아간다면서? 가 기 전에 동생 얼굴이나 봐둘까〜 싶 었지〜!”
“봤으니까 이제 가십시오·”
“에잉 너무 매정해!”
홍시화가 우는 연기를 하며 양손을 얼굴에 모으든 말든 무시한 채 지나 치려는데 대뜸 그녀가 말했다·
“궁금해?”
“···뭐가 말입니까?”
“내가 아직까지도 건강하게 잘 살 고 있는 법 말이야·”
“대화를 엿듣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나도 여왕 폐하께 볼일이 있기도 했었고〜”
자신한테 불리한 말은 빙글빙글 돌 려서 회피한 뒤 다시금 표적을 상대 방에게 돌리는 화법은 홍시화의 버 릇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는? 궁금해? 궁금하지? 알려줄까?”
“···필요없습니다·”
“에헤이· 너 그러다 왕위 빼앗기면 그대로 꼴까닥! 죽어버린다구?”
“당신의 역겨운 방식으로 비루한 삶을 연명할 바에야 그게 낫겠군요·”
딱 잘라서 말한 뒤 지나치려고 하 자 홍시화가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 고서 말했다·
“울 동생·”
“···뭡니까?”
“이거 볼래?”
홍시화는 대뜸 자신의 상의를 훅 걷어 올리더니 배꼽 부근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기사단의 시선이 따갑 다· 일국의 공주씩이나 되면서 수치 심도 없단 말인가·
···그런 생각보다도 먼저·
홍비연은 조금 놀라는 바람에 눈
동자를 크게 뜨고 말았다·
“그건····”
“네 말이 맞아· 나는 역겹고 비루 한 방식으로 연명하고 있어·”
그녀의 배에는 흰색의 마법진이 새 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불꽃처 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저건 진짜로 불타고 있는 게 맞다·
그도 그럴 게 상의를 걷어 올린 순간부터 이 부근의 온도가 순식간 에 상승하였으니까·
근처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 줄 흐를 정도로 뜨거운 열기·
“···그런 불덩어리를 체내에 항 상 지니고 다니는 겁니까?”
“응· 뭐어〜 조금 뜨겁고 아프긴 해 도 버틸 만은 해에~ 죽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잖아?”
저것은 틀림없는 홍시화의 치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던··· 약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갑자기 왜?
저것을 내게 왜 보여주는가·
“그거 알아? 너 말야 여왕이 되면 저주가 임시로 억제돼서 훨씬 더 오 래 살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네가 낳은 자식도 과연 그럴까?”
“뭐····”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홍비연은 입술을 달싹거릴 뿐 대답 하지 못하였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응? 자식을 낳고 싶은데 그 자식에 게 반드시 네게 걸린 저주가 옮겨갈
운명이라면 어떨까? 그런데 왕위를 물려받지 못해서 결국 언젠가는 콱 죽어버릴 운명이면? 너는 그래도 자 식을 낳을 거야?”
“그 건···
손끝이 덜덜 떨렸다· 여태껏 항상 자식으로 살아왔기에 ‘엄마의 입장’ 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면··· 홍비연의 어머니 홍이엘은 유난히도 딸에게 가혹했 다·
한데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만들 어서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서 슴없이 가하던 그녀를 두고서···
과연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건 사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흐응〜”
혼란스러워진 홍비연을 잠시 바라 보던 홍시화는 콧소리를 내며 상의 를 거두었다·
그러고서는 알현실을 향해 걸어가 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해 봐~ 너는 나처럼 비루한 방식으로 삶을 연명하고 싶 은 게 아니잖아?”
그녀의 말이 맞다·
홍비연은 홍시화처럼 살고 싶은 생 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왕위 계승이라는 ‘옳은 방법’으로 천수를 누리려고 했거늘·
“아····”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던 방식 이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종착지가·
사실은 반쪽짜리였다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모르겠어·’
그녀의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