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37· 영혼의 보주(3)
영혼의 보주·
먼 과거 천사들이 내려주었다고 알 려져 있으며 하이엘프 장로급이 아 닌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이 물건은 소유자의 혼백이 얼마나 탁한지 얼 마나 맑은지를 알려주는 세상에 하 나뿐인 보물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보주 는 탁한 색으로 물들고 선행을 하 면 할수록 보주는 밝게 빛난다·
살인자의 영혼은 짙은 회색을 띠었 으며 흑마인과 신령살해자는 거기서 더욱 짙은 검정을 띄게 된다·
흑마인이자 신령살해자인 백유설의 영혼은 틀림없이 검은색으로 빛나야 만 정상이었다·
“이 게··· 어떻게····”
그런데·
왜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을 띠 고 있느냐는 말이다· 성자조차도 저 런 색은 가질 수 없다· 오로지 천사
와 신령처럼 고결한 영혼을 지닌 존 재만이 저런 완벽한 백색을 가질 수 있을 터·
‘인간이 저런 색을 내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심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저것은 마법적인 속임수가 아니라 정말로 영혼의 보주에서 나오는 빛 이었으니까·
“아··· 저번에 선물로 주시길래 받았는데 이게 영혼의 보주였군요?”
백유설이 무덤덤하게 펜던트를 흔 들며 말하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 작했다· 영혼의 보주를 정식으로 넘
겨준 것도 아니고 선물로 위장하여 넘겼다니?
당장 모함이라며 소리치고 싶었으 나 그럴 수 없었다· ’마력의 서약’ 을 언급하는 순간 곧바로 진실이 들 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매지션 협약에 의해 마력의 서약 서는 결코 강요할 수 없다· 설령 상대방이 살인자라 할지라도 말이 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나라는 존재 는 생명과도 같았기에 함부로 마력 의 서약을 강요했다가는 마법사 협
회 전체가 들고일어나서 제지할 것 이다·
하지만··· 오렌하는 현재 금기 중 하나를 범한 상태였다·
‘결코 증거 없이 마법사를 흑마인 으로 몰아가지 말 것·’
지구에는 한때 평범한 여인을 마녀 로 몰아 불태웠던 역사가 있다·
그와 비슷한 사건으로 아이테르 월 드에서도 멀쩡한 마법사들을 싸잡아 서 흑마인으로 몰아가 모조리 학살 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란 스러워ス1자 결국 협회는 증거 없이
결코 마법사를 흑마인으로 몰아가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금기는 거의 사라 지다시피 했지만 어찌 되었든 멀쩡 한 마법사를 흑마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상대방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런 공식적 인 자리에서··· 무려 엘프왕의 보 좌관이 그런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 다·
금기를 저지른 대가로 당장 ‘마력 의 서약’을 강요당할 수도 있으니 거짓을 말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
그저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고개 를 떨어뜨리자 엘트먼 엘트윈은 그 제야 평안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보좌관· 자네가 지금 외교적 으로서도 마법사로서도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감은 잡히나?”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종족과 귀족 들이 오렌하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누구는 적대적이었고 누 구는 안타깝다는 눈빛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진 모 르겠으나···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 에서 찬사를 받아야만 했던 생도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했던 점 결코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スト 잠깐···!”
원래는 여기서 자신이 ‘갑’이 되었 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을,이 되어버리다니· 뭔가가 단단히 잘못됐다·
‘이럴 리가 없잖아!’
인간이 저토록이나 맑은 영혼을 띠 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인간이 마치 신령과도 똑같은 맑은 기운을 품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속임수····”
당장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어서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으나 그건 그저 또 다른 말실수가 되었다·
“허 참· 자네는··· 하이엘프가 가 진 가장 소중하고 대단한 보물의 명 예마저도 스스로 실추시키려고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속임수라는 말은 무엇으로 증명 할 셈이지? 영혼의 보주를 속이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영혼의 보주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한낱 흑마인 의 트릭에 속았다면··· 그건 그거대
로 문제가 된다·
‘내가 무슨 짓을···
말실수는 말실수를 낳았고 그것은 빙글빙글 돌고돌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오렌하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머리가 화끈해졌으나 뇌기능이 정 지라도 된 듯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하는 멍청한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무겁다 사람들의 시선이
눈빛 하나하나가 그의 심장과 숨통
을 옥죄어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을까·
일부러 타이밍 맞춰 백유설이 상을 수여받는 순간에 당당하게도 흑마인 이라고 지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니·
평생을 남들의 위에서 군림해왔던 오렌하였기에 웃음거리가 된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치욕스럽고 절망스 러워서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어버리 고 싶을 정도였다·
“···잠깐만요·”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좌중의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이 상황에 난데없이 발언을 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마치··· 자석처럼·
목소리가 들린 그 순간 강제로 그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듯 본능 이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구도 오렌하를 바라보 지 않게 되었다·
엘프왕 꽃서린·
온몸을 흑색의 천으로 감싼 채 세 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그녀가 정말로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또각-!
수만 명의 관중이 모여 있었음에 도 그녀의 구두굽 소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울렸다·
살색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드 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1초라도 더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모두가 숨죽 여 침묵한 것이다·
꽃서린은 자신의 모습을 감춰주던 결계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 백유 설의 앞으로 걸어가 마주 섰다·
“말 한마디로 갚을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보좌관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왕은 쉽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 다· 그렇기에 꽃서린은 기품과 권위 를 갖춘 채 사과를 전했다·
그러나··· 한 종족의 왕이 직접 사 과의 말을 꺼냈다는 그 행위 자체가 문제였기에 오렌하의 안색이 창백하 게 물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실감 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왕께서 한낱 인간 평 민에게 직접 사과하셨다·’
그건 그에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
와 입을 쩌억 벌린 채 붕어처럼 끔 뻑거리며 숨조차 내뱉지 못했다·
엘트먼 엘트윈 역시 꽃서린이 직접 사과할 줄은 몰랐기에 살짝 놀란 표 정을 지었다·
미지의 저주 때문에 쉽사리 이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녀를 잘 알았기에 직접 나서기 위 해 얼마나 큰 결심을 했을지도 짐작 할 수 있었다·
“···엘프왕께서 직접 사과하실 정 도의 일은 아니었으나 스텔라는 그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네· 부디 노여움을 풀었으면 좋겠
군요·”
왕이 직접 나서는 건 상황이 상당 히 묘하게 흘러갈 수도 있지만 현 재 발생한 마찰을 잠재울 가장 확실 한 방법이었다·
자칫하다간 인간과 엘프의 외교 문 제로 번질 수도 있었는데 꽃서린이 명확하게 끊어낸 것이다·
‘거 참···
백유설 또한 묘한 눈으로 꽃서린을 바라보았다· 설정상 거의 방구석 히 키코모리로서 바깥에 나와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저렇게 직접 나설 줄이야·
오렌하를 제대로 짓밟을 생각까지 하고는 있었으나 이제는 다 상관없 어졌다· 애당초 꽃서린이 직접 사과 하는 행위 자체가 오렌하에게 제일 치명타로 다가올 테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오렌하는 꽃서 린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이건 백유 설에게 있어서 꽤 큰 수확이었다·
꽃서린도 원작 게임에서 배드 엔딩 루트를 자주 타는 인물이었는데 대 부분의 원인이 오렌하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오렌하를 그녀의 곁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면 불행 루트를 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영광스러운 시상식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정말 다사다난한 대 회였다· 학교 대항전 시상식은 이것 으로 끝마칠 테니 모두 남은 축제 를 즐겨줬으면 좋겠군·”
엘트먼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여 정리하였고 그의 눈짓을 받은 사회 자가 빠르게 마이크를 넘겨받아 말 을 이었다·
-그럼 다음 순서로는 스텔라 아일 락 공연단의 매지컬 폭죽쇼가 있겠 습니다· 관중 여러분께서는···!
시상식이 종료됨과 동시에 불투명
한 공간 차단막이 형성되며 외부와 시상대가 단절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꽃서린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 지 좌석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렌하는 사과하기 위해 꽃서린에 게 다가갔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 지 않고서 말했다·
오렌하·”
“예 폐하·”
“제게 있어서··· 신령살해자가 어 떤 의미인지 잘 아실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군요···「
애당초 백유설과 단둘이 조용히 대 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 었다· 그런데 오렌하는 그 모든 말 을 무시한 채 모든 종족이 모인 자 리에서 엘프의 얼굴에 먹칠하였다·
꽃서린은 오렌하를 믿는다·
아니 믿었었다·
그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관 대하게 용서하여 넘어가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자신의 가슴에 가장 큰 상처로 남 아 있는 신령살해자를 이용하여 제 멋대로 행동한 것도 모자라··· 잎 하넬을 살린 은인일지도 모르는 백 유설이라는 학생을 공식적인 자리에 서 묻어버리려고 했으니까·
“폐하 그게 사실은···广
엘프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변명하려고 했으나·
“그만 그만하세요· 더 이상··· 변 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먼저 돌아 가서 쉬도록 하세요·”
그런 다음 그녀는 엘트먼에게 부 탁했다·
“아까는 배려해 줘서 정말 고마워 요· 실례라는 건 알지만··· 혹시 백유설 생도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 도 될까요?”
“나는 상관없는데 본인 의사를 물 어보도록 해·”
상을 수여받은 다른 선수들이 돌아 가고 있는 와중에도 눈치를 보느라 멀뚱멀뚱 서 있던 백유설은 자신에
게 화살표가 돌아오자 눈을 동그랗 게 떴다·
꽃서린은 그런 그에게 힘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 * *
•••꽃서린은 백유설과 단독으로 대화 를 나누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갔다· 왕께서는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 했으나 오렌하는 스텔라에 체류하여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젠장···
귀빈 대기실·
아무도 없는 널딸나 방의 구석에 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 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실수는 없다·
추리도 계산도 증거도 완벽했다·
그런데····
어째서 백유설의 영혼에게서 그렇 게나 밝은 빛이 터져 나왔는가·
‘속임수야!’
증거는 없지만 확신했다·
그는 신령살해자이자 흑마인이 틀 림없는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기술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폐하께서는 그것도 모르시고···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던 폐하가 야속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고작 한 번의 실수를 했다고 그렇 게나 냉랭하게 대할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백유설을 바라보던 꽃서린 의 눈빛이 묘하게 따뜻해서··· 기 분이 더러웠다· 오늘 처음 만나는 게 틀림없을 더러운 인간 놈에게 그 런 눈빛을 보일 건 또 뭐란 말인가·
‘백유설···
분명히 뭔가 더럽고 추잡한 수를 써서 순진한 꽃서린 폐하를 꾀어놓 았을 것이다·
‘내가 구해드려야만 해·’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잊히질 않 는다· 가장 위대하고 고고한 하이엘 프의 귀족인 나를 감히 경멸스럽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역겨운 눈빛들을·
그리고 꽃서린의 냉랭한 눈빛을·
‘모두··· 되돌려야 해·’
그녀의 신임을 되찾아야만 한다·
‘어떻게?’
나는 엘리트다·
여태껏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왔고 단 한 번의 실패조차 허용하 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 실패를 겪었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원숭이도 나무 에서 떨어진다고 했던가 가끔은 이 런 날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백
유설밖에 없었다·
오렌하가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추 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그를 죽인다는 멍청한 선택지를 떠 올리지는 않았다·
더 지능적으로 교활하게·
백유설의 진실된 정체를 밝혀내 추 락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자신이 받았던 모든 불명예가 회복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과 함께 처음부 터 이 일을 계획했던 소녀를 떠올린 오렌하는 눈빛을 번뜩였다·
‘젤리엘· 그 여자를 만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