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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연정흡인지체(1)
내가 오렌하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 킨 건 본능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지는 오렌하의 몸을 받쳐서 소파에 눕힌 뒤 꽃서린을 돌 아보자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 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특성 [연정흡인지체]를 가진 자와 눈을 마주치면 그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 그 저주의 영향은 영영 돌이킬 수 없다·
즉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신 하를 오늘 이 자리에서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기절한 오렌하를 보며 꽃서린은 탄 식을 내뱉었다·
휘이이···!
들썩
그러다 오렌하가 입에 거품을 물
고서 몸을 들썩이며 자그마한 마나 의 소용돌이가 발생하자 그녀는 황 급히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을 오렌하의 머리에 대고서 초록 빛의 기운을 흘려보내니 어지럽게 뒤틀리고 있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 졌다·
벌떡!
그러다 상체가 스프링처럼 튕기며 꽃서린과 부딪힐 뻔한 바람에 백유 설이 급히 짓눌러서 저지하였다·
“어떤가요?”
“···좋지 않아요· 마나가 온통 뒤엉 켜 있어요· 이건 흡사····”
마력 폭주 라고 말하려던 꽃서린 은 뒷말을 아꼈다·
체내의 모든 마나가 제멋대로 방출 되어 폭탄처럼 터지는 마력 폭주 현 상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자존 심 상하는 일이자 최악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마력 폭주가 일어난 자는 모든 마 나를 잃어버리게 되어 다시는 마법 사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녀는 오렌하가 마법을 얼마나 사 랑하는지 잘 알았기에 어떻게든 막 아보려고 자신의 마나를 있는 힘껏 주입하였다·
‘돌겠네 진짜·’
꽃서린이 어떻게든 오렌하의 폭주 를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백유설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오렌하도 설정상 꽤 대단한 마법사 라고 했던가· 아마 정상적인 상황이 었다면 백유설이 휘두르는 손날 따 위에 기절할 정도로 나약한 마법사 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작에서 ‘꽃서린의 얼굴을 바라본 자 상사병을 앓다 시들어간다’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는 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이야기·
수준 높은 마법사일수록 그녀의 저 주를 더 오래 버텨낸다·
하지만 그저 상사병에 걸려 죽지만 않을 뿐 심성에 혼란이 오며 체내의 마나가 뒤틀리는 바람에 주변 사람 까지 휩쓸리는 마력 폭주 현상이 일 어날 가능성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오렌하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꽃서린과 몇 초 이상이나 눈을 마주 친 데다가 일전의 사건 때문에 심력 이 약해진 탓일까 스스로의 마나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기절시켜서 이 정도에 그쳤 지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당장 폭
발하여 이 일대의 건물이 전부 무너 져 내려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마나를 주입 하던 꽃서린은 심히 안타까운 얼굴 로 오렌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근처에 아무도 있지 말 라고 했거늘····”
어째서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고서 이런 사달이 나게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오렌하가 말을 듣지 않았건 어쨌건 결국 자신의 저주에 의해 발 생한 일이었기에 꽃서린의 가슴에 죄책감이 한 뭉텅이 내려앉았다·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하는 이 마 음의 짐을 대체 어찌하면 벗어 던질 수 있을까·
오렌하는 그나마 꽃서린의 마음에 안정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거 늘 오늘따라 갑작스레 돌변해 버린 그의 행동이 의문스럽고 또 원망스 럽기만 했다·
그저 평소처럼 보좌관이자 친구이 자 말벗으로서 함께 해주었으면 참 으로 좋았을 텐데·
-폐하! 괜찮으십니까!
접대실에서 마나의 마찰이 발생한 사실을 예민하게 눈치챈 친위기사들
이 바깥에서 소리쳤다·
꽃서린은 서둘러 가면을 쓴 뒤 스 스로에게 마력 제어를 걸어 저주를 최대한 억제하고서 답했다·
네· 급한 환자가 발생했으니 서둘 러들어와 주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며 친위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당황한 눈 을 하였다·
“이 이건····”
쓰러진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왕의 보좌관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 다· 오렌하의 몸이 들썩이거나 삐걱 거리며 불안정한 마나가 비집어 새
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친위기사들은 황급히 꽃서린을 뒤로 대피시켰다·
“폐하 우선 자리를 피하시지요· 보 좌관이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지금 곧바로 천령나무의 요 람으로 이송할 터인데 자칫하다가는 휩쓸릴 수 있으니 자리를 피해 계시 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자리를 옮길 틈이 없어요· 이 자리에서 즉시 조치해야 합니다· 또한 혹여나 폭주 현상이 발생하면 제가 직접 막겠어요·”
“하지만···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라임세릴 기사단장·”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의료 진을 불러오겠습니다·”
기사단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 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텔라의 마법사들과 전문의들이 찾아왔다·
거기에 더해 성자들까지 우르르 달 려와 기도문을 읊어대며 사방에 결 계를 두르기 시작하니 이 공간은 완 전히 밀실이 되었다·
충격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겠지만 무리다·
6클래스의 마법사인 오렌하가 마력 폭주를 일으키면··· 최소 7〜8클래
스 이상의 위력이 나올 테니 이따위 결계는 가뿐히 무너뜨릴 것이다·
세계수의 힘을 받지 못한 꽃서린의 힘은 현재 굉장히 취약해진 상태이 니 그녀에게 기댈 수도 없다·
“긴급 상황이라 스텔라의 교장 선 생님을 찾으러 갔습니다만 현재 행 방이 묘연합니다· 일전의 사건 이후 로 ‘남은 버러지를 처리한다’며 사라 진 뒤로 소식이 없다고 하여서····”
“··그런가요·”
설상가상 엘트먼 엘트윈조차 모습 을 감춰 버린 상태·
폐하· 마력의 폭주가 점점 더 거
칠어지고 있습니다!”
“크윽··· 어서 대피하십시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와중 나 는 오렌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작 게임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 다· 뛰어난 마법사가 꽃서린과 잘못 마주쳤다가 폭주하여 주변에 큰 피 해를 입히는 사건들·
솔직히 게임사에서는 그것도 이벤 트랍시고 준비했겠지만 게이머로서 는 짜증 나고 빡치기만 할 뿐이다·
귀찮게 엑스트라의 폭주까지 플레 이어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리하여 당시 엑스트라들의 폭주 현상에 시간 빼앗기는 게 싫었던 고 인물들은 꽃서린의 저주에 노출된 엑스트라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처 리하기에 이르렀다·
‘폭주하기 전에 죽입시다·’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잔인한 방법·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이기도 했다· 비록 미운 짓을 했다지만 오 렌하는 꽃서린의 총애를 받는 신하 였으니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할 터·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렌하 는 폭주하여 주변에 큰 피해를 입힌
뒤 결국 죽을 것이고 그것은 꽃서린 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폐하·”
백유설은 조심스레 급박한 표정의 꽃서린에게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마력의 폭주를 억제하며 동시에 흑 마인이 되지 못하도록 완전히 방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그건 그만이 알고 있는 방법이 아 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
는 방법이기도 했다·
“마력을 거세하면··· 살릴 수 있 습니다·”
마력을 폭주하여 죽어버리는 것보 다는 마력을 거세하여 목숨이라도 건지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그 말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의하였으나 감히 함부로 꺼낼 수 없던 말이기도 했다·
엘프왕 꽃서린이 가장 아끼던 신하 가 바로 오렌하였으니까·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곧 팔 다리와 같다· 마력을 거세한다는 건 사지를 모조리 절단하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일·
오늘 목숨을 건지더라도··· 아마 오렌하는 평생 제대로 된 일상을 보 낼 수 없으리라·
“···결정은 폐하께서 직접 해주 셔야 합니다·”
잠자코 기다리던 기사단장까지 한 마디를 거들자 꽃서린의 눈빛이 크 게 흔들렸다·
과연 나의 손으로 내가 가장 아끼 던 신하에게 장애를 안겨주어야만 하는가· 나로 인해 발생한 일이거늘 과연 그러는 게 옳은가·
혹여나··· 그가 나를 원망하지는 않
을까·
“으윽···
“다 단장님··· 죄송 저는 더 이 상 못 버티겠···커헉!”
하나둘씩 마력의 폭주를 제어하던 단원들이 쓰러져 나간다·
라임세릴 기사단장은 그나마 7클래 스의 마법사였기에 버텨낼 수 있었 으나 폭주를 완전히 잠재우는 것은 결코 불가능해 보였다·
자신이 아끼던 이들이 차례차례 쓰 러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꽃서린은 눈물을 머금고서 결국 결 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렌하의 마력을··· 거세해 주세 요·”
* * *
다음 날이 되었다·
스텔라 본관 내에서 자그마한 해프 닝이 벌어졌으나 귀빈들은 알지 못 한 채 각자 고향으로 떠나가고 있었 다· 유난히도 소란스럽고 사건 사고 가 많았던 학교 대항전이 끝난 뒤 잠잠해진 스텔라 아카데미·
젤리엘은 그런 스텔라 아카데미의
1 등급 병실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재활치료 때문에 당분간 움직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아서 강제로 휴가 를 받게 되었다·
퍽 아쉬운 학교 대항전이었다·
매직 서바이벌의 수상식에도 참여 하지 못하다니· 듣자 하니 그곳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벌어졌다고 들었는 데 직접 보지 못해서 안타깝다·
병실에 누운 채 젤리엘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상은 금세 치유되었다· 성국에서
직접 찾아온 최고 사제들이 신성 마 법을 마구 퍼부어댔으니 흉터가 남 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흉터는 진하게도 남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흑마인에게 습격당한 충격 때문은 아니다·
그저··· 죽음의 순간에 느꼈던 어 떤 ‘감정’ 때문이었다·
지적 생명체에게 감정이란 참으로 당연하게도 존재해온 것이었으나 어 째서인지 젤리엘에게는 그런 것들이 모두 낯설었다·
아버지마저 속일 정도로 그녀는 감
정을 연기하는 데에 익숙했지만 실 제로 감정을 느낀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밤하늘보다도 더욱 지독 하게 깊고 맑았던 백유설의 검은색 눈동자가· 마치 우주를 닮은 듯 반 짝이던 그 눈빛을 지은 채 그는 자 신을 구해주었다·
‘왜?’
가장 먼저 의문을 호수에 던져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 자그마한 물 결은 벽에 부딪혀 다시 되돌아와 또 다른 의문을 만든다·
‘백유설은 나를 증오하는 게 아니 었나?’
백유설은 나에 대해 잘 안다·
지독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력의 서약을 통 해 그런 끔찍한 조건을 내걸 리가 없지 않는가·
‘살아서··· 더 지독한 고통을 맛 보라는 건가?’
만약 그런 이유로 살렸다면 그는 자신보다 더 미쳐 있을 게 분명했다·
“아가씨· 딸기를 사왔습니다·”
병실의 문이 열리며 그녀의 보디가
드 성태원이 들어왔다·
딸기는 젤리엘이 유일하게 선호하 는 과일이었기에 이런 좋지 않은 일 이 있을 때마다 시키지 않았음에도 사 오고는 했다·
“고마워요·”
젤리엘은 얼굴에 가면을 썼다·
웃음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자신이 이렇게 웃어 보이면 아랫 것들은 좋아서 기뻐한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오늘은 딸기가 별 로 맞지 않으신가 보군요·”
“네? 아뇨 좋아요· 왜 그러시죠?”
“그··
성태원은 그녀의 눈치를 힐끗 살피 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 여서··· 그랬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더듬 었다· 어째서일까 ‘웃음’의 가면을 쓰는 데에 실패했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는데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젤리엘은 애써 무덤하게 말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알겠습니다·”
“제 짐은 모두 정리했나요?”
마력의 서약으로 인해 이제는 아버 지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젤리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한시가 급한 마당에 눈앞에 작은 장애물이 놓여 가로막혔다고 해서 멈춰 있을 시간 은 없었다·
‘아버지를 제대로 살린 뒤 미래에 웃으며 다시 보면 되는 거야·’
그때를 위해 지금의 감정은 꼭꼭
묻어두자·
“준비 다 됐으면 저희도 이만 돌아 가죠·”
“예· 전용기를 호출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성태원은 뒤돌아 병실을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아가씨의 개인실에 놓 여 있던 그 돌조각 있지 않습니까·”
“네? 그런 게 있던가요·”
잠시 생각해 보니 일전에 백유설 이 마력의 서약을 마친 뒤 선물이랍 시고 웬 돌조각 하나를 주고 떠나긴 했었다·
참으로 어이없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젤리엘에게 그 런 쓰레기를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 자체가 그녀를 무시하는 행위였으 니·
“갖다 버리세요·”
고민할 것도 없이 젤리엘은 그리 명령했으나··· 성태원은 곤란하다 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게··· 실은 아가씨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 동해서 스텔라의 고고학자에게 잠깐 보였습니다·”
“뭐라구요? 어떻게 제 물건을 감
히····”
아무리 쓰레기라지만 그건 상당히 도를 넘은 기분 나쁜 행위였기에 젤 리엘은 한마디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성태원이 서 둘러 말을 이었다·
“그 결과 아가씨께서도 아주 흥미 를 가질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돌조각이 무려 ‘고대 카르멘세트 비석’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네?”
그 순간·
젤리엘의 사고회로가 정지하였다·
“바 방금··· 뭐라고···
“틀림없습니다· 스텔라의 고고학자 도 놀라서 다른 고고학자 연구원을 데려와 특수 장비를 사용해 제대로 검사해 보았는데 분명히 카르멘세 트의 비석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카르멘세트·
그건··· 아버지를 살리기 우】해 젤리엘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게 갑자기 여기서 나타난 다고? 그것도 백유설에 의해?
“아····”
다리에 힘이 풀린 젤리엘은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병실 의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에게는··· 아주 조금 더 생 각할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