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9화
279. 정유진의 시간 1
드르륵.
새하얀 소복으로 미리 갈아입은 진유정 여사가 도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MBS <오늘 아침!> 팀의 카메라가 따라붙었지만 진유정 여사는 태연했다.
주변을 쓰윽 훑어본 진유정 여사가 내게 말한다.
“정 팀장. 이제 가볼까?”
“예. 가시죠.”
진유정 여사와 세트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마치 연말 시상식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MBS <오늘 아침!>팀의 카메라가 따라오고 스태프들이 좌우로 거리를 벌렸다.
진유정 여사는 세트장에 도착하자 짧게 심호흡을 하며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요.”
이제는 ‘만신 월아’의 정체를 밝힐 시간.
진유정 여사는 세트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진유정 여사의 허리가 천천히 굽어지기 시작한다.
진유정 여사는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만신 월아’로 변해버렸다.
다들 말없이 그녀를 쳐다만 보는 가운데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오늘 아침!>의 최안성 리포터의 목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은 최근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수 목 드라마 <신의 이름으로>의 촬영 현장입니다. 지금 이 드라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소문에 현장을 찾아왔습니다. 현재 ‘만신 월아’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를 잠깐 보시고 그녀의 진짜 정체를 다시 파헤쳐 보겠습니다.
리포터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현장 카메라들은 세트장 안의 ‘만신 월아’에 집중되었다.
‘만신 월아’가 신당 세트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다들 침을 꼴딱 삼킨다.
김성운 PD가 확성기를 잡으며 촬영 준비를 지시했다.
“스태프들은 정신 똑바로 차려요. 바로 촬영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만신 월아’의 맞은편에 있어야 할 ‘청명’ 역의 유진이가 보이지 않았다.
스태프들이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진 씨는 왜 안 와?”
“정유진 씨?”
“유진 씨 어디 있어~?”
현장의 스태프들이 반사적으로 굴렁쇠의 매니저들을 쳐다본다.
우린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강감찬 대표는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도 아무도 유진이가 ‘만신 월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김성운 PD가 단호한 지시를 내렸다.
“씬 111은 우선 ‘만신 월아’ 분의 촬영만 할 겁니다.”
“예? 유진 씨는요?”
“됐고.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일단 내가 하라는 대로들 하세요.”
김성운 PD가 카리스마 있게 현장을 이끌기 시작했다.
다들 의아해했지만 스태프들도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각자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성운 PD가 상기된 표정으로 확성기를 잡았다.
“씬 111 들어갑니다! 뤠디~~ 악숀!”
오늘따라 과장된 신호와 함께 촬영 현장의 소란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세트장에 홀로 남은 ‘만신 월아’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 *
‘만신 월아’는 원래라면 ‘청명’이 있어야 하는 맞은편 빈자리를 쳐다보며 천천히 연기를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도시에 나가 살아 본 느낌이 어떻더냐? 청명아.』
‘만신 월아’의 성격은 꽤 괴팍한 편.
하지만 지금 그녀가 허공을 보는 눈은 따뜻하고 안쓰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싸늘하기만 한 ‘만신 월아’에게도 엄마로서의 따뜻함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 늘 찌푸리던 ‘만신 월아’의 미간은 활짝 펴져 있었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다정다감한 말투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넌 나와는 다르구나. 청명아.』
‘만신 월아’가 ‘청명’의 말에 대꾸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이후 ‘만신 월아’는 답답한 속내를 표현할 때면 저고리를 꼭 쥐고 애가 닳는 표정을 지었고 즐거워할 때는 양반다리를 하고 껄껄 웃으며 무릎을 쳐댔다.
‘만신 월아’는 놀랍게도 나중에 연기할 ‘청명’의 대사 속도에 맞춰 울고 웃고 감탄하고 온갖 추임새를 넣어댔다.
덕분에 현재 ‘만신 월아’의 앞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마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잘한다. 내 배우.’
멍하니 ‘만신 월아’의 연기에 빠져있던 난 슬며시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MBS <오늘 아침> 촬영팀은 ‘만신 월아’에 카메라만 고정한 채 넋이 나가 있었고 <신의 이름으로>의 스태프들은 이제껏 그녀의 연기를 봤으면서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일신우일신.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는 고어가 생각날 정도로 유진이의 연기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조언을 해주는 게 좋을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만신 월아’는 그렇게 한참 동안 모노드라마를 찍으며 NG 없이 2분간의 연기를 홀로 이뤄나갔다.
잠시 후.
연기를 끝낸 ‘만신 월아’가 긴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만신 월아’의 연기에 몰입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다들 아쉬움을 토로하며 말이다.
“어? 끝이야?”
“미친~ 연기가 또 늘었어······”
“아 아니. 연기가 는 게 아니라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건가?”
“하아~ 진짜. 내가 뭘 본 거지?”
그 광경을 보던 김성운 PD는 과하지 않은 목소리로 컷을 외쳤다.
확성기를 타고 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그 순간 스태프들이 입을 가리며 가까스로 환호성을 참았다.
아직까진 MBS <오늘 아침!>의 카메라가 생방송으로 현장을 촬영 중이었으니까.
이헌제 PD가 다급히 손짓하자 리포터가 급히 멘트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예.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현장에서 직접 만신 월아의 연기를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시간입니다.
리포터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김성운 PD가 곧바로 확성기를 잡았다.
“자~ 바로 이어서 가겠습니다. 유진 씨. 준비하세요.”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냐는 듯 스태프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김성운 PD가 유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 자리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때였다.
‘만신 월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넵! 감독님!”
나이 든 할머니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스태프들 모두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어······ 어······?”
“아 아니지······? 에이~ 장난하지 마······.”
“그 그럴 리가······ 없어.”
이제 몇몇은 눈치를 채고 몇몇은 아직도 눈치를 못 채고 있다.
만신 월아는 굽었던 허리를 펴고 연신 콜록대던 기침을 멈췄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가발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그 순간 흰 머리카락 밑으로 인조 피부가 나왔다.
맨들맨들한 대머리를 본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음으로 유진이는 컬러렌즈를 벗었다.
흐릿한 회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나하나 변장을 지워나갈 때마다 연이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젠 마지막으로 탈을 벗을 차례.
나는 오일을 들고 대기 중이던 양소리 대리를 급히 유진이의 곁으로 보냈다.
종종걸음으로 뛰어간 양소리 대리가 탈을 벗기는 걸 돕기 시작했다.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오일을 찹찹 발라 특수하게 제작된 탈을 벗기자 목주름이 없는 팽팽한 목이 드러났다.
“뭐 뭐야······?”
“미친······.”
“진짜······ 정유진이었어?”
이윽고 탈이 다 벗겨지자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은 유진이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생글생글 웃는 유진이를 본 순간 다들 눈을 비벼대며 끔벅거렸다.
특히나 MBS <오늘 아침!> 팀은 생방송 중이었는데도 리포터가 할 말을 잊어버렸다.
탈을 벗은 유진이는 이번엔 새하얀 소복의 옷고름을 푼다.
소복 밑으로 입고 있던 흰색 반팔 티에 연하늘색 핫팬츠가 드러났다.
‘만신 월아’에서 완벽히 ‘청명’으로 변한 유진이가 손부채질을 하며 우릴 쳐다본다.
“감독님! 촬영 준비 다 끝났어요!”
유진이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로 생글생글 웃는다.
‘만신 월아’가 사라지고 ‘청명’이 세트장에 자리한 순간 김성운 PD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스태프들이 좀 놀란 것 같은데 잠깐 쉬고 갈까요? 땀도 좀 닦고요.”
“네~ 알겠습니다.”
유진이가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세트장에서 걸어 내려왔다.
난 급히 달려가 준비한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든 유진이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마치 ‘나 잘했죠?’라는 표정으로.
그와 동시에 강감찬 대표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낮고 일정한 박수 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스태프들도 하나둘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달아 참았던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 진짜 대박이네~~”
“정유진! 최고다!”
“어떻게 곁에서 보고도 몰랐지?”
“야. 이 정도면 아는 게 더 이상하다!”
“유진 씨. 나랑도 사진 한 방만 찍자!”
“스태프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1인 2역이라니······ 이게 가능한 거였어?”
“그게 아니지. 진유정 여사까지 연기했으니 사실상 1인 3역이라고.”
“난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정유진을 거꾸로 하면······. 진유정이잖아!”
자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연출부 막내 이은효의 말에 다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그렇게 스태프들의 환호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유진이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MBS <오늘 아침!>의 리포터는 축구 국가대표가 골을 넣었을 때의 스포츠 아나운서처럼 흥분해 연신 놀랍다는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다.
찰칵! 찰칵!
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촬영 스태프들을 보며 유진이가 손을 흔들어 주기 시작했다.
1인 2역.
그 힘든 과정을 성공리에 끝낸 유진이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한 껏 뽐내고 있었다.
어느새 내 곁에 선 유진이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고마워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절 이렇게까지 키워 주신 거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과 카메라에 유진이는 감격을 금치 못하고 글썽거리고 있었다.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네 매니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태연하게 말했지만 솔직히 나 역시 조금은 울컥했다.
그동안 그녀와 함께한 노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따라 현장에 먼지가 많네······.”
난 있지도 않은 먼지를 빼기 위해 연신 눈을 끔뻑거려야만 했다.
* * *
MBS <오늘 아침!>의 생방송 촬영 직후.
한국 모든 언론사에서 속보 기사가 터져 나왔다.
[(속보) <신의 이름으로>의 ‘만신 월아’의 “충격적인 진실!”]
[(속보) MBS <오늘 아침!>에서 공개. 충격에 빠진 양평 현장의 분위기.]
[정유진 놀라운 연기로 세상을 속이다.]
[원로 배우 김수희. “현역 여배우 중에 정유진만큼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
(댓글)
-미친······ 이제 20대 중반에 노인 연기로 시청자를 속였다고?
-대박이네. 난 정말 몰랐음.
-당연하지. 완전 극과 극의 캐릭터를 한 번에 보여줬는데.
-그 귀신같은 ‘만신 월아’랑 여대생 무당 ‘청명’이 같은 배우였다고?
-이거 실화임?
-ㅋㅋㅋ 나도 라이브로 본 게 아니었다면 절대 못 믿었겠다.
-좋아! 오늘 밤부터 신의 이름으로 본방사수!
쏟아지는 호의적인 기사에 MBS의 대표 최상병은 드라마 촬영을 하기보다는 MBS <오늘 아침!> 팀과의 인터뷰 시간을 2배로 늘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놀란 김명학 CP는 현장으로 달려왔고 현장에 나오지 않은 이지연 작가는 인터뷰 기사로 힘을 보탰다.
[이지연 작가. ‘무녀 청명’과 ‘만신 월아’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배우? 대한민국이 넓다 한들 오직 정유진뿐!]
현장 스태프들의 칭찬에 극찬에 가까운 기사까지 뜨자 유진이가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오빠······. 저······ 이렇게 칭찬받아도 돼요?”
난 유진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래도 돼. 고생했잖아.”
하지만 유진이는 너무 감격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자자. 어서 인사드리고 돌아가자. 인터뷰가 너무 길어져서 우리 남은 분량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시네?”
유진이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 스태프들과 다시 한번 일일이 인사한 뒤 강감찬 대표와 다른 일행들도 함께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우릴 환호했고 유진이는 마치 연기 대상을 수상한 것처럼 회사 직원들의 축하를 받았다.
겨우 사무실로 돌아와 한숨을 쉬나 했지만 이번엔 쏟아지는 광고 문의로 전화기에 불통이 나고 있었다.
유진이에게 쏟아지는 인터뷰도 있었기에 전화 인터뷰만으로도 유진이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 10시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실검 1위로 정유진이라는 이름이 내려가고 있지 않았기에 시청률에 대한 기대는 커질 만큼 커진 상태.
우린 잠시 하던 일을 놓고 회의실에 모여 <신의 이름으로> 9화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김성운 PD로부터 시청률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