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8화
268. 복귀 2
회사에는 공식적으로 9월에 돌아올 거라고 했던 강감찬 대표가 갑작스레 회의실에 나타나자 직원들 모두 화들짝 놀랐다.
까무잡잡해진 피부 짙은 선글라스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어 누가 봐도 휴가에서 막 복귀한 차림이었다.
“대 대표님이 어······떻게?”
“대표님! 잘 오셨습니다!”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강감찬 대표를 반겼다.
강감찬 대표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반갑게 맞아주니 고맙긴 한데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급한 일 처리부터 하지.”
강감찬 대표는 멍하니 있는 이기철 이사를 외면하고 성호준에게 다가갔다.
“호준아. 오래간만이다.”
“대표님은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지 말을 편히 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휴가가 길었거든. 그보다 호준이가 우리 회사로 와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원하는 건 들어주도록 해보마.”
성호준이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전 정윤호 팀장이 관리해 주는 겁니까?”
“그래야지. 하지만 정 팀의 관리를 받는다고 해도 독식은 곤란해. 지금 정 팀에서 관리하는 배우와 가수들이 모두 중요한 시기거든.”
성호준이 잠깐 고민하다가 되묻는다.
“만약에 정 팀장을 제 전담으로 붙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호준과의 약속에는 없던 사항이다.
난 분명 성호준에게 전속 매니저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대신에 내가 데리고 있는 배우들처럼 최고의 결과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성호준의 억지에도 강감찬 대표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럼 동생은 어쩌고? 동생이 자네 전담으로 뛰고 있지 않았던가?”
“영준이 녀석은 로드로 돌리면 됩니다.”
“흠. 그래?”
성호준이 강감찬 대표와 시선을 맞추며 물러날 기색이 없자 강감찬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잘 나가는 배우 앞길을 망칠 수는 없으니 위약금 없이 계약 해지해 줘야지.”
강감찬 대표는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즉 업계 최상급 배우에 대한 미련을 단숨에 버리는 저 모습은 진심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듯한 강감찬 대표의 굳은 표정에 성호준 역시 입을 꾹 다문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하며 잠시간의 기 싸움을 했지만 결국 성호준이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진심이시네요.”
“호준이 너도 날 알잖냐? 내가 언제 헛소리를 하는 때가 있었어?”
성호준이 두 손을 들어 올린다.
“역시 어설픈 블러핑으로는 당할 수가 없네요. 제가 졌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같이 관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저 작품 선택에 도움을 받는 거니까요.”
그제야 굳었던 강감찬 대표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예.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성호준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이기철 이사가 대화에 끼어든다.
“대 대표님! 휴가에서 일찍 돌아오신 건 환영합니다만 이렇게 성호준 씨의 처우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엄연히 성호준 씨는 김 실장이 데려온 배우입니다!”
강감찬 대표의 눈이 이제야 이기철 이사에게 향한다.
“내가 독단적이라고?”
“예! 휴가 중이신 분이 갑자기 들어와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시면······.”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는다.
“그 휴가 방금 끝났어. 회사가 이렇게 개판인데 내가 놀 수가 있어야지······.”
“개판이라니요!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강감찬 대표가 성호준의 손을 놓고 이기철 이사에게 뚜벅뚜벅 다가간다.
“이기철. 박희태랑 최성락 같은 쓰레기들을 불러들인 게 너야? 김 실장이야?”
조금 전까지 바락바락 대들던 이기철 이사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회사 전결권을 가진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내가 배우 하나 들일 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거친 질책이 이어지자 이기철 이사의 입이 닫혔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는 이기철 이사만 몰아붙이지 않았다.
“김 실장!”
“예!”
“자네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이게 뭐야? 자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일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예전처럼 해. 칼같이! 실수 없이!”
김동수가 말꼬리를 늘였다.
“대표님 그게 아니라······.”
“거기까지!”
김동수의 입을 다물게 한 강감찬 대표는 이번엔 내 쪽을 쳐다본다.
“정 팀장! 호준이가 이한수 감독의 차기작을 못 잡아서 잔뜩 화가 나 있는데 대안이 있나?”
성호준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미리 준비한 성호준의 차기작을 언급했다.
“송학승 감독의 ‘어쩌다 보니 김철수!’라는 작품의 주연을 추천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송학승?”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들어본 적이 없는데 누구야?”
“그게 누군데?”
강감찬 대표가 성호준을 쳐다본다.
성호준도 모른다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그는 아직 감독으로 데뷔도 못 한 조감독이었으니까.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3월 10일]
-PM 10:00 송학승 감독의 <어쩌다 보니 김철수!>. 관객 수 435만.
<어쩌다 보니 김철수!>는 송학승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코믹 액션물로 1월 말에 개봉하는 작품이다.
작품 내용은 인생을 날로 먹고 싶었던 주인공 김철수가 어쩌다 잡은 범죄자가 알고 보니 전과 11범의 흉악범이었다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할 줄 아는 것 없고 몸만 잘 쓰는 주인공 김철수는 그 뒤 경찰로 특채에 합격하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게 된다.
잡았다 하면 흉악범이고 지나가는 아이들 도왔다 하면 실종 아동이었고.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이었는데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300관으로 개봉했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결국 1500관까지 상영관을 늘리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푸시만 제대로 되었으면 400만 명이 아닌 600만 명도 족히 들어왔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난 그 작품을 성호준에게 추천했다.
원래 주인공을 맡았던 한성우가 뜬금포로 스타덤에 오른 뒤 곧바로 음주 폭행을 벌여 은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 팀장. 설명이 조금 필요할 거 같은데?”
강감찬 대표의 말에 난 제작사로 돌아다니던 대본을 까톡으로 전송했다.
“과하지 않게 가볍고 답답한 현실에서 조금은 벗어나 편히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호준 씨가 워낙 코믹한 연기를 잘하시는 것도 고려했고요.”
대본을 받은 직원들이 빠르게 읽어 본다.
이내 킥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호준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신인 감독이지만 10년 동안 봉준우 감독과 나홍기 감독의 연출부를 거치며 에이스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나리오도 직접 썼고요. 경력과 감각 모두 충분하니 스타 파워와 제작비만 갖춰지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른바 경력 있는 신인이군. 거기에 성호준이라는 카드는 부족한 감독의 커리어를 채울 수 있으니······ 나쁘지 않군.”
“예. ‘천벌’보다 월등히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 예상합니다.”
강감찬 대표가 성호준을 바라본다.
“어떠냐? 호준아.”
폰으로 시나리오를 보던 성호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래 보기 드물게 대본이 잘 빠졌네요. 만족스럽습니다.”
성호준의 허락에 강감찬 대표가 주변을 바라본다.
“일단 담당하는 호준이를 만족시켰다는 점에서 난 합격점을 주고 싶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때?”
강감찬 대표의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구성철 실장이 아닌 방상영 실장이다.
“재미있네요. 솔직히 감독이 누군지 몰랐다면 더 크게 기대했을 겁니다.”
방상영 실장이 이번엔 날 쳐다본다.
“그런데 말이야. 이 감독한테 대본만 산 다음에 제작사 유명 감독한테 맡기면 안 되나?”
난 고개를 저었다.
“송학승 감독은 감독이 꿈인 사람입니다. 절대 시나리오만 팔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아쉽군. 어쨌건 이 정도 시나리오면 먹힐 거 같다 난 찬성.”
방상영 실장의 작품을 고르는 눈은 업계 최상급이었다.
그가 동의하자 다들 웅성이며 찬성을 뜻을 밝혔다.
강감찬 대표는 이번엔 김동수를 쳐다본다.
“김 실장. 불만 있나?”
변명을 해봤자 먹히지 않을 거라는 상황.
김동수가 고개를 숙인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강감찬 대표는 고개를 들라며 주변을 쳐다본다.
“호준이는 정 팀장이 맡는다. 질문들 있나?”
아무도 질문은 없었다.
“그럼 호준이는 내일 계약서 준비해서 법무팀과 함께 집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 보자고. 이사 안 했지?”
“예. 살던 곳 거기 그대로입니다. 점심 드시고 오세요. 요즘 좀 늦게 일어나서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성호준은 팀장들과 인사를 한 뒤 회의실을 나섰다.
강감찬 대표는 그대로 회의실 상석에 앉더니 회의를 이끌기 시작했다.
강지영 본부장이 무슨 회의를 하고 있었는지 짧게 보고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답변을 내어놓았다.
“정 팀장 말대로 굴렁쇠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기다려. 왜 불난 집에 폭탄을 끼고 뛰어들려고 해! 아무리 급해도 생각부터 하고 움직여야지!”
먼저 대응하자던 김동수와 주호성 팀장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리고 법무팀장!”
“예. 대표님.”
“즉각 그 두 놈 앞으로 내용 증명 날려. 계약서 조항에 있는 귀책사유는 굵게 폰트 키워서 날리고.”
“예. 알겠습니다.”
단호한 강감찬 대표의 지시가 이어질수록 팀장과 실장들은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럼 실장급 아래로 다들 나가서 일들 봐.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돌아온 순간 흔들대던 굴렁쇠가 다시금 바로 서기 시작했다.
* * *
사무실로 내려와 몇 가지 일 처리를 하고 있자 강감찬 대표가 대표이사실로 날 불렀다.
대표이사실로 들어가자 강지영 본부장과 함께 앉은 강감찬 대표가 날 반기며 흐뭇하게 웃는다.
“아주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구나. 우리 윤호.”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대표님.”
“아니기는. 김동수가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더만? 그런데 성호준 씨 차기작 준비는 언제부터 하고 있었느냐?”
“성호준 씨가 ‘천벌’에 들어간다고 할 때부터입니다.”
실은 처음부터였지만 적당한 시기를 골라잡아 말했다.
“너라면 무슨 계획이 있겠거니 해서 조금 몰아붙였다. 그냥 성호준을 너희 팀에 배정하면 분명 군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이해하지?”
따뜻한 그의 말투에 가슴이 찡해졌다.
무턱대고 성호준이 내 쪽으로 왔다면 반발은 더 심했을 터.
강감찬 대표는 날 믿었기에 몰아붙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대비책을 마련한 덕에 배우 2실로 성호준을 데려올 명분이 분명히 생겼고.
“잘했다. 정말.”
“아닙니다 대표님.”
“허허허. 그러고 보니 벌써 팀장이구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앙상해진 강감찬 대표의 팔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제는 다 쾌차하신 겁니까?”
강감찬 대표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얇은 꽃무늬 셔츠가 펄럭거렸다.
“병은 다 나은 거 같지만 재활이 쉽지가 않더구나.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렇······군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의사가 하루에 여섯 시간 정도는 일해도 된다더구나.”
가슴이 무거워졌다.
강감찬 대표가 최대한 빨리 회사로 돌아온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강지영 본부장이랑 내가 불안해서 돌아오셨구나.’
강감찬 대표의 짙은 선탠은 창백한 피부를 가리기 위해서였고 일부러 여행지에서 돌아온 것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강감찬 대표를 더 쉬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지만 강감찬 대표가 내 속을 읽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고개 들어. 인마.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으니까.”
미적거리며 고개를 들자 강감찬 대표가 따뜻한 표정을 짓는다.
“내 성격이 급해서 일찍 온 거지 널 못 믿어서 온 게 아니니까.”
강감찬 대표는 이제부터 강지영 본부장과 내게 일을 맡겨놓고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할 거란다.
“이참에 워라벨로 즐겨 보려니까 우리 본부장은 나 대신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예. 꼭 그러세요.”
그런데 대화를 마친 강감찬 대표가 표정을 고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윤호야.”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자세를 바로 하고 답했다.
“예. 대표님.”
“동수 그놈. 아예 회사에서 밀어낼 생각이냐?”
속내를 들킨 탓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고작 이제 2년 차 팀장이 회사에서 다른 실장을 쳐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을 돌려볼까 싶었지만 강감찬 대표의 눈빛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겠다는 듯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