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1화
281. 정유진의 시간 3
“항의라고요?”
-그래. 정유진이 메인 표지 모델인데 왜 ‘만신 월아’ 1인 2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냐고!
어제 ‘만신 월아’에 관한 기사가 뜨고 나서 하루가 지난 오늘 우먼즈가 발행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만신 월아’에 대한 이야기가 으레 있겠거니 했단다.
표지 모델에 정유진이 떡 하니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월간지의 특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
아무리 마감을 미뤄도 이틀 전에는 기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 탓에 이번 달 우먼즈에는 ‘만신 월아’에 대한 기사가 한 줄도 없는 상태였다.
-정 팀장. 나 좀 살려줘! 지금 우리가 욕을 얼마나 먹고 있는지 모르지? 응?
다행히 이런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게 있다.
“따로 찍어 놓은 사진이랑 기사들이 있는데 인터넷판 우먼즈에 올리면 어떨까요?”
-지 진짜? 독점이야?
“예. 독점입니다. 그리고 상세한 인터뷰는 10월호에 싣는다고 광고하면 판매량 2배 기쁨 2배가 되지 않을까요?”
장지혜 대표가 기쁜 목소리로 대꾸한다.
-세상에. 그런 게 있으면 진즉에 이야기 좀 해주지 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
“저 이제 막 일어났는데요?”
-미 미안. 정신없었겠네.
장지혜 대표는 새벽부터 자신도 거래처들의 항의를 받은 터라 마음이 급해 실수했다며 사과를 해 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나저나 정 팀장이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니······ 오가는 게 있어야겠네.
잠깐 틈을 두던 장지혜 대표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말했다.
-10월호 표지 모델도 유진이로 해줄게. 어때?
9월에 이어 10월호 표지까지 두 달 연속으로 우먼즈의 표지 모델을 하게 생겼다.
우먼즈의 2개월 연속 표지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회.
“감사합니다. 장 대표님!”
-감사는 무슨.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드라마 끝날 때인 11월호 표지를 맡겨도 될 것 같은데?
<신의 이름으로>가 방영된 건 현재 고작 9화.
앞으로 15화나 남았다.
장지혜 대표는 10월 표지를 약속한 뒤 잘 되면 11월까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알려온다.
“대신에 자료들 빵빵하게 보내 달라 이 말씀이시죠?”
-우리 정 팀장은 사람 속을 잘 읽어서 참 좋아. 당연하지!
“지금 바로 인터넷판에 올릴 내용과 사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전화를 끊은 난 우선 곁에서 기다리던 유진이에게 2회 연속 우먼즈의 표지가 되었다는 걸 알렸다.
유진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에 붙은 푸른 얼음찜질팩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유진이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요~?”
“어. 정말. 방금 확답받았어.”
유진이가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곁에 있던 미소를 껴안았다.
덕분에 미소의 작은 몸이 흔들거려 눈에 끼고 있던 안대가 떨어졌다.
“미소야. 엄마 우먼즈 10월 달도 표지 모델이래~”
“진짜? 엄마 축하해~!”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볼을 부비거렸다.
나 역시 들뜬 심정이었지만 겨우 가슴을 억누르고 말했다.
“자. 자. 그러면 오늘도 바쁘니까 빨리 움직이자.”
“넵!”
경쾌히 대답한 유진이가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
“씻으러요.”
“디톡스 주스는?”
유진이가 어색하게 웃는다.
“좋은 소식을 들었더니 컨디션이 너무~ 좋아요. 안 마셔도 될 것 같은데요?”
“방금까지 몸이 안 좋다며?”
“아뇨. 다 나았어요.”
하지만 미소가 유진이의 손을 덥석 잡는다.
“엄마. 같이 마시자! 꼬~옥!”
미소의 단호한 태도에 유진이가 마지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주방으로 향한 우린 디톡스 주스를 한 잔씩 들이켰다.
그런데 의외로 유진이가 제일 잘 마신다.
입가의 붉은 액체를 닦은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흠~ 자꾸 먹다 보니 맛있는 거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한 잔 더 할래?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디톡스······.”
유진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백스텝으로 두 걸음 멀어졌다.
“놉! 내가 잠시 미친 모양이에요. 맛있다는 말은 취소! 취소!”
유진이는 잠이 덜 깬 것 같다며 미소와 함께 도망가 버렸다.
난 남은 주스 잔을 정리한 뒤 우먼즈에 줄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우먼즈 9월호. 매진 사태!]
[인터넷 우먼즈. 정유진. 청명에서 만신 월아까지. 스펙타클한 1인 2역 도전기!]
자료를 보낸 뒤 10분도 되지 않아 기사가 업로드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터넷판 우먼즈에는 댓글들이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실검 순위에 유진이의 이름과 우먼즈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기사를 보는 사이 유진이는 기초화장을 끝내고 샵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오빠. 준비 다 됐어요.”
“그럼 갈까?”
미소는 유치원에 가는 날이라 노란색 가방을 메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2층의 인터폰이 울린다.
“유진아 잠시만.”
인터폰을 확인하자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경호원들 사이에 있는 두 사람은 SBC의 정삼룡 CP와 KBC의 양준석 CP였다.
MBS도 아닌 SBC와 KBC의 CP들이 찾아온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설마 벌써 차기작을 제의하러 온 건가?’
약간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일단은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다.
삐이-.
1층 대문이 열리자 계단을 두 개씩 뛰어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2층 현관문을 열자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 들어왔다.
“어서들 오세요.”
“헉헉. 내 내가 먼저 왔어.”
“같이 왔으면서 뭔 소리야!”
음료수를 내밀자 단번에 잔을 비운 정삼룡 CP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 팀장! 아직 차기작 결정 안 됐지?”
그 순간 양준석 CP가 정삼룡 CP의 입을 막고 먼저 제안을 꺼내버렸다.
“정 팀장. 우리 KBC에서 40부작 특별 드라마를 준비 중인데 생각 없어? <경성의 불빛>이라고 남주 위주의 드라마가 아니라 여주가 핵심인 드라마야. 이런 기회 진짜 드문 거 알지?”
KBC가 40부작 특별 드라마라고 말하는 <경성의 불빛>은 내년 1월에 방영하는 최고 시청률 17%의 드라마였다.
괜찮긴 한데 딱히 끌리는 건 아니었다.
정삼룡 CP가 자신의 입을 막은 양준석 CP의 손을 깨문다.
“아악! 너 뭐야?”
정삼룡 CP가 입을 쓰윽 닦고 말한다.
“에퉤퉤! 뭐가 이리 짜! 그나저나 형님. 페어플레이를 하자고 하시더니 이게 뭡니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주가 들러리로 나오는 작품을 가지고 사기를 치시면 안 되죠! 양아치도 아니고.”
양준석 CP가 손을 털며 대꾸한다.
“야! 사기라니! 엄연히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데!”
“어허! 내가 대본을 다 봤는데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두 사람은 딱 한 살 차이.
특히 같은 학교 방송부 출신 선후배다 보니 학창 시절부터 경쟁심이 끝내주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번은 정삼룡 CP의 말이 사실이다.
<경성의 불빛>은 남자 주인공이 독립운동을 위한 특수 부대원으로 활약하는 이야기가 주였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거기서 기생 역할을 하면서 남자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로 나오고.
일본군에게서 정보를 캐내서 남자 주인공에게 넘기기도 하고 액션 연기도 하는 등 나쁘지는 않은 배역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주연이라고 하기에는 비중이 작다.
이번에는 정삼룡 CP가 자기네 드라마를 어필해왔다.
“우린 ‘유리네 가족들’이란 드라마야. 대본 좋다고 소문났는데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네 가족들>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신세가 된 유리가 아픈 엄마와 고등학교 남동생 그리고 막둥이 여중생을 작가 생활로 먹여 살리는 이야기다.
내년 1월에 방송하는 수목 드라마인데 시청률 20%로 꽤 선전하는 드라마였다.
원래 여주인공은 최은주라는 여배우였다.
그리고 그녀는 방송가 사람들이 다 아는 온갖 추문의 당사자다.
“어때?”
정삼룡 CP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두 작품 중에서 고르자면 <유리네 가족들>이 더 낫다.
하지만 난 차기작으로 마음을 먹은 다른 작품이 있었다.
그 탓에 난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아쉽지만 지금 당장 결정하기는 힘드네요. 생각할 여유를 주셨으면 합니다.”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더니 양준석 CP가 오해했다.
“혹시 출연료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우린 회당 5천까지 해줄 수 있어.”
현재 <신의 이름으로>에서 유진이의 ‘청명’의 출연료는 천만 원.
단번에 5배나 뛰었다.
그러나 정삼룡 CP는 한술 더 떴다.
“에이. 고작 5천만 원요? 이 형님이 사기만 치는 줄 알았더니 양심도 팔아먹었네!”
“야! 40부작에 5천이면 엄청 많이 챙겨주는 거야!”
양준석 CP가 언성을 높이자 미소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정삼룡 CP가 애 앞에서 왜 소리를 지르냐며 훈수를 둔다.
“거 성질머리하고는. 애도 있는 자린데 목소리 좀 낮추세요.”
“그 그래. 내가 좀 흥분했나 본데 미안하다. 미소야.”
양준석 CP가 빠르게 사과하자 미소가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대신에 두 분 다 손잡고 악수하세요.”
정삼룡 CP가 헛웃음을 짓는다.
“악수······를 하라고?”
“네! 선생님이 싸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이도 어른도 그러면 나쁜 사람이랬어요.”
미소의 설득(?)에 정삼룡 CP는 양준석 CP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순간 미소가 활짝 웃는다.
“됐어요! 이제 다시 친구예요!”
미소 덕분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와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경쟁은 경쟁.
정삼룡 CP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정 팀장! 우리 SBC는 편당 7천까지 준비했는데. 어때?”
“7천이요?”
이번엔 유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양준석 CP가 부른 5천만 원의 출연료에 소형차 한 대 값이 더 붙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것도 편당으로 계산한 결과다.
거기다 <유리네 가족들>은 24부작으로 편수가 작아 전체 금액은 낮아도 대신 더 빨리 촬영을 끝내고 다른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
첫 주연작인 것 치고는 상당히 좋은 대우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불만이다.
두 사람이 유진이를 생각해주는 건 좋았지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금 상황에서 받아들이기엔 적은 금액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길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대한민국 여배우 중 최고의 실력파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유진이의 이름을 말할 텐데 말이다.
아무튼 현시점에서 S급 연기자의 기준은 편당 1억이었기에 유진이에겐 적어도 그 정도를 안겨주고 싶었다.
주영인도 <신의 이름으로>의 출연료로 편당 9천만 원을 받았는데 그 이상의 임팩트를 남긴 유진이가 노리지 못할 금액도 아니었고.
그 탓에 난 두 사람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당장 결정을 내릴 순 없겠네요.”
두 사람이 답답하다는 듯 입을 맞춰 말한다.
“허참! 오퍼가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금액이나 원하는 스타일을 말해 봐. 방금 말한 작품 말고도 협상 가능하니까. 사극? 시트콤? 로코? 뭐든 말만 해.”
두 사람 모두 윗선에서 단단히 지시를 받고 온 거라며 애원하듯 매달린다.
그 탓에 결국 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차기작으로 검토하고 있는 작품이 있긴 합니다만 아직 기획 중인 작품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유진이의 첫 주연작은 내년 2월에 방송을 하게 될 신인 작가 한우주의 <화란전(花亂傳) – 꽃들의 전쟁>이라는 작품이다.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자매와 조카들이 여왕의 자리를 놓고 싸우는 가상 역사물로 전후 10년간 최고의 사극으로 통하는 명작.
다만 이 작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저작권 분쟁.
<화란전>의 원작자인 한우주 작가는 스타 작가 유선정의 보조 작가 출신이다.
그런데 작품이 히트하자 스승인 유선정 작가는 곧장 소송을 걸어버린다.
한우주 작가가 자신의 시놉시스를 뺏겼다며 말이다.
그 후 한우주 작가는 길고도 지루한 소송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우주 작가의 패배였다.
유선정 작가가 고용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이 한우주 작가를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탓에 한우주 작가는 억울하게도 자신이 번 돈 대부분을 유선정 작가에게 뜯겨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몇 년 간 노예나 다를 바 없는 보조 작가로 살며 세상 물정을 잘 몰랐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스승의 작품을 훔친 쓰레기’라는 평가를 듣고 다시는 어떤 드라마도 맡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난 이번엔 그 억울한 일을 막고 유진이를 <화란전>의 여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차기작이 있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하자 정삼룡 CP가 곤란한 듯 물었다.
“혹시 그거 외주제작사 작품이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우리 국장님 멱살을 잡고서라도 편성 잡아줄 테니까 말만 해.”
난 흥분한 두 사람을 재차 달래야만 했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촬영장으로 가야 하는데······”
정삼룡 CP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오늘은 이만 물러날 테니 잘 생각해봐. 조만간 또 올 테니!”
양준석 CP도 같은 반응이다.
두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집을 나섰다.
난 유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오늘도 장난 아닐 거라고?”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지만 버라이어티한 하루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 * *
<신의 이름으로>의 세트장으로 가는 동안 유진이와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좋은 작품이 있긴 한데 아직 대본 개발 단계라고.
그러나 유진이는 이번에도 모든 걸 내게 맡겼다.
“결정되면 이야기해주세요. 작품 보는 눈은 오빠가 최고잖아요.”
유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다.
“오케이. 나만 믿어.”
삼십 분 정도 지난 뒤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예? 뭐가요?”
난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봐.”
웅성웅성.
주차장에는 대략 1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수의 기자들이 벌겋게 눈을 뜨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