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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이템 프레젠테이션(3)
공식적으로 백유설과 풀레임이 사 귀게 된 지도 어느덧 일주일·
금세 잠잠해질 줄 알았던 두 평민 의 연애 소식에 대한 이슈는 생각 외로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덕 분에 둘은 평소의 행실에 신경을 써 야만 했다·
그간 데이트(하는 척)를 위한 장소 를 고민해 보고 주변에 자문을 구해 보기도 했지만 사실 10대 커플의 데이트 장소로서 가장 좋은 곳은 ‘도서관’이었다·
스텔라 제4본탑의 도서관은 그 규 모부터가 어지간한 국립 도서관 저 리 가라 할 정도로 굉장했는데 실 제의 대마법사들이 작성한 마도서도 박제되어 있는지라 마법서 박물관처 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은 스텔라 아카데미의 메인이 되는 ‘마법 전투 학과’를 포함하여 연금술이나 경제 정치 실용마법 마법사회학과 등등의 수많은 학과의
학생들 모두 출입이 가능했고 참고 자료가 굉장히 풍부했기에 도서관은 매일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백유설과 풀레임은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도서관의 가장 구석 에 자리를 잡았으나 오고 가는 학 생들이 모두 힐끗거리며 몰래 쳐다 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만 들 릴 정도로 조곤조곤 속삭이며 대화 하고 있었는데 아주 우연히도 해원 량이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살짝 침울한 얼굴로 백유설을
향해 살포시 웃어 보이는 풀레임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백유설을 짝사랑했으며 그 로 인해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 정 도로 진심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의 존했으며 그에게 더 마음을 열어 주었다·
분명 알고는 있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가슴이 더욱 아 려왔다· 심장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 분마저도 들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하기에 저렇게나 해맑은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는 걸까·
‘아침부터 왜 그렇게 죽상이냐·’
‘뒷산에 묻고 싶은 개새끼가 한 놈 생겼어·’
‘조별과제냐?’
대체 얼마나 좋으면 저토록 풋풋하 고 사랑스럽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인간을 분리수거해도 되는 걸까?’
‘당연하지·’
‘진짜 한다?’
‘하던가· 잡혀가는 건 내가 아니야·’
···공교롭게도 상당히 떨어진 거 리에서 보고 있던지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해원량은 단단
히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물론 둘이 워낙 작은 목소리로 속 삭여서 다른 사람들 역시 풋풋한 새내기 커플의 스터디 데이트라고 생각한건 마찬가지였으므로 그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해원량은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 왔다· 새삼 질투라거나 열등감의 감 정이 들지는 않았다· 일전의 사건을 겪고 그의 정신력은 한층 더 성장하 였고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패배자 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쯤 가슴이 아리고 씁 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풀레 임과 가까이 지내면서 항상 그런 생 각이 들고는 했으니까·
‘언젠가는 나를 돌아 봐주지 않을 까·’
‘그래도 내게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친하게 지내다 보면 언젠 가는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헛된 희망은 결국 마음을 좀먹는 병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그러니 풀레임이 완전히 떠나버린 지금이라면···· 차라리 모든 미련 을 떨쳐 버릴 수 있지 않을까·
S클래스 전용 훈련장·
‘개인 마법 제어 실습장’
20평 남짓의 자그마한 이곳은 마 법을 자유자재로 시험해 볼 수 있는 스텔라의 최신식 실습장이었다·
해원량은 바닥에 앉아 무릎 위에 스태프를 올려두고서 심호흡을 하였 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 조막만 한 마나가 허공에 스며들었다·
3클래스의 마법사라고 믿기엔 어려 울 정도로 조금의 낭비도 없는 마나
제어력·
이내 그의 손이 허공을 가리키자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마법이 점점이 떠올랐다· 마나를 움직이는 기척조차 전혀 없을 정도로 조용하 고 세밀한 캐스팅이었다·
해원량은 무아지경으로 마법에 빠 져들었다· 흑마에 침식되었던 이전 에는 상실의 감정을 질투와 열등감 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불태웠 다·
하지만 현재의 해원량은 그 모든
감정들을 마법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조리 날려 버렸다·
마법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그 어 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원 소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데·
이만큼 흥분되는 일이 어디에 있다 는 말인가·
마나의 세계로 빠져들 때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게 되었다·
마법은 곧 삶의 의미였고 원동력 이었으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아프고 쓰린 감정을 잊기 위한 그 의 발악은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원 동력이 되어 해원량의 의식을 마나 의 바닷속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윽···!’
마나의 근원을 이루는 심장에 또 다른 마나의 실이 연결되는 기묘한 감각·
해원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낯설지는 않다· 일전에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적 있었으니까·
그건··· 4클래스로 향하는 ‘마나
의 길’이었다·
* * *
요 며칠 내가 굳이 도서관이 들락 거렸던 이유는 사실 별건 아니고 발 표 준비를 위함이었다·
‘아이템 프레젠테이션’
어차피 알테리샤 학파 측에서 훌륭 한 전문가들이 알아서 자문을 해주 겠지만 알테리샤는 굳이 거기서 한 번 더 내게 ‘어떤 거 같아?’라며 물 어왔다·
이런 거 하나하나 사소한 점까지 내 의견을 구하는 건 고마웠으나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은 몰랐다·
제아무리 직박구리 안경이라도 발 표 대본까지 작성해 주거나 수정해 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정말로 순수하게 내 경험을 토대로 움직여야만 했는데 전생이나 현생이나 발표 경험은 그 럭저럭 있었으나 솔직히 나는 내 발 표 능력이 훌륭하다고는 전혀 생각 하지 않았다·
다만 발표와 관련해서 유명한 인
물들을 몇 기억하고는 있었다· 그중 인상적인 사람이라면 ‘반쯤 먹은 사과’ 회사의 CE〇가 되겠다·
그의 발표는 화려하진 않지만 폭 발적인 임팩트가 있었으며 청중들의 흥미를 유도하여 친근하고 편하게 다가와 잊을 수 없도록 핵심을 쏙쏙 전달하고는 했다·
물론 이 발표 방식은 아이테르 월 드에서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 었다·
아이테르 월드에서 새로운 마법이 나 기술을 개발하면 굉장히 복잡하 고 휘황찬란한 마법진을 떡하니 띄 워놓고 온갖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발표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오히려 아이테르 월드에서는 무려 엘트먼 엘트윈이 시작한 것으로 알 려져 가장 정석적인 발표법이었다·
다만 연금술은 조금 다르다·
마법은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데에 비해 연금술과 마공학은 전혀 그러 질 못했고 무언가 설명하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니 차라리 기술력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혁 신적인 건スr 표현하는 게 더욱 좋 을 거라고 생각했다·
– 이런 식으로 발표했다가는 관계 자들이 꾸벅꾸벅 졸겠습니다!
– 따분하다고 돌아갈 수도 있겠군 요·
– 이건 아무리 봐도 잘못됐습니다·
물론 알테리샤 학회의 전문가들이 상당히 반발했지만 어쩌겠나·
– 나는 네 생각이 좋은 것 같아· 활 석코든 박사님께도 말씀드려볼게·
알테리샤는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 증해 주는데·
꼬우면 공동저자 하든가·
물론 이렇게 하자고 한 장본인인
내가 ‘그냥 심플하고 멋있게 하세 요’라고 대뜸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관계로 관련 서적 등을 찾아보 며 체계적으로 발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고 이제는 정말 발표날짜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연금성 : 골든 알케믹 쇼]
[알테리샤 학파 ‘아이템’ 전면 발표]
벌써 온갖 매체가 알테리샤의 발표 때문에 떠들썩하다·
지금은 내가 학교 내부에서만 생활 해서 체감이 와닿진 않았지만 원작 게임에서 알테리샤가 흑마인의 기술 력을 카피해서 신기술을 세상에 선 보였을 때 왕족과 대귀족 등의 온 갖 거물들이 참석했다는 것을 생각 하면 아마 반응이 굉장히 화끈할 것 이다·
기다리던 게임의 후속작이 나왔을 때 흥분해서 소리 지르던 게이머들 의 심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으··· 피곤해·”
정리를 대략 끝마친 뒤 기지개를 펴니 창밖이 어둡다· 어느덧 저녁이
깊은 것이다· 풀레임은 진작 돌려보 냈고 학생들도 공부를 끝마치고서 기숙사로 돌아갔는지 도서관이 휑하 니 비어 있었다·
새벽 02시 48분 도서관 사서도 꾸벅꾸벅 조는 시간· 기숙사로 돌아 가려던 나는 아직도 자리에 남아 있 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홍비연이네·’
그녀는 도서관 창문으로 새어 들어 오는 은은한 달빛과 쏙 빼닮은 머리 카락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고서 무 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었다·
자습 정도는 기숙사나 독서실에서
도 충분히 가능하다· 굳이 도서관에 와서 이 시간까지 공부를 한다는 건 전공서적으로도 커버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필요해서 그 렇다는 건데····
‘홍비연이 그럴 이유가 있나?’
내가 알기로 그녀는 오로지 학교 성적만을 위해 공부한다·
현실에서도 흔하진 않지만 저런 타 입이 가끔 보이긴 했다· 공부는 더 럽게 잘해서 명문대에 다니는데 상 식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멍청해 보 이느 딱 그런 타입·
그런 그녀가 도서관에서 날밤 깔
기세로 공부를 한다는 게 퍽 어색해 서 슬쩍 다가갔다·
“야·”
설마 누군가가 말을 걸 줄은 몰랐 는지 홍비연은 고양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서 헛 기침을 하였다·
“···뭐야 평민·”
“아니· 그냥 이 시간까지 공부하길 래 뭐 하나 싶어서·”
슬쩍 그녀가 작성하던 노트를 보
니 웬 복잡한 마법진이 여기저기 얽혀 있었고 그와 관련된 설명문이 뒤죽박죽으로 적혀 있었다·
전혀 정리도 되지 않았고 뭐가 목 적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본 즉시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아슬란 세미나 에피소드 중 아주 간혹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 았는데도 ‘악녀 홍비연’이 자멸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악녀 홍 비연’과 적대 관계로 알려진 ‘훙시 화 아돌레비트’가 플레이어와 우연
히 마주하게 될 경우 아주 낮은 확 률로 해당 에피소드가 발생한다고 들은 적이 있긴 있다·
위의 에피소드를 겪은 플레이어 입 장에서는 꽁으로 악역 하나를 치워 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의 홍비연은 악녀가 아니다·
나는 ‘악녀 홍비연 자멸 에피소드’ 를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직감적으 로 왜 그녀가 아슬란 세미나에서 자 멸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홍비연이 이 시간까지 엉터 리 논문을 부여잡고 있겠는가·
“그냥 논문 좀 정리하느라····”
그리 말하는 홍비연의 표정은 거의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여서 보는 입 장에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꼬여도 제대로 꼬 인 것 같다·
인생도 인간관계도 논문도·
전부 다·
“뭐 막히는 거 있냐? 도와줄까?”
그녀가 잘못되는 건 나도 사양이었 기에 그리 말했으나 홍비연은 내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머뭇거리더 니 시선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저었 다·
“···아니· 이건 내가 해결해야만 하 는 문제야· 고맙지만 사양할게·”
음·
그렇게 말하면 다짜고짜 도와주기 도 애매해진다· 도움이 필요 없다는 데도 내가 ‘야 이게 이건데 이렇게 고치면 돼’라고 조언하는 것도 좀 이상했으니까·
물론 돕고자 하면 알테리샤 때처 럼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격과 상황이 다
른 점도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알테리샤는 스스로 ‘연공난 수 교차 술식’을 풀이할 능력이 아 예 없었기에 억지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알테리샤는 아예 자 존심과 자존감 모두 바닥을 벅벅 기 는 바람에 누구에게라도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나는 그런 마음의 틈새에 끼어들어서 어떻게든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흥비연은 다르다·
그녀는 자존감은 낮더라도 자존심 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그런
와중에 내가 몇 마디 툭툭 내던진 조언이 여태 홍비연이 내놓은 성과 보다 훨씬 더 좋았다가는··· 멘탈 이 아예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골때리네 거참· 나중에 기회 적당 히 봐서 다시 찾아와야 하나·’
나는 그녀의 논문을 슬쩍 읽어보았 다· 홍비연은 그런 내 시선을 느꼈 는지 조용히 물어왔다·
“···왜 표정이 그래? 네가 봐도 별 로야?”
“어? 아니 그냥 좀···
솔직히 말해서·
직박구리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뭐라고 쓰인 건지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외계어인 줄 알았다고·
그렇다고 뒤늦게 안경 쓰고 꼼꼼히 읽어보는 것도 서로에게 뻘쭘해서 얼렁뚱땅 대답해서 넘겼다·
“뭔진 모르겠지만 되게 복잡한 것 같네· 이거 네 스타일 아니지 않나?”
“···이게 내 스타일이야·”
“그러냐· 몰랐네· 나는 네가 조금 더 화끈하고 막 어? 펑펑 터지는 그런 마법만 쓰는 줄 알았거든·”
“바보 같긴· 그런 화끈하고 펑펑 터지는 마법의 뒤에도 결국 복잡한
연산 과정과 수많은 마법진의 조합 이 얽히고···설켜서···
내 말이 우습다는 듯 무어라 말하 려던 홍비연은 순간 멈칫하더니 멍 한 눈으로 자신의 노트를 바라보았 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며 루비를 닮은 눈동자 를 깜빡였다·
···그러더니 대뜸·
쫘악! 화르륵!
자신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성하 던 노트를 찢어서 불태워 버렸다·
“무 뭔 미친 짓이야?”
내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나자 그
녀는 한층 속이 시원해진 듯한 표정 으로 말했다·
“고맙다 평민·”
“아니 뭐가요·”
하지만 홍비연은 대답하지 않고서 가방을 챙기더니 곧장 도서관을 뛰 쳐나갔다· 자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머리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는 한국 고등학 생들의 속설이 진짜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