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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태령신공(2)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꽃서린은 이내 정신을 차 렸다·
“잎하넬···!”
-으응 안녀엉····
훌렁·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저 목소리를 도대체 얼마 만에 듣는 지· 꿈에서도 듣고 싶었던 그 목소 리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건가요···?”
– 심장을··· 구해다 줬어···
아 역시·
아까 그 소년이 잎하넬을 살렸다는 말이었다·
감사 인사를 표해야 하는데 그러 지도 못하고 보내버리다니· 대체 어 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기뻐요·”
– 응··· 나도 기뻐····
잎하넬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꽃 서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힘이 없는지 형체가 점점 더 흐릿 해져만 갔다·
– 보고 싶었어····
꽃서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 다· 잠들어가는 와중에도 잎하넬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그 시절 보았던··· 바로 그 미소가 틀림없어서·
울컥 꽃서린은 눈물을 흘리고 말
았다·
이 기쁨을 감히 표현할 방법이 없 어서 무어라 말을 하는 것조차 힘 들었다· 울면서 웃는 것 외에는 아 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궁금한 게 많았다·
대체 왜 나를 두고 잠들었느냐·
어떻게 다시 깨어났느냐·
말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엘프의 왕이자 요정의 왕이 되었으며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지 만··· 저주에 걸려 외부 활동을 아
예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머릿 속을 오갔으나 졸음을 참지 못한 잎 하넬이 눈을 먼저 감아버렸다·
-나 너무··· 졸려····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나머 ス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니·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더 있을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 데 심지어 손을 제대로 잡을 수조 차 없는 상황이라니·
안타까움이 가슴 깊이 차올랐으나
꽃서린은 애써 그 감정을 억누르고 서 그녀를 포옹해 주었다·
잎하넬은 어느 사이엔가 잠들었고 형체는 아예 반투명한 햇살처럼 일 렁이는 수준이 되었다·
꽃서린은 그녀의 몸을 기둥 위에 뉘였다· 옛 버릇 못 버린다고 새우 잠을 청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녀가 잠들고 나서야 꽃서린은 간신히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대체 그 소년은···
아마도 심장의 힘이 약해져서 잎하
넬은 한동안 계속 잠을 청할 듯싶 다· 소년의 정체를 묻고 싶어도 그 러지 못하는 상황·
의문은 많았다·
소년은 어떻게 이곳을 알았는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들어왔 는가·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잎하 넬이 심장을 원하는 걸 알았는가·
원하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 떻게 심장을 구해주었는가·
“하아····”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답답하기만 하다· 꽃서린은 저도 모 르게 입가를 매만졌고·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가면이 없어?’
생각해 보니 아까 전 새벽 공기를 맡기 위해 가면을 벗어서 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자신과 틀림없이 눈을 마주쳤다·
즉 저주에 걸렸다는 건데····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 ‘매혹의 저주어】 걸린 이들은
절대로 자신을 거부할 수 없다· 자 신을 거부하려는 행위 자체가 금기 처럼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소년은 뒷걸음질을 쳤다·
이유는 꽃서린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솔로 워프 흘을 사용할 때 괜히 다른 사람이 휩쓸리면 신체가 절단 되는 등의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 문이다· 아마도 소년은 거기까지 생 각하고서 뒷걸음질을 쳤겠지만····
‘이상해·’
매혹의 저주에 막 걸린 이는 이성 마저 잃어버린 채 멍하니 자신만을
바라보게 마련이었다·
그런 세세한 배려를 할 정도의 이 성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 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 또 다른 가능 성·
···설마 이 저주에 면역을 가지 고 있는 건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머금은 소년이었다·
인간이라면 분명히 가지고 있을 체내의 탁한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꽃서린은 그 소년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 이곳에 있
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마치 잎하넬과 하나 된 듯 동화된 기운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
일반인은 이 정원이 존재하는지조 차 알 수 없다· 설령 지도에 이 정 원의 위치를 표시해 준다고 하더라 도 찾을 수 없다· 인지 자체가 불 가능하도록 설계되었기에·
심지어 영원히 잠들어버린 잎하넬 과 의지로 대화를 나누고 심장을 구해와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신비로 운 능력을 가진 소년이라면····
정말로 매혹의 저주에 대한 면역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꽃서린이라고 해서 세상 모두를 만 나본 것은 아니다· 세상 모두에게 저주를 걸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 단 한 명쯤은 저주에 면역 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찾아야 해·’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군지 정체가 무엇인スL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찾아낼 것이다·
그건··· 잎하넬에 대한 은혜를 갚 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 * *
쿵!
“컥!”
워프가 끝난 직후 웬 딱딱한 돌바 닥에 허리를 부딪힌 나는 거칠게 신 음을 내뱉었다·
허리는 하필 팔도 제대로 닿지 않
아서 문지르기도 힘들다·
“이왕 보내줄 거면 똑바로 좀 보내 주지····”
바닥에 대(大) 자로 드러눕고서 이 마를 문질렀다·
‘꽃서린이라·’
대체 그 여자가 왜 여기에 찾아왔 던 걸까· 아이테르 월드에서도 이런 이벤트가 있었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없던 것 같 다· 하긴 뭐 이 장황한 현실을 게임 내에 모두 담을 수는 없으니 모르는 게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애 당초 아는 게 더욱 적은 형편이니까·
그래도 대충 둘의 관계가 이해는 갔다·
‘둘이 친구 먹었나 보네·’
방구석에 처박혀서 잠만 퍼질러 자 는 신수인 줄 알았더니 잎하넬은 생각 외로 굉장히 친구가 많았다· 선대 마력누설지체의 검객도 그렇지 만 심지어 엘프왕을 친구로 뒀을 줄이야·
알고 보니까 인맥 짱짱하잖아?
줄 좀 제대로 서둘 걸 그랬나·
그나저나····
‘예뻤지·’
지금도 계속 꽃서린의 그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연홍춘삼월의 가 호’ 덕분에 매혹의 저주를 완전히 저항했을 텐데도 애당초 워낙 본판 이 예뻐서 그런 것 같다·
굳이 저주가 없었더라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홀렸을 거란 생각이 든 다·
‘진짜 가호 못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기껏 스텔라에 다니면서 기반 좀 다졌나 싶은데 남주도 아니고 서브 남주 정도의 취급을 받는 꽃서린에 게 흘려서 바보가 될 뻔했다·
새삼 연홍춘삼월에게 고마움을 느 끼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 렸다·
‘가만 연홍춘삼월의 가호가 있으 면 꽃서린의 저주를 아예 없앨 수 있지 않던가?’
비록 지금은 연홍춘삼월이 힘을 대 부분 잃어버린 탓에 가호의 능력치 가 굉장히 저조했으나 그래도 꽃서 린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 장은 없었다·
,흐음····)
꽃서린은 비록 엑스트라에 불과했지 만 완전히 선(善)에 가까운 인물이
었고 그 능력 또한 세계수 내에서 싸 운다는 전제하에 엘트먼 엘트윈과 맞 먹을 정도라고 알고 있다·
풀레임이 꽃서린의 저주를 해제해 주는 미래는 ‘선택지 분기’에 따라 서 갈린다·
평생 풀레임과 꽃서린이 조우하지 못하여 영영 저주를 달고 사는 참혹 한 미래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불확실한 미래 따 위에 기대지 않고 내가 직접 나서서 꽃서린의 저주를 해제해 줄 수 있다 면····
’···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대뜸 스텔라의 생도가 만나 달라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인물도 아니고· 애 당초 연홍춘삼월의 가호를 얻긴 얻었 으나 이걸 어떻게 이용해서 매혹의 저주를 지우는지도 잘 모른다·
아무튼 꽃서린의 일은 나중에 가 서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잎하넬이 보내준 이 장소가 중요했다·
‘되게 평범하네·’
잎하넬의 정원처럼 신비로운 공간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뭔가 있
음 직한 장소를 바랐는데 이곳은 그 냥··· 완전히 동굴이었다·
그것도 내리막길로 가득한 동굴·
그렇다고 못 내려갈 정도는 아니었 기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동굴의 아래쪽으로 나아갔다·
화륵!
가장 아래쪽에 도착하자 벽에 걸려 있던 촛불이 차례대로 켜지며 길을 밝혔다·
마치 탄광을 보는 듯한 비좁은 통 로의 끝에는 낡은 문짝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마법적인 기운이 느껴졌으 나·
-잎하넬의 기운을 확인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웬 목소리가 흘러 나오며 평범하게 문이 열렸다·
아무래도 잎하넬의 목걸이 덕분인 듯싶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창고와 별반 다 를 게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오래된 냉병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 었고 낡은 서적 등이 책장에 깔끔 하게 꽂혀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생활했던 건지 책상이나 의자 침대의 흔적도 남아 있었는데 오래돼서 사용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검이나 책들은 보존 상태가 굉장히 깔끔해서 당장 읽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이 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창고의 정가운데에 위치한 은색의 검·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으나 주변에 둘러진 무형의 결계가 나를 가로막 고서 보내주지 않았다· 잎하넬의 목 패를 가져다 대보았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도 건들 수 없도록 해놓은 듯 싶었다·
‘이건 나중에 잎하넬한테 다시 물
어봐야겠는데·’
그보다는 마력누설지체에 관련된 서적들을 어서 찾고 싶었다·
책장에는 대부분 마법서적이 꽂혀 있었으나 가장 안쪽을 확인하니 누 군가가 펜으로 직접 쓴 듯한 원서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마력누설지체에 대하예
[작성자 : 하태령]
투박한 글씨체에 심플한 제목· 손 으로 쓸어내리니 거친 감촉이 느껴
졌다· 책장을 여니 서론도 없이 곧 바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 음을 향해 달려간다·
본인의 신체는 조금 특별했다·
달리는 순간부터 종착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그녀가 말했다·
“너는 스무 해를 넘기기 전에 죽을 거야·”
마력누설지체·
이 체질을 타고난 이는 한 세대에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드물다·
재수 없게도 하필이면 본인이 그 체질에 걸려 버린 듯싶다·
역사적으로 마력누설지체를 타고난 이들은 모두 단명하였고 본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 보라· 본인은 마흔이 넘었는데도 거뜬히 살아 있다·
지금은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일찍 본인의 몸에 대해 깨달을 수 있 었더라면 더 오래 살 수 있었겠지·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일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으니 오히려 죽을 용기가 생겼다· 인류의 꼭대기 에서 군림하는 그놈들에게 도전할 용기까지도····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용도가 아닌 그저 일기를 쓴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장을 읽고서 그 생각을 접었다·
아마도 본인이 죽은 이후에도 본 인과 똑같은 체질을 타고난 누군가 가 태어날 것이다·
만약 그게 너라면 축하한다·
너는 이 글을 읽음으로써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테니까
본인은 여기에 ‘마력누설지체’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모조리 기록해 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행 의 성과라고 하는 게 좋겠군·
마력누설지체는 그 어떤 의학도 과학도 마법도 치료할 수 없다·
우리의 신체는 마법이라는 상식을 벗어나 있다· 모든 게 마나로 이루
어진 세상에서 마나를 거스르는 유 일한 존재니까·
우리가 택할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 지도 않는 엘릭서를 찾아 돌아다니 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명의를 찾 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에게 비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 자신을 믿고 단련하는 것·
그것뿐이다·
마력누설지체는 살아남기 위해 필 연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즉 여기에 적힌 ‘살아남는 법’이란 곧 ‘강해지는 법’이나 마찬가지·
어쩐지 가슴이 설레어 나는 긴장 한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다·
지금부터 그 방법을 서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