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0화
250. 드라마 전쟁 5
액정에 뜬 소이영의 전화번호를 보자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얘가 왜 나에게 전화를 하고 그래? 사람 심란하게.”
난 회귀 전 소이영의 남자관계 뒤처리를 맡은 경험이 있다.
여자 연예인들과 재벌들의 스폰 관계는 보통 남자 쪽에서 질리면 정리하곤 하는데 소이영의 경우는 예외였다.
남자들이 사귀고 싶어 하는 여배우 1위였던 그녀는 자신이 스폰 기간을 정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자기가 끊어버렸다.
그러면 난 갑자기 들이닥친 스폰서에게 시달리곤 했었다.
당장 소이영 데려오라던 재벌 3세들에게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대신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재벌은 자기 회사의 경호팀을 데리고 와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기억들 때문에 내키지 않은 상대였지만 대체 왜 전화했는지가 궁금했다.
“정윤홉니다.”
전화를 받자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정 팀장님. 안녕하세요. 저 소이영이에요~. 저 아시죠?
“예.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제 드라마 보셨어요? 드라마가 처음이라 서툴지만 열심히 했는데~.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막기 위해 딱 잘라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좀 바쁜데 본론부터 말씀하시면 안 됩니까?”
-우리 정 팀장님이 성격이 좀 급하시구나~. 알았어요. 실은 저 회사 옮기고 싶어서 연락드린 거예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온다고 해도 받아 줄 생각도 없고 올 거라 믿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최소한의 확인은 필요했다.
만약 진짜라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난 그 즉시 다이어리를 통해서 그녀의 말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11일]
-PM 07:00 배우 3실 정기회의. (보고 사항 : <운명의 그대> 주연 TNT 엔터 소이영 확정.)
TNT 엔터 소속이란 내용이 사라지지 않는다.
즉 소이영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난 그녀가 오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오실 생각도 없으면서 헛소리하지 마시죠.”
순간 소이영의 목소리에 비음이 조금 더 많이 섞여들었다.
-나 탐 안 나요?
그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면 나조차 두근거렸을 정도로 매혹적인 음색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소음일 뿐이었다.
“예. 전혀요.”
-예? 뭐 뭐라고요?
“전혀 탐 안 나니까 다른 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전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전화 끊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달칵.
전화를 끊은 난 곧장 소이영의 전화를 차단 번호로 등록했다.
그녀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의 목적을 알았기 때문이다.
늘 재벌이나 탑 스타와 관계를 맺던 그녀가 이번엔 날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잠깐 ‘돈도 별로 없는 내게 대체 왜?’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 알기 위해 애를 쓰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을 신경 쓰기엔 집에서 떡볶이 파티를 벌이고 있을 유진이 문제가 급하니까.
“튀김 하나에 런닝 1km씩 추가야 정유진!”
유진이가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찍어 먹는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마음이 점점 조급해진다.
그 탓에 난 급히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 * *
“뭐야. 이 남자?”
소이영이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쳐다본다.
회사를 옮길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나주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 엔터 회사 어디에 전화를 걸어도 당장 달려와 좋은 조건을 제시해 올 텐데 말이다.
“잠깐만. 날 깐 거야? 지금? 겨우 팀장이?”
소이영은 뒤늦게서야 열이 받았다.
안 그래도 드라마의 시청률에서 밀렸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데 설마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대우할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어이가 없네. 미친 거 아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이영을 보며 한세화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영 씨. 잘 안 됐어?”
“거 한 번에 안 될 수도 있죠!”
답답한 마음에 빽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이영도 이렇게 거절당한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한 대표가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이람?’
틈을 슬쩍 보여만 줘도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든 관심을 보였다.
여자로서도 연예인으로서도.
소이영은 누구에게나 탐이 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세화가 소이영을 슬그머니 자극했다.
“이영 씨. 이왕이면 좀 더 노력해 봐. 계속 시청률이 이대로면······ 좀 곤란해지지 않겠어? 나나 이영 씨나?”
소이영이 한세화를 째려본다.
“말은 똑바로 하세요. 시청률에서 진 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정 원망하고 싶으면 작가님한테 말하시던가!”
그때였다.
대표실의 문이 열리더니 홍장미 작가가 들이닥쳤다.
“미친X. 그럼 시청률에서 진 게 오로지 내 탓이니? 너 1화랑 2화에서 적당히 연기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세화와 소이영은 급히 입을 다물고 홍장미 작가를 반겼다.
“어머~ 언니. 왔어?”
한세화가 밝은 얼굴로 인사하자 홍장미 작가는 짜증을 버럭 냈다.
“세화 넌 나한테 인센티브를 안 주게 된 게 기분 좋은 모양이네?”
시청률에서 이기면 편당 1억의 보너스를 주기로 했었다.
추가 보너스를 단 한 푼도 못 건지게 된 홍장미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한세화는 과장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쉰다.
“언니도 참. 지금 돈이 문제야? 내가 지금 그딴 푼돈 아끼게 생겼냐고.”
“푼돈? 우리 세화. 스케일 커진 것 좀 봐. 중국 쪽 파트너에게 거액의 투자를 받더니 대국의 기상이 샘 솟나 봐?”
“비꼬지 말고. 왜 왔어? 대본 수정한다면서?”
홍장미가 곁을 쓰윽 쳐다본다.
“마침 잘됐네. 이영이도 있고.”
소이영이 고갤 갸웃한다.
“전 왜요?”
“왜긴 왜야. 다음 주 3화에 바로 승부 띄우자.”
한세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언니 혹시······.”
“3화에 펜션에서 남주랑 만나서 와인 먹는 씬 있지? 그거 펜션에 있는 자쿠지에서 재촬영 들어갈 거야. 최 PD랑은 이야기 끝내고 왔어.”
자쿠지라는 말에 소이영이 당황해서 묻는다.
“설마 벌써 노출하라고요?”
홍장미가 코웃음을 친다.
“3화가 아니라 1화에 넣을 걸 그랬어. 설마 우리 이영이가 아역들 나오는 장면에 분당 시청률이 밀릴 줄은 나도 몰랐거든.”
소이영이 이를 빠드득 깨물었다.
아역에게도 졌다는 말은 수치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현실은 현실.
이미 결과는 나왔고 소이영은 정유진은커녕 미소에게도 진 상태였다.
“왜? 하기 싫어? 하기 싫으면 시청률 차이가 더 벌어지는 거 보고만 있을래?”
이를 악문 소이영이 따박따박 대꾸했다.
“최.대.한. 노출 많은 비키니로 골라올게요. 그럼 되죠?”
“너무 천박한 건 피해. 서비스도 너무 과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야. 알지?”
“아 알았다고요!”
대표실에 모인 세 사람은 다시 한번 <신의 이름으로>를 이기기 위해 의기투합(?)하고 있었다.
* * *
[<신의 이름으로>의 시청률 전쟁 완승! 1화보다 더 벌어진 시청률!]
[수 목 드라마의 승자 <신의 이름으로>. 승부는 생각보다 빨리 났다.]
[정유진의 최초의 액션 씬! 놀라운 격투 실력의 그녀?]
[단발 투혼 주영인.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때리는 것만이 액션이 아니다! 맞는 것도 액션!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주영인의 찰진 액션!]
[<돈의 축제> 소이영의 원맨쇼.]
[<돈의 축제> 강렬한 조미료 범벅의 드라마. 재미 뿜뿜! 자극 뿜뿜!]
드라마 시청률 첫 주차의 승자는 <신의 이름으로>.
대중들은 미소의 연기력에 반했고 ‘만신 월아’의 존재감에 놀랐고 유진이의 연기 변신에 환호를 보냈다.
고작 2화였지만 이 여정의 끝이 벌써 기대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난 강지영 본부장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날 찾아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지영 본부장의 맞은편에 단정한 복장의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정 팀장님. 왔어요?”
올해 59살인 문영미 대표는 대구에서 양말 가게로 시작해 현재 2천 억대의 매출회사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
현재 남편인 이종민과 함께 L.M 의류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었다.
“대표님!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정 팀장님 밤낮없이 바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럴 수야 있나요.”
문영미 대표는 다름이 아닌 명품 브랜드 광고 때문에 찾아왔다고 한다.
“사실 미국에 있는 저희 딸이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는데 현지의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서 런칭하려고 해요.”
순간 회귀 전의 일이 떠올랐다.
LM 의류는 L.M.L이라는 명품 브랜드를 파킨슨 스쿨의 수석 졸업생인 이영아 총괄 실장의 지휘하에 런칭했다.
문영미 대표의 딸인 이영아 실장은 놀랄 만한 수완을 발휘해 L.M.L을 불과 2년 만에 연간 5백억 대의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그 L.M.L의 첫 번째 모델로 유진이를 쓰고 싶다고 한다.
그것도 글로벌 모델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유진이가 좋아하겠네요.”
내 대답에 문영미 대표가 활짝 웃는다.
“그전에 한 가지만 묻죠. 어제 샤넬의 제안을 거절했다던데. 맞죠?”
강지영 본부장에게 들었다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LM과의 계약을 깰 수는 없으니까요.”
문영미 대표가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샤넬 모델이 되면 손쉽게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도요?”
난 고개를 저었다.
“조금 늦더라도 유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고요. 물론 유진이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순간 문영미 대표가 내 두 손을 붙잡았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정 팀장. 그렇게 말해줘서.”
“별말씀을요. 계약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당연한 게 지켜지지 않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갑작스레 문영미 대표가 진지한 얼굴로 새로운 제안을 해 왔다.
“L.M.L의 광고는 샤넬에서 받은 모든 조건과 동일하게 맞춰 드릴게요. 그리고 거기다 2년간 매출의 1%를 인센티브로 추가. 어때요?”
매출의 1%를 더 준다고?
LML 브랜드가 5백억 매출을 달성했으니까 1%를 받으면 5억을 추가로 받는 셈이었다.
냉큼 대답하고 싶었지만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시면 전 무조건 오케이입니다.”
“말해 봐요.”
“저희 팀에 보그 편집팀의 에이스로 있던 직원이 있습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입을 의상은 저희가 선택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LM 의류의 매출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광고비를 받고 의상 모델이 되면 연예인은 원하는 옷을 골라 입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리 대리의 커리어를 언급하자 문영미 대표가 호기심을 보인다.
“그분을 직접 볼 수는 있나요?”
난 곧장 이미리 대리를 불렀다.
태블릿을 들고 본부장실로 올라온 이미리 대리는 자기 PR를 마쳤다.
문영미 대표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민다.
“이 정도면 오히려 우리 영아가 도움을 받아야겠네요.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그럼.”
문영미 대표와 악수를 한 뒤 유진이에게 곧장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유진이는 LM 의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거기다 문영미 대표는 차후 미소를 아동복 모델로 쓰고 싶다는 제안까지 해왔다.
의리를 지켰을 뿐인데 생각 이상의 보답을 받게 되어버렸다.
* * *
7월 31일.
오후 6시 30분.
유진이에 이어 하루의 첫 드라마 <먹방의 대가> 1화가 방송할 시간이다.
<신의 이름으로>에 관한 일들이 여전히 잔뜩 밀려 있었지만 하루도 챙겨야만 했다.
“팀장님.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늘도 점심을 대충 먹은 터라 다들 허기진 모양이다.
“모니터링 끝나면 다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
“아싸!”
<먹방의 대가>는 30분 편성이었기에 모니터링이 끝나고 나서 곧장 ‘명륜사또갈비’로 가자 말했다.
하지만 광고가 끝나고 <먹방의 대가> 1화가 시작된 순간 우린 그 결정을 후회했다.
“그냥 도시락이라도 시켜 먹을걸······.”
<먹방의 대가> 1화에 나오는 음식은 백반 정식.
하루가 만든 된장찌개에서 김이 솔솔 올라오는 순간 팀원들 모두는 후회와 동시에 군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꼬로록.
“아 미치겠네.”
“와. 진짜 맛있겠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에 담긴 두부와 애호박이 어찌나 맛있게 보이는지.
게다가 다시마를 한 장 넣은 쌀밥은 유독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 고인다.
지금이라도 밥을 먹으러 갈까 고민하는 사이 하루가 먹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린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후루룩하고 된장찌개를 떠먹는 소리.
우물우물하며 밥을 씹어 먹는 소리.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한입 큼지막하게 베어 먹는 소리.
그 이외에 모든 음식을 먹으며 나는 소리가 상상력을 자극했다.
ASMR.
효과음 덕분에 따뜻한 쌀밥에 된장찌개와 계란말이가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게다가 하루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행복해하는 모습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웃는 하루의 표정을 본 순간 이번 생에도 ‘묘빨남’이란 소리를 듣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정 팀의 모든 직원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드라마가 끝난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백반 먹으러 가시죠!”
“콜!”
자리 정리도 잊고 식당으로 달려가려던 그때였다.
유현지 PD의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만! 시청률 좀 듣고 가자!”
난 흥분을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예. PD님.”
-밥 먹었어요?
“아뇨. 유 PD님은요?”
-아직요. 근데 그것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유현지 PD도 <먹방의 대가> 1화를 보며 배가 고파 죽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시청률은 얼마 나왔습니까?”
그 순간 유현지 PD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