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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비현실⑴
빛과 시간조차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념의 파도 속에서 풀레임은 끝없 이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마치 TV 전원의 버튼을 누르듯 완전한 흑색으로 꺼져 있던 풀레임 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
주춤·
걸음을 멈춘 그녀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웅성웅성·
빵빵-!
소란스럽고 퀘퀘한 냄새·
저 하늘 높이 솟아오른 회색의 빌 딩과 매연을 뿜는 자동차들 일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과 학생들·
“어····”
툭!
“비켜! 바빠 죽겠는데·”
회사원 한 명이 멍하니 서 있던 풀레임의 어깨를 치고 지나쳤다· 그 제야 그녀는 자신이 가방을 메고 있 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이건··丁
[일월고등학교 3-7 풀레임]
그것은 명찰이었다·
‘아 그렇지·’
그때서야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서울의 일월고등학교에 다니 는 고등학교 3학년의 풀레임· 지금 도 등교하는 도중이지 않았던가?
‘나 참·’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어젯 밤에도 공부하느라 거의 밤을 새우 다시피 해서 그런지 머리가 오락가 락 하는 것 같다·
그런 판타지스러운 꿈을 꾸다니·
···근데 무슨 꿈이었지?’
원래 꿈이라는 게 깨어나서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저 멀리 사
라진다더니 이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뭐 어때·”
그녀는 꿈속 세상의 기억을 뿌리치 고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버스 노선 어플리케이션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 5분 뒤 도착이라고 나와 있다·
*···조작감이 조금 어색하네·’
왜 이렇게 스마트폰 만지는 게 익 숙하지 않은 것 같지? 버스 정류장 에 서서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폰 을 톡톡 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 에서 와락 끌어앉았다·
“야〜 풀레이임〜 오늘 하루종일 왤
케 카톡 씹는 거야〜?”
“어 어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포옹이었으나 상대는 이 상황이 익 숙한 듯 보였다·
흑색의 긴생머리를 가진 저 소녀의 이름은 한초연
청아하고 얌전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굉장히 심술궂은 성격이었으 나 풀레임과는 1학년 때부터 만나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응? 지금도 폰 만지고 있으면서· 뭐 봐? 너튜브? 헉 너 이거 뭐야· 너 언제부터 갑빠소년단 챙겨봤어?
연예인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더 니·”
“내가 본 거 아니야! 그냥 누르다 보니까 너튜브 알고리즘에 떠서····”
¹⁴에이 그짓말 하기는· 너 내가 모 를 줄 알았냐? 맨날 오빠들 예능 챙겨보는 거 뻔히 다 보이는데·”
“아니라니까! 구독도 안 했고 적 어도 본방은 안 봐! 그냥 뜰 때마다 호기심에 눌러보는 거야!”
뭔가 어색하지만 익숙한 듯한 단어 가 입에서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흐응~ 그래? 너는 너튜브로도 맨 날 영어 강의나 수학 강의만 볼 줄
알았는데 역시 너도 사람이었어·”
“아니라니까···
억울하진 않았지만 억울했다·
그게 사실은 남들 몰래 갑빠소년 단 오빠들 영상 꼬박꼬박 챙겨본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들키고 싶지 는 않았는데····
얼굴이 화끈하다·
아닌 척하다가 들켜서 그런지 부끄 러움이 몇 배가 되는 것 같다·
“어 버스 왔다!”
“말 돌리기는〜”
다행스럽게도 타이밍 딱 맞춰서 버
스가 도착하여 풀레임은 도망치듯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버스에 탑승한 뒤에도 한 초연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 에 갈굼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 다·
* * *
···여기가 우리 학교?’
일월고등학교는 5층 건물이었다·
평범한 일(一)자 형태에 건물 옥상 에 학교 마크가 새겨져 있는 서울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 디 평범한 고등학교·
“갑자기 왜 멈춰? 빨리 가자· 지각 이야·”
“어 응·”
한초연이 보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향해 걷기는 한다만 뭔 가 자꾸 걸리고 어색했다·
“저기 초연아·”
“왜케 다정하게 불러 닭살 돋게·”
“우리 학교가 이렇게 작았던가···?”
“어· 좀 콩알만 하긴 하지? 옆 동 네 학교는 졸라 큰데·”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보다 작은 거 같아서·”
“네 키처럼?”
“이 미친년이 진짜 뒈질라고····”
“므흐흐 키 건드리니까 바로 성깔 나오네? 아침부터 이상하더라니 이 제는 학교 크기 타령이냐?”
한초연의 반응이 정상이다·
등굣길의 다른 학생들도 어색한 점 없이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있는데 괜히 나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너무 예민한가···
고3 스트레스라는 게 참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가 보다·
띵-동-댕시
완전 20세기식 구닥다리 학교종이 울릴 무렵 풀레임은 간신히 도착하 여 〇교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〇교시라고 해봐야 정규 수업시간은 아니고 영어 듣기 평가를 예습하는 시간에 불과하여 대부분의 학생들이 엎드려서 잠을 청하고 있다·
선생님도 마땅히 터치하지는 않는 다· 고3이든 뭐든 공부는 하는 사람 만 하는 것이었으니·
뭔가 이상하다·
나 말고 제대로 공부를 하는 아이 들이 없다· 아니 굳이 따지고 따지 면 있기는 있는데··· 기껏해야 네 다섯 명이다·
교실 하나에 마흔 명 가까이 학생 이 있는데 네다섯 명밖에 공부하는 사람이 없다고?
이게 정상인가?
원래 다들 목숨 걸고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던 거
같은데····
아니 그건 너무 ‘판타지’인가···?
이게 진짜 ‘현실’인 걸까?
딩一동〜
수업종이 울리고 1교시가 되었다·
풀레임은 이과였고 생명과학 수업 을 들었다· 키가 작은 탓에 그녀는 항상 맨 앞자리를 고수했는데 남학 생이 앞에 앉아 있으면 칠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39페이지를 펼치도록·”
생명과학 선생님은 인사나 농담도 없이 졸린 목소리로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던 그녀는 명 찰을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월고등학교 3-7반 풀레임]
‘응?’
학교 이름이 저게 맞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
그러나 선생님이 곧바로 수업에 들 어가는 바람에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수업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예상 대로 그것을 제대로 제대로 듣는 학 생은 거의 없었다· 몇몇은 벌써 맨 뒤에서 널브러져서 숙면을 취한다·
이제 저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들은 저들 인생이니까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된다·
“아오 저 새끼 재수 없는 거 봐·”
“또 지 혼자 모범생인 척 오지네·”
“이딴 꼴통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건지? 가서 뒤통수 한 대 빡 때리고 싶네·”
툭!
종이뭉치가 날아와 머리에 부딪혔 다· 풀레임은 표정을 찡그리고서 뒤 를 돌아보았다· 일진 여학생들이 맨 뒤에서 낄낄대고 있었다·
“야야 쟤 꼬라본다·”
“무서워 죽겠네
‘저 새끼들이···
순간 성깔이 나올 뻔했으나 수업시 간이라 참았다· 생명과학은 풀레임 의 약점이므로 제대로 들어야 한다·
딩一동〜
하지만 수업이 끝난 뒤에도 참는다 고는 안 했다·
뻐억!
쿠당탕!
“켁! 미 미친년!”
“이 씹새들아· 내가 수업 들을 때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기 기다려 풀레임! 의자로 사람 을 때렸다가는 진짜 죽어!”
“죽으라고 하는 건데?”
“얘 돌았나 봐!”
풀레임은 참지 않아요·
공부를 방해한 놈들은 더욱더·
“고등학교 일진? 야 너네 싸움 잘
해? 잘하냐고 개새끼들아·”
“너 너 진짜 그러다가 후회···
“한 번만 더 깝쳐봐 진짜 죽여 버 릴 거니까·”
애들 장난에 지레 겁먹을 나이는 지났다· 나중에 회사 다니고 나서부 터는 애새끼들 양아치 행세에 쫄았 던 게 어찌나 후회되던スI!
···회사?
내가 그런 걸 다녔었나?
멈칫·
의자를 휘두르던 풀레임이 잠시 주 춤하자 일진들은 그 기세를 타고 우
르르 몰려나갔다·
한초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녀가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대뜸 묻는다·
“생리하냐?”
“아니거든 미친년아·”
“오늘따라 너 존나 예민해·”
“어 몰라· 그냥 다 때려 부수고 싶 네·”
“그나저나 너 어쩌려고 그래? 쟤네 오빠들 불러오면····”
“오研득?”
기억났다· 우리 학교 일진들이 ‘오 빠들’이라 불리는 양아치 패거리에 게 보호받는단 사실을·
“···그러게?”
새삼 엿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지 만 어쨌든 오늘 하루는 많이 남았으 니 대책을 마련할 시간은 충분하다·
띵-동〜!
하교종이 울렸다·
,···어라?’
이렇게 갑자기?
풀레임은 황급히 한초연을 바라보 았다·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신
나게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잠깐··· 벌써 끝이야?”
“응? 뭐가?”
“방금까지 1교시였잖아·”
“아〜 아아! 그렇긴 해· 1교시에 엎 드려서 자고 일어나니까 벌써 집에 갈 시간〜! 너도 코노 갈래?”
”···아니·”
“흐음 하긴· 넌 노래 안 좋아하지· 아무튼 조심해서 집에 가· 진짜 그 럴 것 같지는 않지만 쟤들 아까 보 니까 개빡쳐 있던데?”
한초연은 일진들을 슥- 가리킨 다
음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에휴···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집 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려다 보니 명 찰이 눈에 띄었다·
[삼월고등학교 3-7반 풀레임]
“응···?”
아까부터 뭐지? 학교 이름이 원래 이랬나? 황급히 한초연을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요즘 진짜 예민한가····’
가방을 메고서 풀레임은 터덜터덜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가 잘못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약 5분 뒤였다·
“야· 이 새끼가 그 새끼냐?”
“네· 이 새끼가 그 새끼 맞아요·”
예상대로 일진들은 ‘오빠들’을 데 리고서 찾아왔다· 그들은 양아치 행 세에 아주 진심이었는지 패거리에 오토바이까지 싹 몰고 와서는 자신 들의 힘을 과시했다·
“푸하핫! 뭐 모범생이라면서 완전 빡대가리잖아? 혹시 뒷문으로 빠져 나갈까 봐 얘들 풀어놨는데 뭔 깡
으로 정문으로 나왔냐?”
풀레임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주 위를 둘러보았다·
양아치들과 눈을 마주친 선생님들 도 나 몰라라 황급히 도망치고 학 생들은 아예 이쪽으로 시선조차 두 지 않는다·
아무나 경찰 불러줄 사람이 없나 생각은 해봤지만 별로 의미는 없을 것 같다·
‘학창 생활 개조졌네·’
아예 골목으로 호출당한 풀레임은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빠져나갈 길목은 이미 양아치들이
쪼그려 앉아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 며 침을 찍찍 뱉는 중이었다·
‘공부해야 하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같은 반 일 진 여고생이 풀레임의 이마를 툭툭 쳤다·
“야· 한숨이 나와?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기분이 더러워져서 고개를 들어 노 려보니 찔끔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 일진·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되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게 진짜 죽을라고!”
보인다·
치켜드는 손바닥·
굵직하게 돋은 힘줄·
저 건방진 일진년은 나를 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자존심을 세웠다가는 진짜 ‘오빠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냥··· 맞아야겠다는 생각 에 풀레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았다·
‘뭐지?’
슬쩍 한쪽 눈을 떠서 일진을 바라
보니 그녀는 왠지 당황스러운 표정 으로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는 또 뭐야?”
“오 오빠들 패거리예요?”
“아니· 저 새끼 너네 학교 교복 입 었잖아· 아는 얼굴이냐?”
“아뇨· 처음 보는데···
무슨 대화지?
고개를 돌려 한쪽 골목 구석을 바 라보니 웬걸·
선글라스를 낀 채 무슨 삼류 영화 주인공이나 취할 법한 위풍당당한 포즈로 걸어오는 소년 한 명이 있었
다·
겉 외형은 열일곱 정도로 보였으나 명찰이 자신과 같은 것으로 보아 고 등학교 3학년으로 추정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백··· 유설···?
어쩐지 낯익은 이름·
그러나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 다·
“스탑· 넌 뭐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다가 오는 백유설을 가로막는 양아치들· 그는 선글라스를 아래로 슬쩍 내리
고서 곁눈질로 양아치들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러고선·
뻑! 뻐억! 퍽!
단 일격에 양아치 세 명을 모조리 눕혀 버렸다·
‘이게 뭔 2000년대 인소 남주도 아니고····’
분명 멋있는 장면은 멋있는 장면인 데 하나도 안 멋있다·
‘상황과 연출이 너무 작위적이잖 아!’
빠라밤 ~
90년대 고전 영화 특유의 구닥다 리 BGM이 흘러나오는 느낌마저 들 었다· 그러나 촌스럽든 어쨌든 백유 설이라는 소년이 나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틀림없었으므로··· 고맙 긴 고마웠다·
“야! 저 새끼 막아!”
“제가 맡겠습니다 형님!”
삼류 양아치들이 삼류 양아치 대사 를 외치며 백유설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았다·
백유설은 그 자그마한 체구로 무시 무시한 괴력을 발휘하였고 양아치들 은 골목 구석구석에 현대 예술처럼
장식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풀레임의 앞에 도 달한 백유설·
“이 새끼가····”
리더 양아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 러나자 백유설은 한달음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뜸 오토바이를 들어서 어깨 에 짊어졌다·
“응?,,
“어?”
,,엥?,,
상식적으로 오토바이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는 게 가능하던가? 애당초 저걸 갑자기 왜 드는 건데? 오토바 이로 사람 때리려고?
백유설의 이상한 만행은 거기서 끝 이 아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서는 또 그 특유의 느끼한 눈빛을 보이며 새하얀 이를 씨익 드러냈다·
“사실 이게 갖고 싶었지·”
그러더니 후다닥 그 자리에서 도망 쳐 버렸다·
«··
“···저 새끼 뭐냐?”
“모 모르겠습니다 형님···「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비현실 적인 상황에 양아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자리에 주 저앉아서 백유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틈이다!’
저들이 빈틈을 보인 사이 풀레임 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도주하였다·
[이월고등학교 3-7반 풀레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가방의 명찰 이 눈에 띈 것은 왜일까·
풀레임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 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