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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패밀리어 계약식(1)
다음 날 오전·
하늘꽃요람의 꽃나무 대학병원에서 눈을 뜬 해원량은 멍한 눈으로 창문 을 바라보았다·
짹짹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슬며시 옆을 돌아보니 풀 레임이 사과를 깎고 있었다· 그녀는
묘하게 흥분된 표정이었다·
“환자가 깨어날 때 옆에서 간병하 면서 사과 깎는 시츄에이션 알지?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 새끼 눈치는 있어갖고 적당한 때에 눈 뜬 다? 응?”
그녀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장난 스레 말했다· 해원량은 얼떨떨한 표 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디지···r
“뭐야· 기억도 안 나? 우리 하늘꽃 요람으로 놀러왔잖아·”
정확히는 현장체험학습이다· 평상 시의 해원량이었다면 그렇게 정정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도로 아 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은 나?”
“잘··· 모르겠다·”
“그래?”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 풀레임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기 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으리라· 흑마 인에게 조종당했던 기억은 마법사로 서 수치일 테니까
이번 일을 아는 건 단 다섯 명밖 에 없다·
카엔과 혜이진은 어디 가서 이런 일을 발설할 만한 인물이 아니며
또 그래서는 안 되는 신분이다·
백유설과 마유성은 그의 명예를 보 호해 주기 위해 흑마화가 되었단 사 실을 비밀로 묻어버리기로 했다·
만약 본인이 흑마인이 되었단 사실 을 알게 되면 해원량은 끝없는 자 격지심에 빠져서 허우적댈 테니까· 여러모로 참 착한 소년들이다·
“최근에 네 몸에 정체불명의 열병 이 발생했다더라나 뭐라나· 지금은 말끔히 치료됐어·”
“어떻게···
“어떻게 하긴 내가 했지 인마· 나 이래 봬도 광휘의 마법人卜야· 알간?”
“···그런가·”
해원량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ス 1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전까지 자꾸만 자신의 심장을 꾹 꾹 찌르던 그 불쾌한 감정들이 모조 리 말끔히 사라졌다·
백유설이나 마유성을 떠올려보아 도 질투심이나 열등감은 전혀 느껴 지지 않았다· 오히려 투쟁심만이 끓 어오를 뿐·
‘•••그게 네 본모습이지·’
눈빛이 활활 타오르는 해원량을 보 며 풀레임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그와 눈을 마주친다· 어쩐 지 애정 가득한 그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풀레 임은 쓰게 웃었다·
‘세상에 예쁜 여자가 얼마나 많은 데 왜 그러니 진짜···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말은 전 부 다 거짓말이다·
여자 입장에서는 정말 순수하게 남자와 친구로 지내고 싶은 경우가 많았으니까·
해원량에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다· 만약 그가 고백이라도 해오는 날에는 이 관계가 곧바로 깨질 테니·
그전에 미리 선을 그어놔야 하는 걸까· 그런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걸 까·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 아니랄까 봐 나도 여기선 연애 고민을 해야 만 하는 걸까····’
원래의 세계에서 살아갈 땐 연애고 뭐고 공부와 일에 치여서 살았던 터 라 이런 고민이 참으로 생소했다·
”이한월 교관님이 네 상태를 봐뒀 어· 패밀리어 계약식에 참여하고 싶
다면 참여해도 괜찮기는 하겠지만··· 쉬는 게 좋을 거야·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거든·”
“···그래· 네가 쉬라고 하면 쉬겠 다·”
“어· 그냥 쉬어· 패밀리어 계약식 가 봐야 뭐 별거 없을 수도 있잖 아? 몸 상하는 것보단 낫지·”
어차피 해원량은 패밀리어 계약식 에서 신수와 계약하지 못한다· 아주 나중에 어떤 신수와 계약을 하긴 하 지만··· 그건 정말 나중의 일이니 까·
“그럼 푹 쉬라고· 곧 집합 시간이
라 나는 먼저 가 볼 테니까·”
풀레임이 나가자 해원량은 멍하니 햇살을 받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 라보았다·
이제는 그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는···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좋 지 않은 일이 있던 건 확실하다·
아마도
풀레임이 조용히 해결해 주었겠지·
그리고··· 자신이 상처입을까 봐 비밀로 묻어버리려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건 애써 자신을 위
해 노력해 준 풀레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다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피 어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조금 이라도 애써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 가 기뻤기에·
알고는 있다·
풀레임은 자신에게 친구 이상의 감 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런 드라마틱한 절절한 사랑이 아 니다·
환경도 인종도 배경도 문제가 되 지 않으나 순수하게 감정의 문제로
그녀와 자신은 이어질 수 없다·
그래서 해원량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당분간 이 사랑을 포기하 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10대의 첫사랑이란 대개 그런 법 이었으니·
* * *
세계수 탄신일이 종료되었다·
그 환상적인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텔라의 생도들은 곧바로 다 음 일정에 들어가야만 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신수 계약을 위해 세계수의 뿌리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곳은 일종의 아공간이며 현실과는 다른 환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천령나무 뿌리의 입구·
평범한 엘프들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그 장소에 천여 명의 마법 사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뿌리 내부에는 신수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흑마인들의 흑마력에 굉장히 취약한 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수가 자체적으로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상당히 예민한 장소인 만 큼 아무에게나 열리는 장소가 아니 며 방비 또한 굉장히 철저했기에 뿌리 입구 주위에는 결계를 지키는 엘프 수호자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S반의 교관 이한월이 대표로 1학 년 생도들에게 짧게 설명하였다·
“주어지는 시간은 일주일· 너희들 에게 허락된 공간은 저13계층’의 뿌 리까지 다·”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난폭하고 위
험한 신수는 엘프 수호자들이 제4계 층 이하에 가둬놓고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쳐놓았다고 한다·
1학년의 마법으로는 감히 그것을 뚫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제4계층에 접근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도록·”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그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
나는 불량 학생이었으므로 저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평범하게 에피소드를 진행하면 제3
계층에서 모든 스토리가 진행된다·
하지만 아주 간혹 몇몇 플레이어 들이 우연히도 ‘숨겨진 통로를 발 견하고는 했는데 그곳을 통하면 결 계를 뚫고서 제4계층으로 향하는 것 이 가능했다·
당연히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감수해야만 한다· 신수의 심 장은 오로지 제4계층에서만 구할 수 있었으며 ‘연홍춘삼월’ 또한 그곳에 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내 직박구리 안경에 는 여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신수들의 시야를 피해서 움직일 수 있는 히든 루트가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 교수진은 따라서 내려갈 수 없다· 즉 그곳에서는 스스로 몸을 챙겨야만 한다는 의미 ス1· 알겠나? 누구에게 의지할 생각은 추호도 하 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도 록· 이상!”
이한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 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누구보다 빠 르게 뿌리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굳 이 저러지 않아도 되건만·
기다란 나무 스태프를 들고서 뿌리 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엘프 수호자 들이 비켜섰다·
스텔라의 학생들은 결계 너머로 순 식간에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저 무리에 치이지 않도록 천천히 뒤 쪽에서 걸었다· 학생들이 속닥거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들었는데 1계층 아래로 안 내려가면 별로 위험할 건 없대·”
“나는 그래도 2계층까지는 가 보려 고· 거긴 야생동물도 별로 안 강하 고 온순하다더라·”
“나랑 같이 갈래? 나도 2계층에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서·”
아무래도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문 이 있는 만큼 학생들은 저마다 친
한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었다·
주인공들은 어떻게 움직이던가·
분기별로 다르긴 하겠지만 대부분 의 경우에서 그들은 나증에 모두 한 곳에서 모이고는 했다·
아주 특별한 신수가 제3계층에 출 몰하여 그것과 계약하기 위함이었 다·
나는 그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행동할 예정이다·
어차피 이곳에서 발생하는 헤프닝 이라고 해봐야 에이젤과 홍비연의 대결 구도였고 거기에 풀레임이 난 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내용이었
을 것이다·
홍비연과 풀레임의 성격이 원작과 는 상당히 달라져서 어떤 일이 벌어 질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엄청 큰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잠시 기다리니 슬슬 학생 들이 거의 뿌리 내부로 진입하였다· 나도 뒤따라 뿌리의 결계 내부로 발 을 들였다·
화아악!!
공기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뒤틀리 더니 순식간에 풍경이 엎어졌다·
[Episode 7]
[패밀리어 계약식]
“와우···
그리고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녹 색의 풍경·
평범한 녹색이 아니었다· 굳이 내 싸구려 표현으로 말하자면 온통 녹 색의 야광으로 가득한 공간이라고 하면 좋을까·
모든 녹색의 식물은 자체적으로 발 광하고 있었으며 허공에는 반딧불이 같은 게 빈틈없이 둥실 떠다녔는데 그 덕분에 새카만 천장 아래에서도 온 세상이 환했다·
물컹!
“으 뭐야·”
웬 빛나는 초록색 액체 같은 게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어디론가 스르 르륵 기어갔다· 슬라임인가 싶었으 나 다시 보니 지능이 없는 어린 신 수였다· 나중에 자라면 동물의 형상 을 띄게 되겠지·
오··· 존나 신기하긴 하네·”
말랑한 신수를 손가락으로 툭툭 찌 르자 마치 고양이가 뺨을 부비듯 내 손을 살짝 휘감았다· 확실흐] 신령 잎하넬의 옆에서 호흡 훈련을 한 성 과가 있었다· 신수들이 내게 호감을
보였으니까·
잠시간 내 손을 툭툭 건드리며 놀 던 초록색 젤리는 이내 바닥으로 스 며들어서 사라져 버렸다·
구경은 이만하면 되었다· 할 일이 태산이니까·
“됐고 슬슬 가 볼까·”
* * *
대부분의 학생들이 신수들의 공간 에 진입했을 무렵 뿌리의 입구·
엘프 수호자들은 인원 체크 현황을
확인하였다·
“1139명 진입이 확인되었습니다·”
¹¹그래? 올해는 1141 명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았던가? 1명은 입원했 다지만 1명이 부족한데·”
“뭐 가끔 있잖아요· 제아무리 스텔 라의 생도라도 이런 데를 무서워해 서 빠지는 놈들”
“그럴 거면 마법 전사를 지망하지 를 말았어야지·”
“어차피 2학년에 가망 없는 놈들은 걸러진다던데요?”
“그래? 인간 학교는 특이하군· 우 리 엘프 전사들의 ‘별꽃나무 마법학
교’는 아무리 의지가 박약해도 끝까 지 끌고 가는데 말이지·”
“하하 다 개성이 있는 거죠·”
“어차피 올해 스텔라 아카데미와 교환학생이 예정돼 있으니 그때어 떤지 보면 되겠지·”
엘프 수호자들은 오렌지를 까먹으 며 잡담을 나누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임무는 일주일 뒤 스텔라의 학생들이 나올 때까지 이곳을 수호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슬슬 결계를 닫을까요?”
세계수의 결계를 닫는 순간 그 누 구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
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선임 수호자가 고개를 저었 다·
“음 마침 저기 한 명이 더 오는 군·”
“어라· 그러네요· 딴짓 하다가 늦었 나 봐요·”
“스텔라의 생도가 그럴 리가 있나· 분명 뭔가 필수적인 준비를 하느라 그랬겠지·”
“하긴· 역시 도망치지는 않나 보네 요·”
가까이 다가온 학생은 행색이 조금 특이했다· 로브로 얼굴을 완전히 감
추고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으니 까· 하지만 스텔라니까 이해했다· 워낙 특이한 마법사들이 많이 모이 는 곳이지 않던가·
교복과 허리춤의 회중시계 하나만 으로도 충분히 그자의 신분은 증명 되었기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절차였다·
그들의 사이를 지나쳐 뿌리의 결 계 속으로 진입한····
‘하·’
메이젠 티렌은 로브를 벗어던지며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환하게 미
소를 지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지금껏 참아왔다·
많이 정말 많이 참았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누군가를 향 한 울분 시샘 분노 질투 시기 그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참을 필요 가 없어졌다·
[흑마 침식 진행도 : 49·99%]
[흑마 침식 진행도 : 50·00%]
[흑마 침식 진행도 : 71·84%]
꾸드득 꾸득!
메이젠의 얼굴이 기형적으로 뭉쳐 졌다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후!,,
흑마 침식을 억제하던 ‘축복’을 깨 부수자 시원한 해방감이 온몸을 감 싸고 돌았다·
정말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하아··· 그래 이 기운이야·’
그녀는 신수들의 공간을 반쯤 풀린 황홀한 눈 속에 새겨 담았다·
흑마인들의 침입이 허락되지 않은 이 공간에 이렇게나 쉽게 들어올 수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 지 못했다·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렸다·
마치 신께서 안배해 주신 듯 모든 일이 척척 들어맞고 있지 않은가·
하필이면 일전에 생도 한 명이 죽
어서 인원수가 줄어든 덕분에 의심 없이 입장할 수 있었으며 교주님의 ‘축복’ 덕분에 흑마를 억제하여 탐 지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메이젠이 할 일은 간단했 다·
제4계층에 서식하는 신수들을 흑마 에 물들인 뒤 결계를 깨부숴서 위 층으로 올려 보내는 것·
최소 위험도 5리스크 이상의 신수 들이 대거 흑마에 물들어 폭주하기 시작하면 1학년의 생도들에게는 그 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을 터·
하지만 그들이 도망칠 공간은 없
다· 일주일간 그 누구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고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그 일주일 사이·
메이젠은 그들의 피를 모조리 흡 수할 생각이었다·
가능성 넘치는 마법사의 피는 온전 히 흑마인의 힘이 되었으니까·
‘일주일 뒤가 기대되는구나·’
메이젠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뿌 리의 깊숙한 곳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