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46· 옛날이야기⑸
멜리안의 실종 이후 무수히 많은 마법사들이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마나 유동 현상을 감지하거나 영혼 을 추적하고는 했다·
그들의 방법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카르멘세트의 고대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점이 문제였다·
하여 백유설이 제안한 던전 역추적 은 새삼스레 창의적이지는 않았으 나··· 상당히 획기적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기술은 5년 뒤 미래 에나 개발될 예정이었기 때문·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T
멜리안이 소멸된 자리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한 자취나 멜리안의 영 혼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 로 ‘소원’이라는 거대한 의지가 개 입되었는데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 을 리는 없었다· 단지 그것을 감지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기술을 스틸한 건 조금 미안하지 만 어쩔 수 없지·’
백유설은 무덤덤하게 만월탑의 블 랙 수색대를 지휘하였다· 정확히 말 하자면 지휘가 아니라 거의 부탁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제부터는 스피릿 레이트가 필요 없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베타 버전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파동 조절을 해야 해서요·”
제아무리 지휘권이 넘어왔다고 해 도 결국 그는 학생의 신분이었고 임 시로 부여받은 권한이니 최대한 예
의를 차리는 것이다·
블랙 팀도 그런 그의 부탁을 거절 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백유설의 말 을 믿지 못했다지만 현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 있는 한 명의 마법사이기도 했으니까·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렸더라도 따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이군·”
만월의 거탑주 해성월은 멀찍이 떨 어진 곳에서 현장을 한순간도 빠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특이한 아이야·’
스텔라 생도 백유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올해 초부터 꾸준히 끊임없이 들어왔다·
학교 내에서 벌어진 사소한 이야기 를 제외한다고는 쳐도 그가 여태까 지 벌인 행적이 너무나도 특이했기 때문이다·
먼 고卜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위대한 마법사들과 비슷한 발자취를 걷는 그의 모습에는 같은 마법사로 서 아주 약간의 존경심까지 들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유설이 라는 존재는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르리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뛰어나군·’
기이할 정도였다·
모든 사건에서 백유설은 항상 옳 은 해답만을 내놓았다· 정보력이 빠 른 해성월이기에 가장 최근에 레비 앙의 해안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망 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해적왕 블랙 벨리즈를 일격에 쓰 러뜨린 자가··· 사실은 백유설이라 고 했던가·’
분명 역사 속 전설적인 마법사들 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떠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유설처럼 독보 적인 행보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저 아이는 마치···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는 무수한 지 식의 흐름을 따라서 생각하던 해성 월은 저도 모르게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어렸을 적 공상 마법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일까 자꾸만 불가능한 일을 목전에 두면 불가능한 가능성 을 떠올리게 된다·
그 덕분에 수많은 발견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던
것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 니다· 해성월이 고개를 저으며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비명 소리 가 들려왔다·
“우아아아아아!!”
“차 찾았다! 찾았습니다!”
비명이 아니라 환호성이었다·
“뭐? 정말로?”
“벌써 찾았다고?”
멜리안이 실종된 이곳에는 만월탑 의 마법사들을 포함하여 타 소속 마 법사들 역시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 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라고?’
그 소식은 해성월에게도 놀라웠고 또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무 언가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천천 히 발걸음을 옮겼으나 그보다도 먼 저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 이 있었다·
젤리엘이었다·
“아···!”
허겁지겁 달려가 백유설이 조작하 던 기묘한 기계를 바라본 그녀는 그 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별구름의 몇몇 보디가드가 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
며 해성월은 잠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에게서 끊임없이 느껴지는 정체 모를 위화감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 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도 될 테니·
상실감·
익숙했던 무언가를 잃는다는 경험 은 누구에게라도 썩 달갑지 않을 것 이다· 언제나 함께해왔던 연인이나 가족 혹은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다리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팔을 잃는다거나·
상실감은 우리의 일상에 자리해 있 어 언제라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잃었던 무언가를 찾았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 릿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아····”
어느 산 중턱의 어느 구름 위·
은세십일월은 숨을 크게 내쉬며 눈 을 떴다· 은색 빛의 기운이 그의 안 광을 스치고 지나갔다·
“···좋군·”
아주 오랜만에 시간의 일부를 되찾
은 그 충만감은 감히 인간이 만들어 낸 어설픈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 었다·
“이제야 좀 보이는군···
이 느낌을 굳이 인간스럽게 비유하 자면··· 잃었던 시력을 되찾는 느 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수히 많은 갈래로 뻗어 있는 미 래가 이제야 선명하게 비춰졌다· 자 그마한 변수조차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음?”
무언가 이상한 것이 ‘미래’에서 포 착되는 바람에 은세십일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이건··· 윽!”
아직 과거,의 힘을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나도 많은 미래를 내 다본 탓일까 어마어마한 두통이 들 이닥쳤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균형 잡힌 상황이 아니라면 여전히 제 능 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상황·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구름 위에 세워진 오두막으로 향했다·
나무 냄새 가득한 오두막의 서랍장 에서 오래된 돋보기안경을 찾아 쓴 그는 다시금 미래를 내다보려고 했 지만····
“···밖에 누구더냐·”
오두막의 바깥쪽에서 기분 나쁜 기 운이 포착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 다· 은세십일월은 뒷짐을 지고서 천 천히 오두막을 나왔다·
그곳에는 웬 인간 여인과 드워프 청년이 은세십일월을 향해 무릎 꿇 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언뜻 평범한 인간과 드워프처럼 보 일 수도 있겠으나 은세십일월의 눈 을 속일 수는 없다·
저들은 흑마인 그것도 최상위 계 층의 흑마인이었다·
“코스탈린의 마지막 일족과 더러운
식인종이로군·”
그들의 이름은 아즈믹 코스탈린과 칼라반· 발카믹 왕가를 단신으로 멸 망시킨 전설의 흑마인 블랙킹던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들이 다른 누군가 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결코 흔한 광경이 아니리라·
하지만 흑마인에게도 십이신월은 존경의 대상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 한 풍경이었다· 아니 오히려 흑마인 이기에 마법사보다도 더더욱 십이신 월을 존경한다·
열두 개의 원소를 다루는 저들이야 말로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끌 존재 라고 생각하였으니까·
“이곳은 어떻게 찾아왔느냐·”
은세십일월은 백유설을 대하는 태 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눈앞의 흑마 인들을 대하였다·
코스탈린 일족의 아즈믹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말하였다·
“근처를 지나는 와중 당신의 기운 이 느껴져서 찾아왔습니다·”
평상시에는 기운을 철저하게 감추 고 살아왔지만 ‘신물’의 힘을 홉수 할 때는 그것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누군가가 찾아오리란 것쯤은 예상 했으니까· 그나마 ‘삭월탑주 루드릭’ 이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렇겠지· 너희가 이곳을 지나가 던 이유는··· 백유설 때문이겠군·”
아즈믹과 칼라반은 일전에 백유설 사냥 임무를 맡았다가 실패했다·
그래서 원한이 생겼느냐?
아니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이었다·
고작해야 별 볼 일도 없는 스텔라
의 1학년 생도에 불과한 그 소년을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삭월탑주와 스텔라 교장을 비롯하여 심지어 블 랙 킹 던마저도·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시간을 다루는 십이신월 은세십일 월마저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 다·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말하거라·”
“그 소년은··· 대체 정체가 무엇 입니까?”
은세십일월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대답해 줄 수 없겠군·”
아즈믹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 고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있어서 대답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나도 모르겠군·’
신월은 눈을 감고서 미래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 이 파노라마처럼 주욱 늘어졌다·
그리고 그 미래의 모든 순간에·
백유설이 존재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미래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대재앙이 발생하여 세계의 안위를 위협할 때도 지옥에 봉인당한 악귀 가 깨어나 대륙 하나를 통째로 들어 올렸을 때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 천상계가 다시금 세계에 모습 을 드러냈을 때 바닷속에 잠든 전 설의 유적지가 나타났을 때도·
중요한 일이라고 부를 만한 세상의 모든 사건 사고에는 반드시 백유설 이 간섭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자 기희생적이었다· 무수히 많은 시간 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포기하는 법 을 배울 법도 한데 말이다·
마치 자신처럼·
그러나 그는 포기를 배우지 못했 다· 어쩌면 배웠음에도··· 다음 생 을 시작함과 동시에 잊어버렸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신월이시여·”
“말하거라·”
“···그때의 부탁은 아직 유효합
니다· 저희는 아직 당신들을 기다리 고 있습니다·”
그때의 부탁이라·
벌써 50년도 더 전의 일이라 기억 도 가물가물하다· 애당초 신경도 써 본 적이 없으니까·
“너희들의 두목이 했던 부탁 말이 더냐?”
“두목이 아니라 제왕입니다·”
“그래· 흑마두목·”
흑마도왕을 감히 그런 천박한 단어 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더
있겠는가· 자신들의 왕이 모욕당했 음에도 두 흑마인은 고개를 숙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전하거 라· 너희들의 ‘낙원’은 거짓이야· 그 릇된 선택을 도울 생각은 없다·”
그러자·
“아니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목소리 로··· 아즈믹은 서늘한 기운을 풀 풀 풍기며 말하였다·
“당신은 틀렸고 우리는 옳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구원할 ‘낙 원’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당 신들은 낙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어째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까?”
“허허·”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기분이 들 어 은세십일월은 그저 웃었다·
설명해도 소용없음을 안다·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는 것만큼이 나 어리석은 일도 없다·
“돌아가거라·”
“···후회하실 겁니다· 때가 되었 을 때는 이미 늦었을 테니까요·”
아즈믹과 칼라반이 모습을 감추자 은세십일월은 터덜터덜 걸어서 바둑
판 앞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와 함께 두고 있던 이 바둑은··· 결판이 끝 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돌을 쥐었다·
툭!
흰돌을 놓고 흑돌을 놓는다·
끝나지 않는 바둑은 없다·
끝내지 못한 바둑이 있을 뿐·
그러다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이 우주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시간 역행’의 기운이 갑작 스레 감지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ス 1 그리고 누 구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파생되어 의지를 갖 추고서 세상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 가는··· ‘과거의 신물’이 다시금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되감긴 태엽은··· 대략 10년 정 도일까·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었 다·
“···썩을 년이 또 장난질을 치는군·”
툭!
흰돌을 놓았다·
또다시 누군가가 자신의 서글픈 운 명을 맞이하기 위해 한 발자국 천 천히 걸어가는 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시간에 간섭할 수 없는 힘없는 노인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잠자코 기다릴 뿐
툭!
노인은 말없이 바둑을 두었다·
정적만이 가득한 구름 위의 정자에 는 바둑돌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