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0화
라온은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제천검을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강하군·’
카룬은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많은 성장을 이룬 듯 자신 이상의 무력을 드러냈다· 중간중간 검술까지 파훼하려고 한 것을 보면 실력을 다 발휘하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물론 힘을 아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흑탑의 마기 때문에 무력이 억제되는 카룬과 달리 자신은 오히려 더 큰 힘을 얻고 있었다·
외부라면 힘들겠지만, 탑 안에서 전력 대 전력으로 붙었다면 무조건 이겼을 것이다·
‘아니, 중무전주님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아·’
흑탑을 오르면 오를수록 분노의 권능이 강해지고 있었다· 힘이 넘쳐흘러 통제가 되지 않을 지경이라, 적이 누구든 부숴버릴 자신이 있었다·
-멍청한 놈이!
라스가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힘에 빠지지 말거라! 이런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느니라!
녀석은 정신 차리라고 말하며 눈매를 찌푸렸다·
‘미안····’
라온이 얻어맞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힘에 너무 취했던 것 같아·’
라스의 말대로 무력이 강해졌다고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지금 가진 기운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니, 오히려 더 조심해서 싸워야 했다·
‘역시나 분노는 위험한 힘이네·’
마왕들의 권능은 강한 힘을 주는 것만큼, 정신적인 영향도 큰 것 같았다· 자신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네 말이 맞았네·’
-오랜만이라니! 본왕은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느니라!
라스는 잘 알아두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온이 피식 웃으며 마지막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장막처럼 하늘거리는 입구를 들어가자, 오래된 책과 피 냄새가 동시에 풍겨왔다·
‘도서관? 아니, 그것만이 아니로군·’
좌측은 수많은 책과 책장이 정돈되어있는 도서관이었고, 우측은 밤이 찾아온 듯한 껌껌한 공간 안에 여러 종류의 무기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같은 층에 있다고 하기에는 색이 너무 달라·’
도서관은 태양이 직접적으로 비치는 듯 굉장히 밝았지만, 무기들이 나뒹구는 공간은 자그마한 빛도 들어가는 암실 같았다·
너무도 반대되는 장소가 겹쳐 있어서 뭔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여기의 층주는 누구····’
이 층의 층주를 찾기 위해서 기감을 펼치는데, 천장 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마기가 느껴졌다·
마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만으로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
‘위다·’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바로 위에 있어·’
이 위층이 최상층이고, 그 안에 흑탑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직 준비된 게 끝나지 않은 듯 놈은 승천을 기다리는 구렁이처럼 똬리를 튼 채 어마어마한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허····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아무리 잡스러운 마기라고 해도 이 정도 양을 끌어모으다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로구나·
‘너한테도 놀라울 정도야?’
-그렇느니라· 저 마기가 터진다면 몬티로 자체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니라· 물론 저놈들도 다 죽겠지만·
녀석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체임버가 무서워서 나오지도 못하는 두더지가 자폭할 일은 없었다· 분명 특별한 주술이나, 마법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화가 나는군·’
라온이 천장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씹었다·
‘대륙의 최강자 중 하나가 저런 놈이라는 게·’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농락해놓고, 정작 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 울분이 들끓었다·
이전처럼 자만심이 담긴 감정이 아닌, 적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그야말로 괴물이로군·”
카룬이 천장을 올려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빠르게 도착하지 않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날 수도 있겠어·”
그도 흑탑주가 품고 있는 마기를 느낀 듯 눈매를 찌푸렸다·
“예· 빠르게 끝을 봐야죠·”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이곳까지 올 줄이야·”
라온이 카룬에게 시선 돌릴 때 책장 뒤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외눈 안경을 쓴 백발의 노신사였는데, 허리의 레이피어만 아니면 평범한 사서라고 생각될 정도로 인자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게 우리가 내려가서 죽여야 한다고 했잖아·”
어두운 공간 속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인이 솟아올랐다·
아니, 로브가 아니라 어둠 자체를 두른 듯 그의 몸에서 검은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강해····’
흑탑주의 압도적인 마기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저 두 사람의 기파는 지금까지 만났던 마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초월자만이 지닐 수 있는 고고한 격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기 어둠을 두른 듯한 마인이 흑탑의 부탑주 시겔이다· 둔해 보이는 몸과 달리 모든 무기술과 주술에 능통하지· 괜히 흑색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야·”
카룬이 어둠과 동화된 듯한 마인을 가리키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흑색왕 시겔····’
라온이 시겔을 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이야기 속에서 듣던 괴물을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시겔은 흑탑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지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경악스러운 사건을 만들었다·
육황 시절 세 개의 무력대가 그 한 명에게 전멸했고, 뒤늦게 지원을 나갔던 오웬의 초월자마저 그의 손에 무너졌었다·
시체의 핏물 하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먹어 치워 검은 땅만을 남기기에 시겔의 이명이 흑색왕이었다·
“외눈 안경에 레이피어····”
제이나가 외눈 안경의 노인을 보며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떨었다·
“저 남자가 마성뢰에요· 현 흑탑주를 키운 집사이자, 그의 유일한 가족이죠· 지금도 흑탑의 내실을 모두 담당한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그녀는 가렛이 흑색왕 이상으로 흑탑에 영향이 크다고 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들어본 이름이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렛을 바라보았다·
‘흑탑의 살림을 모두 도맡아 한다고 했었지·’
강대한 무력을 보여주었던 흑색왕 시겔과 달리 마성뢰 가렛은 흑탑 내부의 인적, 물적 자원을 관리하는 대총관이었다· 흑탑주를 키운 집사이자, 초월자이기도 했기에 그의 권력은 부탑주 이상이라고 들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군·’
흑탑주를 칠 때 가장 방해가 될 수 있는 인물 두 명이 이곳에 모여 있다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성뢰와 흑색왕만 죽인다면 자신들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쓰레기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마성뢰 가렛이 외눈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들어온다면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마·”
그는 길을 막으려는 듯 책장 앞으로 걸어 나와 턱을 치켜들었다· 흑탑주를 키워낸 자답게 거만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지·”
흑색왕 시겔도 짧게 입맛을 다시고서 축 늘어진 몸을 질질 끌면서 앞으로 나와 길을 막았다·
“이 선만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 추잡한 목숨을 구제할 수 있게 해주마·”
가렛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얇고 깊은 금이 새겨졌다·
“흑탑주를 키운 집사라····”
라온이 가렛을 보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네가 죽으면 저 두더지가 얼굴을 비치려나?”
진한 비웃음을 그리며 가렛이 그은 선을 밟았다·
파아아아앙!
발이 땅에 닿은 순간 가렛의 허리에 있던 레이피어의 검극이 자신의 미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마성뢰라는 이명답게 경악스러운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반응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피어의 검극이 이마에 닿기 직전 허리를 뒤로 젖혀서 흘려냈다
쿠와아아아아앙!
자신 대신 가렛의 검격에 찔린 벽에 망치로 후려친 듯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위력도 무시무시했다·
“피해 봐야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가렛이 눈매를 찌푸리며 손을 뻗자, 한층 더 빨라진 레이피어의 검극이 자신의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지만, 방향을 읽고 사선으로 쳐냈다·
쩌어어어어엉!
제천검과 레이피어가 부딪친 충격파에 책장이 무너지고, 책들이 쏟아져 내렸다·
가렛의 검격은 그저 빠른 게 다가 아니었다· 담겨 있는 기운이 너무도 강대하여 검을 쥐고 있는 손이 흔들릴 정도였다·
“너, 무언가 이상하군····”
가렛은 빠르게 끝을 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연달아 레이피어를 찔러넣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빠르고 강대한 검격의 압박 때문에 닿지 않았음에도 온몸이 가시에 찔린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캬아아아아앙!
라온은 태화보를 밟으며 짓쳐 드는 가렛의 검격을 가볍게 쳐냈다· 본래의 무력이라면 쉽지 않았겠지만, 이곳에 오면서 성장한 무력과 감각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말 댁이 흑탑주를 키운 거 맞아? 너무 약한데? 서류만 봐서 그런가?”
가렛을 거칠게 도발하며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제천검의 검극을 가렛의 레이피어보다 더 빠르게 회전시켜서 놈에게 강한 압력을 주었다·
“이, 이게 무슨····”
가렛은 본인의 속도를 따라가다 못해 오히려 압도하는 자신의 검술에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놈이로구나·”
가렛의 허리를 베어내기 위해서 우측으로 돌아 들어갈 때 흑색왕 시겔이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문어의 다리처럼 펄떡이는 마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서 휘어져 들어왔다·
“음····”
라온이 눈매를 찌푸리며 진혼검을 뽑았다· 방어 준비를 하려는데, 뒤에서 푸른 칼날이 튀어나와 시겔이 마기를 갈라버렸다·
“이쪽은 맡겨라·”
카룬은 어둠이 차오른 공간으로 들어가며 시겔의 목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쩌어어어어엉!
시겔은 마기가 일렁이는 손으로 카룬의 검격을 막아냈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믿음직하네요·”
조금 전에 카룬과 싸우며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았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마성뢰 가렛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도와줄 사람도 없네?”
라온이 턱을 모로 틀며 입매를 비틀었다·
“아, 하나 남았구나· 네가 키운 두더지한테 살려달라고 하지 그래? 우리가 무서워서 오지도 못하겠지만·”
피식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입 닥쳐라!”
가렛은 본인이 키운 흑탑주를 모욕하는 것에 분노한 듯 거칠게 발을 굴렀다·
그의 하얀 이마에서 검은 뿔이 돋아나고, 뇌기로 이루어진 듯한 마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탑의 마기를 받아들여 전력을 쏟아내려는 것 같았다·
“땅을 두드려야 두더지가 나온다고 하던데····”
라온이 악마처럼 변한 가렛을 비웃으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땅에 꽂아 넣었다·
쿠구구구구!
무너진 도서관 위로 푸른 달이 떠오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붉은 태양이 피어났다·
“네가 죽으면 흑탑주도 얼굴을 드러내겠지·”
라온은 검게 얼룩진 땅에서 신검과 마검을 뽑아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죽는 것은 네놈이다!”
가렛은 칠흑 같은 뇌기를 두른 채 검은 섬광이 되어 돌진해왔다· 그의 검은 소리보다 더 빠르게 나아가 자신의 왼쪽 가슴에 닿아 있었다· 인지를 초월할 정도의 속도였다·
‘보이는군·’
하지만 자신은 이미 그의 검술을 보았기에 속도가 아닌, 투로를 읽고 있었다·
쩌어어어어엉!
목 위에 놓아둔 마검을 내려서 심장을 뚫으려고 한 가렛의 레이피어를 내리쳤다·
쿠우우웅!
가렛의 검이 땅을 치며 도서관 바닥이 완전히 박살 났다· 강대한 충격에 떠오른 책들이 찢겨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두더지가 눈은 나빠도, 귀는 좋다고 하던데, 너희 두더지는 귀도 먹었나 봐? 이래도 안 나오네?”
라온은 눈 앞을 가린 책들을 걷어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도발은 먹히고 있어·’
가렛은 흑탑주를 키웠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고, 지금까지 조롱당한 적이 없기에 자신의 도발에 그대로 찔리고 있었다·
“설마 너희를 놔두고 이미 도망친 건····”
“입 닥쳐라!”
가렛이 손목을 앞으로 세운 채 레이피어를 찔러넣었다· 검붉은 뇌기가 번뜩이며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검격이 밀려 들어왔다·
파아아아앙!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검격을 쏟아냈다· 다 막기 힘들 정도로 강하면서도 쾌속한 검격이었기에 허리와 허벅지가 베이며 붉은 피가 뿜어졌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다면 허리가 아니라, 심장이 뚫렸을 것 같았다· 역시나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너 따위가 모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가렛은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동자에 핏발을 세운 채 계속해서 검격을 찔러댔다·
하늘을 가득 채운 벼락이 끝없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캬갸갸갸갸강!
라온은 염주벽으로 가렛의 검격을 막아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제 읽히는군·’
가렛의 검이 더 빠르고 강해진 건 맞지만, 그 원류는 변하지 않았다·
만검이 새겨진 심상의 세계를 개방하며 가렛이 일으키는 검격의 폭풍 안으로 들어갔다·
쿠구구구구구!
적염을 두른 신검이 검붉은 뇌전 속으로 스며들었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은 검로였지만, 가렛의 마기는 천적을 만난 것처럼 속절없이 밀려났다·
치이이이잉!
은빛 서리를 뿌리는 마검은 그 뒤를 파고들어서 가렛의 가슴을 깊게 가르고 지나갔다·
푸카아아악!
가렛의 가슴이 길게 갈라지며 검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어찌 된····”
그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네 검은 이제 통하지 않아·”
“개소리를!”
가렛이 악을 지르자, 이마에 솟아오른 뿔이 더 두껍게 자라났다·
그는 인간을 포기하기라도 한 듯 온몸을 마기로 물들인 채 레이피어의 찔러댔다·
쿠구구구구!
레이피어의 검극에 응집된 마기가 폭발하자, 흑탑 전체를 무너뜨리고도 남을 거대한 깃창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 같았다·
쿠우우우웅!
라온이 점점 더 범위를 넓혀오는 마기의 폭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위로 올린 신검과 아래로 내린 마검을 교차하여 휘두르며 청홍의 강을 일으켰다·
아무리 큰 폭발도 물속에서는 그 위력이 줄어드는 법· 가렛이 목숨을 걸고 쏘아낸 마기의 검격은 붉고 푸른 오러 안에 파묻혀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 말도 안 되는····”
라온은 경악한 가렛의 앞으로 다가가 신검을 내뻗었다· 불길로 타오르는 칼날 놈의 목을 베려는 찰나 새까만 기류와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어둠 그 자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검은 파도가 밀어닥치고, 그 위로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인간을 넘어서고 마조차 초월한 악· 이제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괴이였다·
“아····”
카룬은 어둠 그 자체가 된 듯한 존재를 보며 숨을 멈췄다·
‘흑탑주·’
층을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손가락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기파가 자신을 짓눌러왔다· 너무도 강대한 존재감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고오오오오!
흑탑주는 가렛의 위기에 분노한 듯 어둠으로 이루어진 손을 들어 올려 라온의 목을 뽑아내려고 했다·
어둠의 신에 비하면 라온의 존재감은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미약했다· 그의 목이 뜯겨나가는 미래가 그려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투우웅!
절망을 담아낸 어둠의 손이 작디작은 인간에게 죽음을 선사하려는 찰나 라온이 반응했다·
파아아아앙!
분노를 두른 마검이 어둠의 손길을 쳐내고, 태양을 두른 듯한 신검이 금빛 섬광을 그리며 가렛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아아아악!
가렛의 목이 떨어져 나가며 까뭇한 어둠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가 오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다니····”
라온이 쓰러진 가렛의 시체를 밟고서 어둠의 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 위로 글렌을 담은 듯한 붉은 뇌전이 번뜩였다·
“너는 두더지가 아니라, 지렁이였던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