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0화
290. 쇼케이스 1
“자~ 철수합시다!”
조진희 이사는 LM 의류에서 문영미 대표와 20년을 함께 한 디자이너이자 현재의 LM 의류를 만든 사람.
회귀 전에는 문영미 대표에 이어 부사장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LM 의류의 공신이자 서열 3위라고 하더라도 내 팀원인 이미리 대리가 그녀에게 혼이 날 이유는 없다.
이미리 대리는 이영아 실장의 요청으로 L.M.L 브랜드 쇼케이스를 위해 도와주러 왔는데 말이다.
게다가 유진이를 빼니 마니 하는 소리도 가소로울 뿐이었다.
“뭐 하십니까? 우린 여기 부탁을 받고 와 있는 거지 욕먹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이자 이미리 대리가 주춤거린다.
“팀장님. 저 때문이라면 괜찮으니까······.”
이 와중에도 이미리 대리는 유진이와 내가 입을 피해를 걱정한다.
자기 딸이 아프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냐고 의심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습니다. 이 대리님이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 생각했으면 L.M.L이랑 계약도 안 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 옷에서 손 떼고 오세요.”
눈치를 보던 이미리 대리가 의상에서 손을 떼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자 조진희 이사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며 눈을 부라렸다.
“넌 또 뭐야?”
난 곁에 있는 유진이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보면 모릅니까? 정유진 씨 매니저지.”
“뭐? 하~ 어이가 없네. 고작 매니저 따위가······.”
LM 의류 정도 규모의 이사급이 되면 소속사 대표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랬든 저랬든 갑인 광고주님이니까.
그러나 오늘의 브랜드 쇼케이스의 갑은 유진이다.
오늘 행사는 돈을 받고 온 행사도 아니고 계약서에 명시된 행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영아 실장의 부탁으로 바쁜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출연을 허락했다.
사적인 시간을 줄여가며 연습까지 해 왔더니 이런 대접이라니.
링링이 상황을 통역해 준 탓에 왕룽과 릴리도 대번에 상황을 알아채고 날 따라온다.
우리 일행이 우르르 돌아왔던 통로로 몸을 돌리자 조진희 이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친다.
“이봐! 정유진 씨! 이렇게 그냥 가면 계약 위반인 거 몰라?”
그래도 유진이가 잘나가는 연예인이라고 막말을 하진 않았다.
나와 함께 걷던 유진이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가라고 해서 가는 건데 뭐가 계약 위반이죠?”
“뭐 뭐라고? 내가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뭐라고요?”
난 발끈한 유진이를 말리며 대꾸했다.
이런 건 매니저가 처리할 일이니까.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유진이는 오늘 쇼에 서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가서 계약서나 확인하세요.”
순간 우리를 안내한 최선미 대리가 눈을 질끈 감고 외친다.
“정 팀장님. 잠깐만요. 이 실장님에게 말씀드릴 테니까 여기서 잠시······.”
조진희 이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야. 최 대리. 너 미쳤어? 어디서 함부로 끼어들어?”
난 조진희 이사의 거친 말에 신경을 끄고 왔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선미 대리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왕룽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왕룽. 내가 잘 아는 뼈 해장국이 있는데 한국에 오면 꼭 한번 먹어봐야 할 맛집이거든. 갈래?”
왕룽과 릴리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콜~”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이영아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잠깐만요~! 정 팀장님! 잠깐~~마~~안!!”
백스테이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추자 일행들도 발을 멈춘다.
이영아 실장은 조진희 이사를 지나쳐 뛰어와 내 팔을 꼭 붙들었다.
“가긴 어딜 가? 못 가요!”
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릴 노려보는 조진희 이사를 가리켰다.
“조 이사님께서 가라고 하셔서 가는 건데요?”
이영아 실장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린다.
“이사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우리 회사에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무대 의상에 손을 대게 허락하다니! 이 실장이야말로 뭐 하는 거야?”
“제가 특별히 부탁드린 건데 못 들으셨어요?”
“들었어. 하지만 그거 이 실장이 실수한 거야. 일을 이렇게 하면 우리 디자이너실 식구들 체면이 뭐가 돼?”
이영아 실장이 발끈해 외친다.
“그 체면 지키자고 오늘 쇼를 망친다고요? 제정신이에요?”
조진희 이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 실장. 너 오늘 말이 좀 심하다?”
“심한 건 이사님이시죠. 디자이너실 체면 지키고자 힘들게 모신 실력자를 쫓아낸다고요?”
“뭐? 누구 맘대로 실력자야?”
두 사람의 눈길이 파바박 튄다.
한 명은 미국 유학파에 창업주의 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창업주와 20년을 함께 해 온 디자이너.
구 세력과 신 세력의 기 싸움이다.
씩씩거리던 이영아 실장이 이미리 대리를 가리키며 외친다.
“오늘 쇼케이스 기획의 70%가 여기 이미리 대리님 아이디어라는 건 아세요?”
“아니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당연히 자랑이죠. 이 대리님이 고른 제품을 여기 유진 씨가 입어서 L.M.L 브랜드가 이렇게 빨리 떴으니까요! 그게 아니었으면 오늘 제대로 된 쇼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조진희 이사가 코웃음을 친다.
“이 실장. 너 우리 LM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있는 우리 LM을?”
이영아 실장이 콧방귀를 뀐다.
“이사님이 후배 디자이너들 띄워 주고 싶은 건 아는데 그것도 상황 좀 봐 가면서 하세요.”
“야! 이영아. 너 말이면 단 줄 알아? 내가 널 업어 키웠어!”
두 사람의 다툼이 격렬해진 순간 런웨이와 연결된 통로 쪽에서 문영미 대표가 나타났다.
곁에 있는 비서가 뭔가를 열심히 말하는 걸 보니 현 상황을 알려주는 모양이다.
문영미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 뒤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일단 두 사람 다 언성 낮춰. 밖에 VIP들이 들으면 무슨 개망신이니?”
문영미 대표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한다.
그러자 조진희 이사가 따지듯 덤벼들었다.
“대표님. 이 실장이 브랜드 운영을 이따위로 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거예요?”
이영아 실장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딸인 이영아 실장이 전전긍긍하는 걸 보니 LM 의류 조진희 이사의 위세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영미 대표는 조진희 이사의 기대를 저버렸다.
“잘하고 있는데. 왜?”
“예?”
“네가 와서 분탕질 치기 전까지는 아주 잘 되고 있었다고.”
순간 조진희 이사가 외친다.
“대 대표님. 설마 지금 딸이라고 이 실장 편드시는 거예요?”
문영미 대표의 부드러운 말투가 변한다.
“진희 너. 내가 언제 딸이라고 편애하는 거 봤니? 이게 아주 사람을 우습게 만드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은 네가 LM 의류에 해온 공이 있어 가만히 있었는데 안 되겠다. 오늘 이후로 L.M.L에서 손 떼. 애초에 네 권한도 아닌 일에 나서긴 왜 나서?”
그 순간 조진희 이사는 친한 언니에게 말하듯 외쳤다.
“언니! 아무리 매출이 좋아도 자존심 안 상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애한테 옷을 맡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우리 디자이너들 체면은 생각 안 해?”
갑자기 문영미 대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다.
“디자이너들의 체면? 자존심? 아~ 그동안 디자이너도 아닌 내 밑에서 일하느라 엄청 자존심 상했나 보다? 코딱지만 한 속옷 가게에서 시작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겠네?”
조진희 이사가 빽 하고 외쳤다.
“언니. 그거랑은 다르지!”
“다르긴 뭐가 달라!”
문영미 대표가 호통을 치자 조진희 이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분하다는 듯 쳐다보자 문영미 대표가 한술 더 뜬다.
“한동안 회사가 정체된 게 왜 그런가 했지. 이제 보니까 알겠네. 디자이너들이 철밥통처럼 구는 걸 방치한 내 죄다 내 죄. 그리고 조 이사. 넌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마.”
조진희 이사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언니! 지금 말 다 했어?”
“그래. 실무를 책임진 사람이 이렇게 꽉 막혔으니 회사 성장이 정체되지! 이제 좀 비켜!”
문영미 대표가 곁에 있는 비서를 쳐다본다.
“장 비서. 법무팀에 잘 이야기해서 부당해고 안 걸리게 통보 다시 잘해요. 해고 사유는 막대한 영업 손실 위협이든 뭐든 알아서 하고.”
비서가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조진희 이사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문영미 대표가 그 입을 막았다.
“한마디만 더 해 봐. 네 라인 애들도 싸그리 다 날려버릴 테니까!”
문영미 대표의 호통에 백스테이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 붙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디자이너와 스태프들 절반은 조진희 이사의 라인.
하지만 아무리 조진희 이사가 LM 의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해도 맨손에서 2천 억대 기업을 키운 문영미 대표만큼은 아니었다.
조진희 이사가 얼굴이 탈색되더니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조진희 이사를 처리한 문영미 대표가 한숨을 작게 내쉰다.
그리고 힘이 빠진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미안해요. 정 팀장. 우리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너그럽게 용서해주면 안 될까요?”
이영아 실장과 문영미 대표가 잘못한 게 아니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좀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를 받자 문영미 대표가 이번엔 이미리 대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 대리님. 요 몇 주간 틈틈이 우리 일 돕느라 고생 많이 했는데 진짜 미안해요. 내가 대신 용서를 빌게요.”
문영미 대표가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란 이미리 대리가 문영미 대표를 붙잡았다.
“대표님! 이러시지 마세요!”
하지만 문영미 대표는 꿋꿋이 허리를 굽혔다.
“들어보니 우리 회사에도 지원했었나 본데······. 난 그런 것도 몰랐어요.”
“아니에요. 저 대표님한테 사과받을 거 없어요. 그러니까 고개 드세요.”
문영미 대표를 일으키는 이미리 대리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거렸다.
문영미 대표의 사과 덕에 가슴 아팠던 그 시절의 아픔이 조금은 치유된 모양이다.
백스테이지의 소란이 끝난 직후.
조진희 이사는 넋이 나간 채로 직원들에게 끌려나가 버렸다.
* * *
사태가 완전히 정리되자 문영미 대표가 내게 조심스레 말한다.
“정 팀장. 오해 말고 들어요.”
“예. 대표님.”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만에 하나라도 여기 이 대리가 다시 패션 업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하면······ 그땐 내가 모셔도 될까요? 이 대리 경력을 생각하면 우리 쪽으로 오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조진희 이사를 전격적으로 해고한 건 아마도 평소에도 감정이 쌓였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그 기폭제가 된 건 아마도 인재 중의 인재인 이미리 대리를 놓친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문영미 대표의 사정이고 나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이미리 대리의 능력이 우리 업계보단 패션 업계에서 더 적합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미리 대리가 빠지면 내 계획이 흔들린다.
스타일리스트가 연예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데.
하지만 내 계획을 위해 이미리 대리의 앞날을 막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문영미 대표가 해줄 대우를 나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순간 이미리 대리가 먼저 나섰다.
“문 대표님. 좋은 제의 감사하지만 전 회사를 옮길 생각이 없습니다.”
문영미 대표의 눈이 이미리 대리에게 향한다.
“지금 말고요. 나중에라니까요?”
“아니요. 억만금을 주신다고 해도 정 팀장님이 우리 은별이를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못 갑니다. 정 팀장님이 가라고 하셔도 말이에요.”
그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미리 대리가 은별이를 구해준 일을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 대리님······.’
이미리 대리의 대답에 문영미 대표가 잠깐 멈칫한다.
그리고 잠시 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미안해요. 제가 괜히 불편하게 한 것 같네요. 앞으로 다시는 이 이야기 안 꺼낼게요.”
은별이를 구해준 무게를 단번에 알아차린 문영미 대표였다.
문영미 대표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님이 부럽네요.”
난 씨익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 역시 이미리 대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뿌듯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백스테이지의 소란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런웨이를 위한 준비에 모두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 *
이미리 대리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그친 뒤 3번 의상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유진이와 릴리는 의상을 입어 보느라 남고 나는 문영미 대표와 함께 객석으로 이동했다.
객석으로 가던 도중 문영미 대표는 최근 유진이의 성공을 축하해준다.
“유진 씨 이미지가 워낙에 좋아서 저희 회사가 덕을 참 많이 보네요. 고마워요 정 팀장.”
“유진이가 워낙 착해서 전 별로 한 게 없습니다.”
문영미 대표가 씨익 웃는다.
“그런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능력 아닌가요?”
나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문영미 대표로부터 뜻밖의 소식 하나가 흘러나왔다.
“아 그런데 오늘 HK 의류 쪽 사람들도 왔어요.”
“HK 의류요?”
브랜드 쇼케이스에는 관련 업체와 연예인들 그리고 기자들을 초청한다.
업계 1위인 HK 의류를 초청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유진이를 독점 모델로 하기 위해 HK 의류와 싸웠지만 말이다.
“혹시 누가 왔습니까?”
“구왕수 대표랑 홍성범 전무가 직접 왔더라고요.”
HK 그룹의 4남이자 차기 HK 의류의 대표가 되는 그가 초청을 받아 왔단다.
유진이를 노리던 그 파락호가 말이다.
문영미 대표의 말을 듣고 런웨이 맨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 우리가 앉을 지정석이 있고 그 옆자리에 홍성범 전무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