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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혼의 보주(4)
엘트먼은 꽃서린을 배려하여 특별 한 접대실을 준비해 주었다· 햇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으며 공간 차단막 이 생성되어 있어서 저주가 흘러 나 갈 염려도 없다·
바로 옆방에 호위와 최측근들을 대 기시켜 놓은 뒤 그녀는 백유설과 함
께 접대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하고 따사로운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꽃 서린은 백유설을 바로 앞에 앉혀놓 은 채 무슨 말로 첫마디를 꺼내야 만 할지를 고민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인간 소년이 엘프왕을 면전에 두고서 먼저 입을 열리는 없으니 자신이 주도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소년은 부담도 없는 것 일까
“커피 드십니까? 아니면 녹차?”
자신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간이 커피포트를 만지작대며 진지하게 커 피에다가 슈가를 넣은 뒤 샷을 추가 할지 그 반대의 순서로 할지를 고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 가 없어졌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냥 조 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을 뿐·
“저는··· 녹차로 할게요·”
“안 돼요· 이미 커피 두 잔 탔는 데·”
“···그럼 커피 두세요·”
“참고로 아이스커피입니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차 가운 커피였기에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 타준 것을 거부할 정도로 냉랭 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여 기요·”
꽃서린이 냉커피를 받고서 잔을 만 지작대기만 하자 백유설은 피식 웃 었다·
그녀가 아이스커피를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원작 게임에서도 그녀의 흥미를 이 끌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 중 하
나였다·
보통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상 대방이 좋아하는 물건을 선물함으로 써 호감도를 올린다·
하지만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은 참 특이하게도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의 반대되는 행위를 한 뒤 다음에 더 좋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몇 배의 호감도를 쌓을 수가 있었다·
백유설이 딱히 꽃서린의 호감도를 쌓아서 연애를 해보겠다는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마음을 열고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이스커피를 홀짝대는 백유설을 힐끗힐끗 훔쳐보던 꽃서린은 그에게 서 묘하게 익숙한 냄새가 풍겨온다 는 것을 느꼈다·
신령 잎하넬의 기운?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신의 품에서 저와 똑같은 저주의 냄새가 나요·”
“예· 맞을 겁니다·”
그렇다·
지금껏 꽃서린이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숨어 살아가야만 했던 이 지
옥 같은 ‘저주의 향기’가 백유설에 게도 풍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백유설은 멀쩡히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반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는 일이 없지 않던 가·
“당신은··· 그 저주를 극복하신 건가요?”
그 질문을 받고서 백유설은 자신 의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본인이 연홍춘삼월에게 축복을 받 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나 본데·’
꽃서린과 관련된 이야기는 직박구
리 안경에도 많은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스스로 추리를 해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꽃서린의 기억 속에 연홍춘삼월에 대한 존재 가 없다는 것·
“음 뭐· 극복했다면 한 걸까요····”
“저···정말인가요? 대체 어떻게··· 제발 저에게도 가르쳐주세요!”
달달 떨리는 손을 꽉 마주 잡고서 조심스레 부탁해 오는 그녀의 모습 은 굉장히 다급하고 처량해 보였으 나 사실 백유설도 스스로 저주를 극복한 건 아니지 않던가·
애당초 꽃서린에게 축복이 부여될
당시의 연홍춘삼월은 힘이 너무나도 막강했던 탓에 조절에 실패했을 것 이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과한 힘을 부여 받아 꽃서린에게 저주와도 같은 매 혹의 능력이 생겨버린 것이고·
하지만 백유설이 축복을 받을 땐 이미 연홍춘삼월이 약해질 대로 약 해진 상태였기에 매혹의 힘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저 정신적으로 튼튼해지고 상대 방의 심리를 간파하는 능력을 일부 획득했을 뿐·
“뭐 방법이 있기는 있죠·”
“···정말인가요?”
사실 잘은 모른다·
다만 연홍춘삼월의 가호를 이용하 여 저주를 상쇄하는 게 가능하다고 알고 있을 뿐·
직박구리 안경에도 그런 식으로 애 매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무슨 방법을 쓰는지는 알 수 없었 다·
아마 원작 게임에서도 저주를 해결 하는 장면이 대부분 스킵되었던 모 양·
그럼에도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확 신이 섰기 때문이다·
백유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연홍춘 삼월의 가호를 잘만 써먹으면 어떻 게든 저주를 없앨 수 있다는 확신·
꽃서린은 원작 게임에서도 비중이 거의 없는 엑스트라였지만 완전한 선(善)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능력 치 또한 대단하여 저대로 두기에는 상당히 아까웠다·
원작 게임처럼 풀레임이 그녀를 구 원해 주리란 보장도 없으니 직접 뭐든 해결해 보려고 달려드는 수밖 에·
일개 평범한 학생이 엘프왕을 독대 할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러니 간
신히 잡은 이 자리에서 파격적으로 진도를 팍팍 빼놔야만 한다·
“일단 실례가 아니라면 그 가면··· 벗어주실 수 있나요?”
“그 건···
꽃서린은 주저하는 듯했지만 이미 둘 다 알고 있다·
백유설에게는 그녀의 저주가 전혀 통하지 않는단 것을·
—ロ ·
일전에 맨얼굴로 마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꽃서린은 천천히 얼굴께를 매만졌다· 면사포에 더불어 마법으 로 보호되는 가면에 마스크까지·
한여름철에는 더워서 어떻게 저러 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두터운 여러 겹의 가면을 모두 벗어 던지니 가 장 먼저 빙백산맥의 눈꽃을 닮은 새 하얀 머리카락이 목선을 타고 쏟아 져 내렸다·
마치 우유를 쏟은 줄 착각할 정도 로 새하얀 백색의 머리칼·
북극성을 닮은 금색의 눈동자는 스 스로 광채를 띠고 있었는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히 지적 생명체가 받아들이기에는 도를 지나치게 넘어버린 아름다움·
그러나 [연정흡인지체]라는 저주에 걸려버려 세상 뒤편에 꼭꼭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얼굴·
백유설은 그것을 맞이한 채 숨이 멎은 듯 잠자코 있었다·
“···아 역시 저주가 아직····”
그런 백유설의 모습을 보고선 저 주의 영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 다고 생각하여 꽃서린이 다급히 가 면을 찾았으나 그가 손을 들어서 저 지하였다·
“아뇨 저주는 괜찮은 것 같아요·”
“···정말인가요?”
조심스레 물어오는 모습조차 아름 다웠다·
“예· 진짜로·”
저주의 영향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저주고 뭐고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블랙홀 같은 매 력을 가진 얼굴이라서 문제였다·
저 얼굴에 연정흡인지체까지 달려 있으니 원작 게임에서도 ‘대량학살 이 가능한 개사기 특성’으로서 S랭 크에 분류되었겠지·
그저 얼굴을 공개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죄다 상사병 으로 줄줄이 죽어나갈 테니까·
게다가 더 두려운 건 저 모습이 아직 ‘중성체’의 상태라는 것이다·
중성체의 엘프는 어깨 가슴 허리 골반 등에서 성별적인 특징이 뚜렷 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아직 성적인 매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저 정도인데 만약 나중에 원작 게임 따라서 꽃서린이 풀레임에게 홀딱 반하여 남자로 변 하기라도 하면····
좀 두렵다·
평범한 남자조차 남자에게 반해버 리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제 예상대로입니다·”
뜬금없는 백유설의 말에 꽃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모든 상 황을 예상하고 있던 척 진지한 표정 으로 말했다·
“저는 일전에 신수의 공간으로 들 어가 십이신월 연홍춘삼월을 만났 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 가호를 직 접 부여받았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왕께서도 저와 똑같은 가 호의 기운이 풍겨와요· 그건··· 폐 하도 연홍춘삼월의 가호를 이미 받 았다는 뜻이겠죠·”
“···네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 을 보이는 꽃서린을 보고 있자니 참 마음이 아팠다· 의외로 저주의 해결 법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을지 도 모르는데·
“방법은 간단해요· 폐하께서 받은 가호를 연홍춘삼월이 회수하거 나··· 혹은 그게 불가능할 경우 이 미 가호를 받은 저에게 나누는 거 죠·”
“···그렇군요· 당신은 이미 이 저주 를 극복하는 법을 알아냈으니까요·”
그거 아닌데·
하지만 그는 맞는 척 깍지를 끼고
서 말없이 턱을 괴었다·
있어 보이니까·
“〇 으··”
—ロ ・
꽃서린의 손끝이 살짝씩 떨렸고 눈 빛이 크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건 희망을 찾은 눈빛이었다·
여기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꽃서린 의 심장은 지금쯤 쿵쿵대며 거칠게 뛰고 있지 않을까·
만약 눈앞의 저 소년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는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서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새벽녘에 몰래 숲길을 거니는 것으 로 답답함을 해소해야만 했던 지난 날의 밤을 겪지 않아도 좋다·
당당하게 도시의 한복판을 거닐며 자유로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눈빛으로 진심을 교환하며 모두에 게 당당히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서··· 이 저주를 해소하고 싶 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뭣하면 지금 바로 가도 상관은 없는데요·”
“아뇨· 그건 안 돼요·”
“···예?”
설마 여기서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백유설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너무 제 개인적인 욕심만을 채우는 길이 될 테니까요· 저는 이 자리에 그런 이유만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제대로 사과하고··· 만약 시간이 된다면 제 오랜 친우에 대해 이야기 를 나누고 싶었어요·”
“아·”
하긴·
대뜸 저주를 물어보려고 자리를 만 든 건 아닐 테니까·
그런 점에서 참으로 대단하다·
몇백 년은 앓고 살아왔을 저 지옥 같은 저주를 당장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 텐데도 선후관계를 철저히 지 키려는 저 모습은 일종의 강박증처 럼 보이기까지 했다·
만약 백유설이었다면 다른 일은 죄 다 때려치우고 당장 저주를 해소하 겠답시고 달려나갔을지도 모른다·
꽃서린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급할 건 없다·
어차피··· 눈앞에 자신과 똑같은 저주를 앓았음에도 그것을 극복해
낸 산증인이 있지 않은가·
이 저주를 벗어낼 방법을 가진 소 년이 눈앞에 있는데 서둘러서 무얼 하랴·
틀림없이 나중에 가서 소중히 여기 지 못했던 지금의 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서 천 천히 그와의 티타임을 즐기자·
···아이스커피는 여전히 싫지만·
백유설과 함께라면 그럭저럭 맛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 * *
접대실의 바로 옆방은 일종의 대기 실로서 주인님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수하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쓰이고는 했다·
마찬가지로 꽃서린이 접대실에 들 어가 있으니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최고의 마법 기사들이 대기실에 서 서 철저하게 주변을 경계할 예정이 었다·
하지만 꽃서린은 그들을 모두 돌려 보냈다·
안쪽에서 가면을 벗는 와중 저주
가 바깥으로 새어 나와 그들에게 영 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그런 이유로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 어야만 했으나·
단한명·
오렌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꽃서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툭 툭·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치며 시간을 세어본다·
꽤 많은 시간이 홀렀음에도 저들은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퍽 질투 나고 답답했으나 인내하였다·
엘프왕이 난데없이 10대의 어린 소년에게 반해버린다는 말도 안 되 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 테니까·
폐하께서는 명령했다·
‘돌아가라’라고·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여자가 돌아가란다고 해서 정말로 돌아가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지금껏 위장용으로 몇 번의 연애를 거쳐왔던 오렌하였기에 연애에 관해 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백유설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끝마 친 꽃서린이 바깥으로 나오면 그때 제대로 사죄하여 앞으로 어떻게 일 정을 소화해 낼지에 대해 계획을 브 리핑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유능함을 또다시 증명해 내고 그녀가 나를 믿고 맡 길 수 있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꽃서린은 그 ‘저주’ 때문에 바깥에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도 못 하는 몸이다·
펴]하· 당신은···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결국 그녀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오렌하는 철저하게 인고의 시간을 감내했고·
마침내 저녁이 되어 해가 완전히 떨어져 내렸을 무렵·
달칵!
문이 열리며 그들이 걸어 나왔다·
“폐하!”
오렌하는 왕을 맞이하기 위해 환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러다·
일어나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라?’
자신의 여왕께서··· 가면을 벗고 계 셨다·
꿈속에서만 나오던 익숙하지만 그 티웠던 저 아름다운 얼굴· 그녀는 소년을 향해 환히 미소짓다가 자신 을 보고선 표정이 굳어버렸다·
‘왜?’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꽃서린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의문이 스
멀스멀 피어났으니까·
‘왜 폐하께서는 나에게도 보여주시 지 않았던 맨얼굴을 일개 인간 따 위에게 내어주었는가·’
그 질투심이 머리를 한가득 채웠을 무렵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폐흐下 어째서····”
어째서 그따위 인간에게 나에게도 보여주시지 않았던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와 애정 어린 눈빛을 모두 내어 주셨습니까·
그 모든 질문을 담아 손을 내뻗으 려는데·
“···가까이 오지 마세요·”
꽃서린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뒷걸 음질 치며 말했다·
“아··丁
그에 충격받은 오렌하가 잠시 걸음 을 멈춘 그 순간·
퍽!
세상이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무너 져 내렸다·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여 간다·
더 이상····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