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5화
별의 그늘(1)
레녹이 유리정원에서 맹주와 대화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직후·
부서진 갑판 위에서 레녹은 쓰러진 시귀술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유리정원에서 맹주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체감상 대략 10여 분 정도·
하지만 체내 마력흐름을 통해 관조한 결과 현실의 시간은 5초도 흐르지 않았다·
주문연맹주의 유리정원에서 보낸 순간 자체가 현실의 시간선과 동떨어져 있다는 증거·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깨닫고도 복잡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필 천체술식이라····’
구세계의 승천자 치천의 고유술식이자 어둠의 서고에서 대여해 온 천구를 조작하는 힘·
외겁도시 쿤다라로 가는 길에 장막을 비틀기 위한 수단으로서 레녹이 손에 넣은 천체술식·
맹주가 그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만남의 마지막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천체술식을 통해 구축하는 모형정원은 본디 자성영역의 원류·
술자의 의지에 따라 정원 내부의 규칙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힘이다·
맹주가 강림하기 위해 현실의 물리법칙을 고쳐 써야 한다면 모형정원보다 그에 적합한 술식이 있을까·
유리정원의 존재 자체가 한편으로는 모형정원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던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 시귀술주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꿀럭 꿀럭···!!
피웅덩이 사이에 쓰러진 창백한 인상의 여성·
눈의 초점은 흐릿하고 입과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굳어 있다·
레녹의 눈앞에서 호흡이 끊긴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시귀술주의 모습·
“살아 있다는 거 아니까 슬슬 일어나지·”
하지만 레녹은 그런 시귀술주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죽은 척이나 하고 있을 생각이지?”
“····”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군·”
파직!!
“꺄아악!! 이 일어났어요···!!”
레녹이 뇌전을 뭉쳐 피웅덩이에 던지자 시귀술주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전되지 않게 황급히 옷자락을 털고 창백한 안색으로 슬쩍 눈치를 본 시귀술주가 더듬거렸다·
“주 죽은 척에는··· 자 자신이 있는데 어떻게····”
“항뢰(恒雷)를 맞고 죽었다면 시체가 멀쩡하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맹주를 만나고 돌아오며 상황이 어수선해지기는 했지만 현실의 일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시귀술주를 죽이기 위해 항뢰를 영창해 함선의 갑판을 불태운 직후 유리정원에 입성했으니·
만약 시귀술주가 항뢰에 맞아 죽었다면 그 시체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한 일·
쓰러진 시귀술주를 보자마자 레녹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맞지 않았다면 굳이 내 앞에 쓰러져서 죽은 척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 진작에 도망치고도 남았겠지·”
창백한 시귀술주를 바라보는 레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항뢰에 맞아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모종의 수단으로 신체를 수복해 낸 건가?”
“····”
“인간보다 시체에 가까운 몸으로 보이는데 확실히 무기물이라면 수복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
“···하 하핫···· 저 저도 시귀를 대량으로 소모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라····”
시귀술주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굴리던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 가진 거 다 내놓고 갈 테니까···· 이 일단 살려주는 방향으로 하 합의를····”
“합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네?”
“여기서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맹주와 거래할 여지를 남겨둔 이 상황에서 굳이 시귀술주를 죽일 필요는 없다·
지금 레녹의 상황을 고려하면 시귀술주를 살려두고 정보원으로 써먹는 것이 합리적일 터·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 나를 따라와라·”
“아 아니··· 그 그건 좀····”
시귀술주가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할 일이 좀 많 많거든요··· 부 북부전선에도 들러야 하고··· 조만간 크 큰 의식이 하나 있어서-”
“대연결의 재구축에 대해서는 맹주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레녹이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희 연맹에서 뭘 하려는지도 이미 알고 있지· 그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으니-”
“···헤에·”
레녹이 맹주를 순간 겁에 질려 있던 시귀술주의 눈빛이 싹 변했다·
더듬거리면서 손을 든 술주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애초에 마 말로 설득할 필요도 없겠네요····”
“····”
“쓰 쓸데없는 말은 됐으니까 보내주세요· 자꾸 귀 귀찮게 굴면-”
“내 말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레녹이 말했다·
“나를 따라와야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네?”
철컥!!
갑판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팔짱을 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등허리에 장착된 철갑날개가 날카롭게 곤두서면서 강철의 깃털을 활짝 펼쳤다·
“그래야 이 자리에서 그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지·”
“그 그러니까 그게 무슨-”
쿠웅!!
그 순간 레녹과 시귀술주가 올라탄 항공모함의 거체가 균형을 잃고 크게 기울어졌다·
모함이 하늘을 날고 있던 동력 자체를 잃고 급격하게 고도롤 낮추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함선이 거센 바람에 감겨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이야아아악!!”
근처에 튀어나온 갑판 잔해를 붙잡은 시귀술주가 기괴한 비명을 지른다·
철갑날개를 갑판에 박아 몸을 고정시킨 레녹이 바람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다비·”
[중력가속도를 감안하면 추락 소요시간은 6분 25초·]
레녹의 품 안에서 다비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낙하각도와 함선의 외형으로 인한 공기저항 마력농도의 결핍으로 인한 궤도변화를 감안하면 추락 지점은 전장 8㎞ 전후·]
“헤드로 군벌의 전차군단과 드루이드가 교전중인 전장 근처인가·”
지상에 펼쳐진 장대한 숲을 전선으로 삼아 마물과 드루이드가 사방에서 격돌하고 있다·
수풀과 나무를 짓밟고 포탄을 쏘아대는 군벌의 전차부대와 그에 맞서 술식을 난사하는 드루이드들의 응전·
“서부전선 경계지대 대부분이 거대한 숲으로 뒤덮여 있군·”
떨어지는 함선 위에서 빠르게 지상의 전황을 확인한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피해 토르번 마탑과 합류한다· 모함의 비행궤도를 제어할 수 있겠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함선의 비행제어 시스템에 접속해야 해요·]
다비가 품 안에서 꼬리를 꿈틀거렸다·
[전쟁마탑에서 복제한 자동비행 알고리즘의 요령을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요?]
콰직!!
갑판에 박아넣은 철갑날개가 움직이며 함선 위에서 레녹의 신형을 옮겨 세운다·
기울어진 갑판을 성큼성큼 이동해 모함 선루에 위치한 조종실로 향했다·
콰앙!!
볼트를 터트려 문을 박살 내자 조종실 안쪽에서 붉은 살덩이가 질질 흘러나왔다·
모함의 조종실 전체를 가득 메운 징그러운 살덩이의 모습·
레녹이 표정을 찌푸리면서 살덩이를 피해 조종실 안쪽으로 날개를 움직였다·
콰직 콰직!!
비스듬히 기울어진 조종실 바닥을 철갑날개 끝으로 찍어가면서 이동한다·
바닥에 흘러내린 살덩이가 찢겨나가면서 체액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비위가 약한 레녹의 몸으로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기괴한 풍경·
하지만 조종실 안쪽의 풍경은 그런 레녹의 상상조차 뛰어넘고 있었다·
“····”
꿀럭 꿀럭···!!
오퍼레이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덩이가 조종실 의자에 달라붙어 꿈틀거린다·
흘러내린 눈알과 핏줄 신경 덩어리가 튀어나와 의자 팔걸이와 바닥에서 경련했다·
중앙에 위치한 함장석에는 거대한 더듬이 같은 무언가가 인간을 대신해 앉아 있었다·
회색빛의 더듬이 위로 수십개의 눈동자가 징그럽게 회전하고 쉴 새 없이 음습한 사념을 내뿜었다·
[우엣·]
다비조차 기겁해서 레녹의 품 안으로 숨어들 만큼 기괴하게 비틀린 마물의 형상·
이것이 함선과 동화된 장군급 개체의 근원· 헤드로 군벌의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사령관이었던 존재겠지·
군벌 전체가 금지된 의식을 통해 타락하고 전쟁병기와 동화되어 영원히 전장을 배회하는 괴물·
하지만 레녹은 그 기괴한 외견이 아니라 더듬이가 내뿜는 사념에 주목했다·
“발산하는 사념의 방향이 굉장히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군·”
차분하게 꿈틀거리는 더듬이를 바라보던 레녹이 말했다·
“어딘가로 계속해서 사념을 보내고 있어···· 군벌 내부에 마물의 사념을 수신하는 개체가 따로 존재하는건가?”
[일단 이 괴물 덩어리를 뜯어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시귀술주가 장군급 개체의 마물 조종 능력을 술식화시켜 추출한 시점에서 이건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레녹이 대답하며 조종실 앞쪽에 위치한 계기판으로 향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뿐 세포조직조차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지· 곧 숨이 끊어져 죽을 거다·”
콰직!!
철갑날개 한쪽을 계기판에 박아넣은 레녹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념을 보내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단순한 생존본능인지 인위적으로 설정된 기작인지····”
[마스터 항공모함 비행제어 시스템에 접속했는데 문제가 있어요·]
철컥!
계기판에 박은 철갑날개를 타고 의식을 연결한 다비가 말했다·
[해킹 자체는 가능한데 함선에 남아 있는 동력이 거의 없어요· 마스터의 말대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시귀술주가 마물의 정수를 강제로 추출해 버렸기 때문이겠지·”
[이대로라면 비행제어 시스템을 해킹해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쩔 수 없군·”
레녹이 함장석에 앉은 더듬이를 향해 돌아선 뒤 왼손을 눈에 가져다 댔다·
눈꺼풀을 손으로 짚고 들어올린 순간 레녹의 눈동자가 선명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키이이잉···!!
더듬이의 표면에 매달린 수십 개의 눈동자가 레녹의 마안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여길 봐라·”
···!!!!
순간 레녹의 마안을 마주한 더듬이가 크게 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안의 시선공유 능력을 사용한 정보량의 강제전이·
다비의 능력으로 더미 데이터를 만들어 마안의 능력으로 상대와 눈을 맞춘 뒤 뇌에 때려박는 능력·
갓 마안을 개안한 시절 상대를 심문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지만 사용 직후 상대의 뇌를 박살 내는 바람에 자주 사용한 적은 없다·
북대륙에서 항하사미궁으로 향하던 시절 라피스를 구하기 위해 설원의 전장에서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뀌이이익···!!]
기억을 회상하는 잠깐 사이 더듬이에 달린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레녹의 마안을 피하지도 못하고 터질듯이 달아오르는 더듬이의 형상·
직후 조종실 계기판에 시뻘건 핏빛의 광채가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스템 조작에 필요한 동력이 조금 회복됐어요!]
“마물의 사고능력을 과부하시켜 남아 있는 여력을 쥐어짜 냈다·”
레녹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오래가지 않을 테니 빠르게 부탁하지·”
[마스터 시스템 안쪽 생체 데이터베이스에 뭔가 숨겨져 있는데요?]
레녹의 말을 따라 열심히 시스템을 해킹하던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호화되어 있는 데이터를 간단하게 해독해 봤는데 이거 헤드로 군벌의 작전 계획 같아요·]
“···작전 계획이라고?”
군벌 전체가 타락해 마물이 되어버린 괴물들에게 작전과 계획이란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레녹이 그 말에 힐끗 고개를 돌리자 다비가 곧바로 계기판에 해독이 끝난 정보들을 띄워 올렸다·
=서대륙 중앙전선· [장막] 오염률 24%·
“····”
장막의 오염이라·
심상치 않은 단어의 나열에 레녹이 빠르게 다른 정보들을 훑어내렸다·
=드루이드· 자연술식· 숲을 통해 이동· 서부전선 전역 범위·
=최우선 말살대상·
문장이 아니라 단순한 단어의 나열만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설명·
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라라벨리의 드루이드· 숲이 있는 지형이라면 서부전선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했군·”
레녹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장막]의 바로 앞까지도 이동이 가능한 걸까?”
[마스터· 장막의 오염 키워드에 대해 관련 자료가 하나 있어요·]
다비가 말했다·
[근데 이거 평범한 방식으로 열어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고··· 사념을 생체 데이터로 파편화시켜놓은 것 같은데요?]
“시스템에 명령을 보내서 데이터를 송신하게 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더듬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마안을 사용해 시선을 공유해서 그 데이터를 같이 읽어내지·”
[키이익···!]
더듬이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약하게 발악하지만 소용없었다·
다비가 레녹의 말을 따라 송신 명령어를 작동· 동시에 마안을 발동한 레녹이 시선공유를 사용해 사념이 향하는 방향을 읽어냈다·
하지만 레녹이 시선공유를 사용해 확인한 풍경은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있었다·
“···이건·”
파앗!!
드루이드와 마물들이 싸우던 전장을 한참 지나 [장막]이 펼쳐진 서부전선 내부를 깊숙하게 비춘다·
서대륙에 걸쳐져 형성된 중앙전선 경계지대·
오염된 숲 안에 검붉은 핏물을 흩뿌리는 마물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육중한 전차부대가 나무 사이를 질주하고 핏줄이 덮인 자주포가 하늘 위로 포탄을 쏘아올린다·
눈알이 달린 전투기가 영공을 비행하며 거대한 모함이 하늘에서 살점과 핏물을 연료처럼 보급했다·
[크아아악···!!!]
[케케케켁!!!]
전신의 피부가 시뻘겋게 뒤집힌 마물들이 온몸에 총을 꽂아넣고 행진했다·
수천에 이르는 마물의 군세가 전선 전역을 붉게 물들이면서 대열을 갖추었다·
여기 모인 마물들이 [장막] 근처에 위치한 무언가를 둘러싸고 보호하려는 듯한 노골적인 모습·
그 반응을 따라 자연스럽게 [장막]으로 시선을 돌린 레녹의 말문이 턱 막혔다·
“····”
타락한 마물의 군세 최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인간 머리의 모습·
수십 미터 크기에 달하는 남성의 머리가 [장막]에 목을 붙인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악 아악···!!]
핏발이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쩍 벌리고 목구멍에서 쉴 새 없이 마물을 토해낸다·
기괴한 모습으로 뒤틀린 마물들의 중심에 보란듯이 존재하는 인간 남성의 머리·
저것이 바로 함선의 더듬이가 보내는 사념을 수신하는 개체였던 것·
헤드로 군벌의 마물들 중에서 저 머리만이 멀쩡한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순간 레녹의 귓가에 누군가의 전성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헤드로 군벌의 오버마인드(Overmind)가 중앙전선의 [장막]에 달라붙어 서편의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
“···!”
[군벌을 타락시킨 의식의 집행자가 마물들을 잉태하며 서쪽은 인간이 건널 수 없는 마경이 되어버렸지·]
레녹의 의식에 직접 간섭한 것이 아니다·
지금 레녹이 시선공유를 사용해 보고 있는 사념의 흐름을 매개체로 삼아 직접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
지상의 전장에서 누군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읽고 레녹에게 의지를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의념을 통하는 것만으로 이만한 소모량을 감당해야 한다니 이 정도로 강대한 의식을 지녔다면 틀림없이 전쟁마탑주 본인이겠지·]
“····”
[길게 말하지 않지· 장막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
그 말을 끝으로 전성이 뚝 끊기면서 서부전선을 비추던 시선공유가 끝났다·
함장석에 앉아 있던 더듬이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으스러지면서 핏물을 흩뿌렸다·
[마스터 비행제어 시스템 해킹 끝났어요· 이대로 궤도를 바꿔 전쟁마탑을 따라잡으면-]
“···아니· 계획이 바뀌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지상에 펼쳐진 숲을 내려다보았다·
“비행궤도를 직각으로 꺾어줘· 남아 있는 동력을 모두 추진장치에 할당한다·”
[···네?]
“라라벨리의 드루이드들이 할 말이 있다는군·”
계기판에 손을 가져다 댄 레녹이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부터 이 함선을 마물들의 머리 위에 전속력으로 처박을 거다·”
콰우우우!!!!
사선으로 추락하던 함선의 거체가 그 자리에서 비행궤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살덩이로 뒤덮인 항공모함이 고개를 숙이듯 기울어지고 지상을 향해 떨어지면서 가속했다·
쿠과과과!!!
함선의 선체 후미에 위치한 부스터가 작동한 직후 레녹이 철갑날개를 펼치면서 마력을 끌어올리고·
살덩이로 뒤덮인 항공모함이 헤드로 군벌의 전차부대가 모여 있던 집결지에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광량의 불기둥이 치솟아 폭발하고 그 여파로 주변의 나무와 수풀이 싹 불타 사라졌다·
충격파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끄에에엑!!!!]
[꾸룩 꾸구국···!]
숲 외곽에서 포탄을 쏘아대며 전선을 좁혀오던 헤드로 군벌의 전차부대가 증발했다·
떨어지는 모함의 충격을 피하지도 못하고 전장에서 날뛰던 마물들이 미친듯이 괴성을 질렀다·
사방에서 널브러진 채 불타는 전차의 포대와 캐터필러 사이에 달라붙은 살덩이들의 모습·
쿠우우웅···!!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는 항공모함이 반으로 꺾인 채 땅에 꽂혀 있었다·
갑판 잔해 속에서 날카로운 뇌광이 번뜩이고 함선 외벽에 달라붙은 살덩이가 불타 사라진다·
한참 군벌의 마물과 싸우고 있던 드루이드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함선을 올려다보았다·
“마 마물의 함선이····”
“장군급 개체가 자살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쿠웅!!
불타는 함선의 갑판 잔해를 걷어차고 레녹이 잔해 속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 위로는 철갑의 날개를 둘러 잔해를 받아내며 마력사로 시귀술주의 목덜미를 꿰어 끌고 나온 마법사의 모습·
“생각한 만큼 결과가 잘 안 나왔군·”
질척이는 마물들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선 레녹이 중얼거렸다·
“최대한 많은 마물을 죽이려고 궤도를 조정했더니 피해가 어정쩡해진 건가?”
“으 으아앗···!!”
레녹이 쥔 마력사에 꿰여 끌려 나온 시귀술주가 창백한 안색으로 버둥거리고·
전장에 남아있던 드루이드들이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던 전장에 찾아오는 때아닌 침묵·
“너희 드루이드들이 사용하는 장막으로 향하는 지름길에 대해 들었지·”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함선을 등진채로 드루이드들을 향해 돌아선 레녹이 물었다·
“이 정도로 마물을 죽여줬으면 그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겠나?”
“····”
침묵·
드루이드들이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레녹을 황망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레녹의 마력사에 목덜미를 꿰인 시귀술주가 얼빠진 안색으로 더듬거렸다·
“지 집에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