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5화
255. 위험 제거 2
이제껏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라고 날 몰아붙인 류신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마룬 팀장의 이름을 들은 류신의 눈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란 감정을 발견했다.
“어떻게 당신이 마룬을 알아!”
이제까지의 평정심을 잃고 소리까지 지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우리 류신 실장님은 저보다 본인 일이나 신경 쓰셔야겠습니다. 이 정도로 정보에 어두워서야 그 잘난 비서실장 자리.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보는 무기가 된다.
특히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상대가 모를 때 그 가치는 극대화된다.
류신의 눈동자는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 전화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가까스로 참는 게 보인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려야겠군요. 연락이나 해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류신이 이를 빠드득 갈며 말한다.
“너······ 그냥 둬서는 안 될 놈이군.”
난 류신을 빤히 노려보며 답했다.
“칭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류신도 경계심이란 게 생긴 모양이다.
류신의 굳은 표정을 보며 난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절 건드릴 생각이라면 그쪽도 목을 걸고 덤비세요. 그땐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전부 보여줄 테니까.”
그 순간 류신의 눈에 미약하게나마 두려움이 실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아무 대답이 없는 류신을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닫힌 문을 연 순간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정장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뚫고 나가야 하는가 싶어 주먹을 살짝 쥐었는데 류신이 등 뒤에서 외친다.
“비켜······ 드려라.”
두 명의 경호원들이 주먹을 만지작거린다.
“실장님. 불편한 일이 있으셨나 본데 저희한테 말씀만 하십시오. 당장 실장님 앞에 이 자식을 무릎 꿇리겠습니다.”
날 보는 경호원들의 눈에 호승심이 실려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류신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을 막았다.
“그냥 보내 줘! 어차피 너희들이 못 막아!”
덩치들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본다.
“실장님 지시 때문에 산 줄 알아!”
“웃기고 있네.”
누가 누구를 봐준다고 그러는 건지.
난 으르렁거리는 경호원들의 개소리를 흘려들으며 유유히 에비앙을 빠져나왔다.
* * *
류신은 홀로 남은 룸에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방금 그놈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한국으로 온 이후 정보가 차단되고 있다는 건데······ 거기다 마룬의 이름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전혀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야.”
마룬은 류신의 오른팔인 비서실 1팀장이다.
그리고 장웨이 회장의 지시를 받고 정윤호를 데려가려는 임무를 하는 동안 류신을 대신해 회장을 보필하는 역할을 맡긴 남자였다.
5년 전부터 회장을 보좌할 수 있게 키운 인재였는데 자신을 배신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상대방의 말만 듣고 손을 쓸 순 없었다.
의심이 있어도 증거가 필요했다.
류신은 서둘러 전화를 들어 올렸다.
전화하는 상대는 자신의 또 다른 수족인 비서실 3팀장인 양즈였다.
“양즈. 지금 우리가 상하이 뉴미디어랑 싸우고 있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지만 양즈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예. 어젯밤 늦게 갑자기 당을 통해 방송 채널권을 분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뉴미디어에 저희가 가진 채널 30%를 넘기라고 하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중앙당의 명령이라지만 회사의 중추를 흔들 정도의 엄청난 압력이다.
‘그놈의 말이 맞았어.’
그렇다면 마지막 확인 절차가 남았다.
“양즈! 그 중요한 사항을 왜 내게 보고하지 않았나?”
양즈 팀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주 중요한 일은 마룬 팀장에게 먼저 보고하라고 지시하셨잖습니까? 새벽에 마룬 팀장한테 보고했습니다. 잠깐 설마 마룬 팀장에게 보고 받지 못하셨습니까?
현재 시각은 밤 9시를 넘어간다.
정상적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오전에는 마룬에게 보고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이번에도 정윤호의 말이 맞았다.
순간 류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 상상 이상으로 정윤호의 정보력이 좋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장웨이 회장이 왜 백지수표까지 내밀면서 정윤호를 데리고 오려 하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실수다.’
정윤호의 정보력을 계산에 넣는다면 공격보다는 어떻게든 유혹하는 게 옳았다.
그게 안 되면 정윤호가 데리고 있는 연예인들에게 거액을 줘서 포섭부터 해야 하던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빌어먹을······.”
류신은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정윤호란 남자는 굳건한 심지와 엄청난 정보력을 가졌다는 걸 인정했다.
그 순간 류신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다. 곧 돌아가마! 내가 돌아간다는 건 마룬에게 알리지 말도록!”
-예. 실장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양즈와의 전화를 끊은 류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윤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회장님이 정윤호를 욕심내고 있으니 이 점을 잘 이용하면 뭔가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
방법을 떠올린 류신은 장웨이 회장에게 직통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류신입니다.”
-어떻게 됐나?
“말씀드리기 전에 곁을 좀 물려 주십시오.”
-왜?
“곁에 붙은 모든 이를 물려주십시오. 회장님.”
마룬이 붙어 있을 걸 예상하고 반복해서 말하자 장웨이 회장이 알겠다고 답한다.
-다들 밖으로 나가 있어.
-회장님. 그게 무슨······.
-내 말 안 들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로 마룬이 장웨이 회장의 곁에 딱 붙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이제 곁에는 아무도 없다. 말해. 정윤호는 어떻게 됐어?
“죄송합니다. 배신자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뭐? 누가 배신을 해?
“회장님 곁에 있는 마룬 팀장이 정윤호에게 제가 하려는 일을 알려준 것 같습니다.”
-뭐? 천천히 말해 봐.
류신은 정윤호가 자신도 몰랐던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의 다툼도 알고 있더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윤호 그놈의 입에서 마룬 팀장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원래 장웨이 회장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그 탓에 류신의 거짓말은 쏙쏙 들어 먹히고 있었다.
그 순간 장웨이 회장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당장 나가서 마룬 그 새X 잡아!
요란한 소음과 함께 장웨이 회장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류 실장 한국은 놓아두고 당장 들어와! 뉴미디어 그룹과의 전쟁이 우선이다!
“예. 회장님.”
류신은 안도하며 전화를 끊을 수가 있었다.
“정윤호 팀장. 내가 크게 빚을 졌군. 이 빚은 꼭 갚도록 하지.”
이를 빠드득 간 류신이 터벅터벅 문밖으로 나갔다.
“중국으로 돌아간다.”
“예. 실장님!”
류신은 곧장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강지영 본부장과 정수혁 이사를 찾아 어제 일을 이야기했다.
백지수표를 거절했다는 걸 말하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라고?”
“뭐라고요?”
놀란 두 사람을 향해 난 굴렁쇠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은 이곳이고 누군가의 철저한 을로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강지영 본부장이 날 빤히 쳐다본다.
“정 팀장님······ 그런 좋은 조건을 거절한 게 아깝진 않으세요?”
난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조건이라는 게 꼭 돈만이 아니잖습니까?”
“돈보다 좋은 조건이 뭐가 있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진짜 좋은 조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지영 본부장의 눈에 살짝 감격이 어린다.
순간 정수혁 이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우리 본부장이 한 수 배웠군.”
“그러게요. 이거 괜히 부끄러운데요?”
강지영 본부장이 날 다시 쳐다본다.
“그래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는 해드릴게요. 그리고 화연 미디어 지사장 제안을 받았다는 것도 공식 기록으로 남기고요. 그래야 정 팀장님에 관한 처우가 올라가도 다들 납득할 테니까요.”
“본부장님께서 챙겨주는 건 뭐든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요? 풉.”
강지영 본부장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화를 끝낼 무렵 강지영 본부장이 점심을 하자고 말한다.
“지혜 언니가 오늘 점심때 식사 같이하자고 하던데 시간 되세요? 저번에 신세 진 것도 갚을 겸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겠다던데?”
“골칫거리요?”
강지영 본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그 말밖에는 못 들었어요.”
대체 뭘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장지혜 대표는 허언할 성격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 * *
강남역 이탈리아 고급 레스토랑 에비체의 새하얀 원형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약 명단을 확인한 웨이트리스가 우릴 VIP 룸으로 안내했다.
“7번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웨이트리스를 따라가다 보니 강지영 본부장의 가슴팍에 L.M.L 로고가 있었다.
“본부장님. 그 옷······.”
“예. L.M.L에서 받았어요. 괜찮죠? 이영아 실장님이 전해주고 가셨어요.”
“잘 어울리시는데요?”
“전 왜 그 칭찬에 영혼이 안 담긴 거 같죠?”
솔직히 유진이한테 입히면 예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물론 강지영 본부장도 어지간한 의상은 전부 소화할 만한 체형이지만 그래도 유진이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칭찬에 영혼까지 담아야 하는 겁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보다 유진 씨 옷도 같이 받아서 2실로 보냈는데 봤어요?”
“아뇨. 최근 정신이 좀 없어서 의상 관리는 이미리 대리에게 다 넘겼습니다.”
“예쁜 옷 많이 있으니까 잘 챙겨 입히세요.”
“예. 본부장님.”
웃고 떠드는 사이 7번 방 앞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웨이트리스가 문을 열자 장지혜 대표가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어 왔어?”
그런데 그녀의 맞은편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한세화 대표가 앉아 있었다.
* * *
한세화 대표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지혜 대표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들 앉아.”
강지영 본부장이 장지혜 대표를 노려본다.
“언니. 이 사람을 왜 여기 불렀어요?”
“내가 말했잖아. 골칫거리를 없애준다고.”
“이런 불편한 자리를 만드는 게 골칫거리를 없애 주는 거예요?”
장지혜 대표가 강지영 본부장을 빤히 바라본다.
“너 나 못 믿니? 일단 앉아 보라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장지혜 대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난 한세화 대표의 곁에 앉았다.
한세화 대표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난 신경도 쓰지 않고 장지혜 대표에게 물었다.
“장 대표님. 이제 설명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러면 일단 한 대표. 사과부터 하고 시작할까?”
한세화 대표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장 대표님.”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사과는 내가 아니라 우리 정 팀장한테 해야지. 이번에 자기가 친 장난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데.”
장지혜 대표의 날 선 말투에 한세화 대표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다.
“미 미안해. 어떻게든 그쪽 이겨보려다가 내가 무리수를 뒀어. 절대로 앞으론 안 그럴게.”
장지혜 대표가 우리가 오기 전 무슨 협박을 했는지는 몰라도 날 쳐다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세화 대표의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장지혜 대표가 깔아준 판을 무작정 무시할 순 없었다.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정 팀장도 적당히 받아들여. 앞으로는 우리 한 대표가 유진이를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까.”
장지혜 대표가 한세화를 보며 되묻는다.
“그치. 한 대표?”
한세화 대표가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예. 절대로요.”
한세화 대표의 고개가 어찌나 빠르게 끄덕이는지 안 보일 정도였다.
“우먼즈 9월호 메인 표지 모델은 유진이로 삼았으니까 만에 하나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가만 안 있어. 그리고 그땐 내가 아니라 명성 그룹을 상대해야 할 거야.”
한세화 대표가 마른침을 삼킨다.
“네 대표님······.”
고개를 끄덕한 한세화 대표의 눈길이 갈 길을 잃었다.
그 순간 장지혜 대표가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장지혜 대표는 내 뒷배가 되었다는 걸 공식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장지혜 대표의 말이 더욱 신경이 쓰인다.
‘우먼즈의 9월호 메인 표지 모델이라고?’
장지혜 대표가 한세화 대표를 빤히 쳐다본다.
“한 대표. 내 할 말은 끝났고 이제 우리 밥 좀 먹으려는데 같이 들래?”
한세화 대표가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아뇨! 식사 편하게 하세요······.”
한세화 대표는 힐끔 날 쳐다보다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문이 닫힌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언니. 어떻게 했길래 저 콧대 높은 한세화 대표가 설설 기고 있어요?”
장지혜 대표가 씨익 웃더니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