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7화
287. 여파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길래 그러십니까?”
-27.8% 나왔습니다! 또 올랐어요!
어제 9화가 방영된 날은 유진이가 실시간으로 ‘만신 월아’의 정체를 드러냈기에 시청률이 폭등할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오늘 10화에선 시청률이 2% 정도는 빠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제만큼의 충격적인 이슈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10화에 무려 29.1%?
순간 장문기 기자의 기사에 적힌 ‘가슴이 웅장해진다’는 표현이 단번에 와 닿았다.
김성운 PD와 서로 덕담을 하던 중 누군가 김성운 PD를 급히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대표님이 바로 올라오라고 하시네요. 나중에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예. PD님.”
김성운 PD와 전화를 끊고 난 뒤 유진이에게 시청률을 알렸다.
“진짜요? 진짜 29.1%라고요?”
유진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덩달아 미소 또한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날 올려본다.
“삼촌 진짜로 엄마 최고 맞아요?”
“어. 지금 엄마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
미소가 환호를 지르며 엄마를 꼭 끌어안는다.
“우와~ 엄마. 최고!”
“고마워~”
두 사람이 그렇게 환호하는 사이 기사들이 속보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알고 봐도 놀라운 변신 정유진의 두 가지 페르소나.]
[속보! <신의 이름으로>의 시청률 10화 29.1%!]
[정유진! 신이 내린 연기력!]
[연기 천재 정유진!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내 마음도 들었다 놨다!]
보통 시청률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기사로 나온다.
하지만 어제부터 이어진 유진이에 관한 관심 덕에 연예부 기자들은 유진이에 관한 소식을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쏟아내는 중이었다.
유진이의 기사를 체크한 나는 이번엔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유진이가 일으킨 변화 때문에 사라진 일정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런데 일본 쪽과 관련된 일정들이 줄을 이어 삭제되어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24일]
-PM 03: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일본 협력사 파트너 (AMOSE 히로시 대표) 환영 행사. 지하 소강당.)
현재 강지영 본부장이 일본 쪽의 파트너 아리스 프로덕션을 AMOSE란 회사로 교체하기 직전이라 들었다.
‘그래서 사라진 건가?’
회귀 전과 비교해 파트너 교체의 시기가 한참이나 빨라졌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강지영 본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축하해요 정 팀장님. 시청률 대박이라면서요? 유진 씨한테도 축하한다고 이야기 좀 전해 주세요.
오상종 작가에게 당한 피해자를 만나고 회사로 돌아오니 갑자기 파티라도 벌어진 듯한 분위기여서 당황했단다.
하지만 시청률을 듣는 순간 그녀도 환호성을 내질렀단다.
올 연말에는 큰 상 하나는 타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무거웠다.
“본부장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그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일본 파트너 변경을 하려던 게 좀 꼬였어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급히 되물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끝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랬었죠. 그런데 현 파트너인 아리스 프로덕션이 갑작스레 엄청나게 좋은 조건을 제안해 왔대요. 아빠도 막 연락을 받았는데 도저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동안 굴렁쇠 엔터는 일본 쪽 파트너 측과 상당히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맺고 있었다.
무려 일본 내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8 대 2로 나누는 조건이다.
저쪽이 8 우리가 2.
일은 우리가 다 하고 저쪽은 기존 유통망을 이용해 수익의 대부분을 먹었다.
그래서 AMOSE라는 새 파트너사를 잡으려 강지영 본부장이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뛴 거였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 조건이 5 대 5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정 팀장님 덕에 우리 굴렁쇠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올랐잖아요. 그래서 아리스 프로덕션에서 새 제의를 해 온 거래요. 이 속도라면 한국에서 굴렁쇠가 1위 엔터 업체가 될 것 같다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이루어낸 일들이 강지영 본부장의 일을 방해한 셈이 되었다니.
강지영 본부장 성격에 절대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러는 걸 보면 이미 윗선에서 모든 걸 결정하고 통보해 온 거겠지.
“이번 일. 혹시 일본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 왔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 김동수 실장이 일본에 가서 계약을 따왔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쵸? 김 실장이 일본에 간 게 몇 달 전인데 갑자기 이런 제의를 해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내가 회귀한 이후 실패의 연속이었던 김동수다.
이제 배우 3실은 유명무실하다는 소리까지 나돌 정돈데 이런 큰일을 아무도 모르게 진척시켰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알기로 이 정도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다.
“최만식 대표가 손을 썼을 겁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의심하고 있어요.
최만식이 김동수의 이름을 판 이유는 분명했다.
서예종 라인이 무너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주겠다는 뜻일 거다.
어쩐지 내 다이어리에 있는 이 일정이 사라지지 않더라니······.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2년 11월 11일]
-PM 01:00 탑 엔터테인먼트 창업식.
‘김동수 질기기는 고래 심줄보다 더하네.’
서예종 라인이 기를 쓰고 김동수를 지키고 있기에 애당초 쉬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최성애를 찾아오면 그땐 절대로 지킬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의 강지영 본부장에게 말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휴우. 그래도 털어놓고 나니까 조금은 살 것 같네요. 대화 상대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본부장님.”
전화로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생긴 탓일까.
강지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조금은 더 밝아진다.
-하여간 일본 쪽은 놓쳤지만 대신 정 팀장님이 뚫은 중국 라인이 있으니까 크게 밀리진 않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로 강지영 본부장과의 통화를 끝냈다.
그때였다.
“오빠. 본부장님이 뭐래요? 나쁜 일이에요?”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와 미소는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내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얘들이 안다고 뭔가 좋은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걱정만 할 게 뻔하다.
그 탓에 난 적당히 둘러댔다.
“아냐. 일본 쪽 거래처에서 좋은 조건을 불러서 계약을 갱신했대.”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요? 그러면 저 일본 진출해요? 저 일본어는 오겡끼데스까 아리가또 밖에 못 하는데?”
미소가 곁에서 배를 내밀며 자랑스레 외친다.
“난 오이시~랑 곤니찌와!”
난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 정도면 많이 아네. 두 사람 다 곧바로 일본 진출해도 되겠는데?”
유진이는 지금부터라도 일본어를 공부해야 하냐고 진지하게 물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니. 한국 활동만 잘하면 돼.”
가수의 경우 음반 수익과 콘서트 수익에서 워낙 차이가 나기에 한번 뜨고 나면 한국 시장보다 일본 시장을 더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배우는 다르다.
사인회 같은 마케팅용 행사를 하느라 도쿄와 서울을 왕복하는 배우들이 많은 건 현실이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좋은 작품 하나 더 하는 게 훨씬 이익이니까.
결국 좋은 작품을 많이 찍으면 돈은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다.
난 헛기침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자러 가자고 말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바쁜 하루가 될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축하해. 10화에 29.1%! 진짜 수고했어.”
유진이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젓는다.
“에이~ 오빠가 1인 2역에 도전하자고 등을 밀어준 덕분이죠. 저야 뭐 하자는 대로 한 것뿐인데요?”
“그게 말이 쉽지.”
유진이가 혀를 살짝 내밀며 쑥스러워한다.
뒤이어 몰려드는 광고 문의와 프로그램 출연 문의 전화에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한 뒤 폰을 더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에게 벌어질 축제 같은 일들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회귀 전 혼자 힘으로 아시아가 배출한 최고의 배우란 평가까지 들었던 연기 천재가 바로 정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이에게 한국 최고의 매니저였던 내가 붙은 상황.
이번에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나조차 기대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배우 2실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만신 월아’의 정체를 밝히고 난 이후 이틀 동안 유진이에 관한 문의가 쏟아지며 전화기가 불이 나는 중이다.
“예~ 감독님. 영화 쪽도 할 생각인지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최 PD님. 지금 드라마 출연 제의가 방송 3사뿐만 아니라 케이블까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 PD님만 따로 배려해드립니까?”
“저 좀 살려주십시오. 양 AD님. 그게 그렇게 안 된다니까요?”
“2억이요? 지금 최저 기준 5억 이하로는 광고 접수가 안 됩니다!”
매니저들은 언제나 을의 위치에서 방송국과 광고주들에게 굽신거린다.
하지만 유진이의 인기 덕에 평소와는 달리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전화에 시달리는데도 기쁜 표정이 역력하다.
모두에게 수고가 많다고 인사를 하려는 순간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치켜든다.
다들 자기한테 와서 상대방의 요청(?)을 해결해달라는 눈빛이다.
그러나 구성철 실장이 내 앞에서 그 모든 눈빛을 가로막았다.
“따라와.”
구성철 실장은 2실 입구에서 날 붙잡은 뒤 곧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구성철 실장은 복도에 서서 돌아가는 사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현재 광고랑 프로그램 제안 영화 출연 제의가 끝도 없다. 일단 뒤처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넌 잡다한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6층으로 올라가 봐라.”
“6층이요?”
“그래. 6층 회의실. 지금 예뜨랑에서 손님들이 찾아왔어.”
내 폰은 밀려드는 전화 탓에 아예 꺼 놓은 상황.
그랬더니 예뜨랑의 안석훈 대표와 안명훈 홍보이사가 직접 회사로 찾아왔단다.
“어서. 가 보라니까?”
구성철 실장이 등을 떠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강감찬 대표가 직접 예뜨랑의 안석훈 대표와 안명훈 홍보이사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석훈 대표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어~ 정 팀장님!”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 곧장 본론을 말한다.
“이번에 또 하나의 브랜드를 런칭하려고 합니다.”
“벌써요?”
현재 시판 중인 미소 라인이 급격한 성장을 보이면서 충분한 자금이 들어왔단다.
그 덕에 차기 상품으로는 기존 제품보다 안티에이징 효과를 3배 정도 강력하게 만든 시제품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제품의 이름은 월아(月娥)라고 지었고.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도 유진 씨가 광고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유진이는 이미 미소 라인의 브랜드 광고를 하고 있는데요?”
“별도로 하나 더 하시죠. 1년에 5억을 추가로 내겠습니다.”
유진이의 광고비는 이미 1년에 3억으로 그중 2억 원어치는 예뜨랑의 주식으로 받았다.
현재 예뜨랑의 비상장주식 가격은 대략 3배 정도가 뛴 상황.
그런데도 신규 화장품 브랜드를 추가 광고하는 셈이니 별도 계약을 하자 말한다.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다.
강감찬 대표가 씨익 웃는다.
“어떻게 할래? 정 팀장.”
난 두말할 것 없이 외쳤다.
“무조건 해야죠!”
유진이의 몸값이 다시 한번 상승하는 순간이다.
* * *
8월 28일.
유진이의 일정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오늘 하루는 시간을 비워야 했다.
쓰촨성 지진에서 릴리를 구하기 위해 주영인과의 미팅을 잡고 왕룽과 릴리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현재 두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인천 공항에 와 있다.
오후 1시에 맞춰 소공동 LT 호텔의 한식당에서 주영인과의 약속을 잡아 놓은 난 현재 공항에서 왕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입국장 위의 시계는 10시 30분.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때였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더니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객이 먼저 나오기 시작했다.
왕룽이 먼저 나오고 그 뒤로 릴리가 따라 나온다.
릴리는 모델답게 키가 175cm 정도 되었는데 하얀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 여기!”
손을 흔들자 캐주얼한 복장을 입은 왕룽이 성큼성큼 걸어와 날 덥석 껴안았다.
“헤이. 부라더~”
“갑자기 웬 부라더야?”
“‘새로운 세상’이라는 한국 영화에서 보니까 이렇게 인사하던데?”
“도대체 언제 적 영화야?”
왕룽과 그렇게 반갑게 인사한 뒤 뒤따라온 릴리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릴리가 어색한 한국어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유노 오빠. 오빠 덕에 주영인 만나요!”
릴리는 마치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하. 그러면 바로 약속 장소로 가시죠. 시간이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릴리가 잠깐 기다려 달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얘가 어디 갔지······?”
그 순간 릴리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혹시 여동생분도 함께 왔습니까?”
그런데 방금까지 즐겁게 웃던 릴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네. 내 여동생 링링. 한국에서 아이돌 하고 싶다 말해요! 답답해요! 고집이 너무 쎄요!”
3년 뒤 중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 리더가 되는 전설적인 스타 링링이 함께 왔단다.
릴리에 이어 또 한 명의 운명이 바뀌려 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