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6화
“흑탑····”
라온이 제천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내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진심인가?’
백혈교가 땅속에 있느니, 에덴의 본부가 하늘 위에 있느니 하는 추측은 많지만, 현재 오마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오마 중에서도 흑탑은 베일에 싸인 것처럼 제대로 된 방향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조차 포기한 곳을 사검마가 알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저, 정말이다!”
사검마가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주술을 완성시킬 수 있게 나를 도와준 놈들이 바로 흑탑이다!”
그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아니었나?”
“데루스 로베르트? 아니다· 본좌를 찾아와서 전성기보다도 강한 사기를 채워주겠다고 말한 놈은 흑탑의 층주였다·”
사검마는 흑탑의 층주가 직접 찾아와서 제안을 건넸다며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주술은 모두 준비해 둘 테니, 훗날 본인들을 딱 한 번 도와달라는 제안을 보냈지·”
그는 흑탑과의 거래를 말하며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흑탑····”
라온이 어깨를 떠는 사검마를 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가 아니라면 흑탑이 맞겠지·’
흑탑의 주인은 마인이지만, 사기를 사용하는 주술사나 사령술사도 많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흑탑의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놈들이 본좌를 이용할 수도 있기에 층주 놈을 미행했다·”
사검마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약점이라도 잡으려고 했는데, 운이 좋게도 흑탑의 본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을 찾게 되었지·”
그는 흑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했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를 살려서 보내준다면 흑탑에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말해주겠다·”
사검마는 어쩔 거냐는 듯 검게 죽은 입술을 떨었다·
“좋아 살려줄 테니, 말해봐·”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오히려 사검마에게 다가갔다·
-야, 그건 약속을 절대 지키지 않을 사람의 얼굴이잖느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거기다 살려준다는 말에는 왜 살기가 깃들었냐고!
녀석은 왜 평소처럼 연기를 하지 않냐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말로 하는 건 안 통해·’
사검마 같은 인간은 본인이 확신할 수 있는 조건이 걸려야만 입을 열 것이다· 말로는 어떻게 하든 소용없었다·
“살기등등한 눈빛을 꺼내놓은 주제에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
사검마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초월자 라온 지그하르트의 영혼을 걸고 맹세해라·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그는 영혼의 맹약을 걸라고 외치며 보랏빛 눈동자를 부라렸다·
“본좌를 고문해도 소용없다! 본좌가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이어진다면 기억이 삭제되는 주술을 걸어놨으니까! 그때가 되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검마는 흑탑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은 본인을 살리는 것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영혼의 맹약이라····”
라온이 손을 내린 채 눈매를 찌푸렸다·
-멍청한 놈치고는 생각을 잘했구나·
라스가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를 뀌었다·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네놈이라고 해도 영혼의 맹약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느니라· 네놈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
‘어떤 식으로?’
-저놈의 말대로 초월자의 영혼을 걸고 한 맹세라면 네놈의 무력에 간섭이 오겠지· 이 이상 성장할 수 없다든가· 본왕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니라·
녀석은 강하면 강할수록, 영혼의 격이 더 높을수록 큰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좋다·”
라온이 사검마를 굽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탑의 위치를 말한다면 내 검으로는 널 죽이지 않겠다·”
-내 검이라····
라스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제대로!”
사검마는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이름을 걸고 제대로 맹세해라·”
“초월자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네가 흑탑의 위치를 말한다면 내 검으로는 널 죽이지 않고 보내주겠다·”
라온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린 채 영혼의 맹세를 걸었다·
입으로 말했을 뿐인데, 자신의 영혼 속에 쇠사슬이 걸리는 듯한 냉랭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럼 먼저 이 검을 뽑아라·”
사검마가 잊지 말라는 듯 본인의 가슴에 박혀 있는 진혼검을 가리켰다·
“그 전에·”
라온이 사검마를 보며 턱을 까딱였다·
“너도 맹세해라· 흑탑의 위치가 진짜라는 것을·”
“물론이다·”
사검마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자 드렉 로이튼의 이름을 걸고, 흑탑의 위치를 말해줄 것을 맹세하겠다· 본좌의 말이 거짓이라면 지금의 상처를 평생 지닌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의 전신이 옅은 보랏빛으로 번쩍였다· 진정으로 영혼의 맹약을 건 것 같았다·
“좋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검마의 가슴에 박혀 있는 진혼검을 뽑았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왜 그랬냐는 듯 짙은 검명을 터트렸지만, 녹색 바람이 피어나며 그 울림을 가라앉혔다·
“그럼 약속대로 흑탑의 위치를 말하겠다·”
사검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검게 죽은 입술을 뗐다·
“흑탑은 몬티로에 있다·”
“몬티로···?”
라온이 몬티로라는 이름을 되뇌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몬티로는 남부에 있는 도시 중 하나다· 구석에 박혀 있지만, 바닷가와 가까워서 관광지로도 많이 이용되는 도시에 흑탑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이다····”
사검마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길까지는 모르지만, 몬티로에 흑탑이 존재하는 건 확실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들어보고 싶었다·
“본좌는 잿빛의 은신술이라는 잡기를 익히고 있다· 사기나, 오러를 사용하는 게 아닌 사술의 방식이라 누구도 느끼기 쉽지 않지·”
사검마는 손아귀에 회색 기운을 두른 채 입맛을 다셨다·
“이 은신술을 운용하여 흑탑의 층주를 직접 미행했다· 놈은 다른 도시나, 마을에서 여러 차례 모습과 기질을 바꿨지만, 같은 사기를 이용하는 본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층주를 추적했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수없이 길을 돌아가던 놈이 마지막에 걸음을 멈춘 곳은 몬티로였다· 처음에는 다른 마을처럼 또 모습을 바꾸겠거니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놈이 아예 사라졌다· 몬티로에 아예 들리지 않은 것처럼 그 존재 자체가 지워졌지·”
사검마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며칠 기다렸지만, 딱히 마을에서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놓쳤다고 생각하고서 돌아가려고 할 때 층주 놈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본좌가 기질을 알고 있는 다른 마인과 함께·”
그가 라온을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는 몬티로에 흑탑이 숨겨져 있다고 확신하고서 아주 천천히 수색을 진행해서 작은 통로 하나를 찾았다· 사기를 다루는 본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그 통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사용할 수가 없었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 통로에는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 억지로 들어갔다가는 본좌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게 뻔해서 포기했다·”
사검마는 흑탑의 위치만 확인하고서 돌아왔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추적했다는 층주는 누구지?”
“상위 층주인 바토르탄이다· 온몸에 가시 같은 마기를 두르고 있는 놈이지· 두 번째로 나온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통로를 발견한 곳은?”
“길거리 음식을 팔고 있는 소벤 거리다· 골목에서 찾았는데, 놈들이 나올 때만 열리기에 사기가 없는 네가 찾기는 힘들 것이다·”
“····”
라온은 말을 끝낸 사검마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거짓말 같지는 않군·’
세상 무엇보다도 본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검마가 영혼의 맹세까지 해가며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몬티로라는 장소가 너무 의외지만, 그렇기에 흑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본좌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로군·”
사검마는 안도한 듯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럼 본좌를 보내다오·”
그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사검마는 그 모습을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본좌가 네놈의 생각을 모를 줄 아느냐·’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을 보내주지 않고, 저 뒤에 물린 수하들을 불러서 합공을 지시할 게 분명했다·
‘본좌가 중상을 입고, 사기를 잃었다고 해도····’
마지막 수는 남아 있다·
심장 내부에 숨겨둔 사기를 끌어낸다면 라온이 방심하고 있는 틈에 놈의 수하를 죽이고 이곳을 벗어날 주술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럼····”
사검마가 머릿속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며 등을 돌리려고 할 때 라온이 다가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분명 날 죽이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당연히 약속은 지킬 거야·”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땅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검으로 약속을 했으니, 손으로 본좌를 치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한 건가?”
사검마가 입매를 틀어서 비웃음을 그렸다·
“영혼의 맹약에 그런 빈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의 본좌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공격을 해온다는 것 자체가 맹약을 어기는 것이다!”
그는 멍청하다고 외치며 눈을 치켜떴다·
“걱정 마· 그런 게 아니니까·”
라온이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
미간을 구기고 있는 라스에게 손짓을 보냈다·
‘부담이 있겠지만, 손가락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부담이 있어도 상관없느니라! 수하를 제물로 바치는 저 쓰레기는 본왕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으니까!
라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통하네· 잘만 끝내면 또 열흘 동안 원하는 음식을 먹어줄게·’
먹고 싶은 것을 다 사준다고 말하고서 오른손에 힘을 풀었다·
스으으으으·
언제나 그 힘만을 전해주던 라스의 분노가 깊고도, 짙은 의지를 지닌 채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 그 하나에 분노의 마왕의 존재가 깃들었다·
“자, 잘 생각해라! 본좌를 건드린다면 네놈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저주가 쏟아질 것이다!”
“아닐걸·”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을 때 라스가 깃든 손가락이 저절로 올라가 사검마를 가리켰다·
“나는 내 검으로 널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지· 널 죽이는 건 내가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검지의 끝이 번쩍이더니, 사검마를 향해 은색 섬광을 쏘아냈다·
“이이익!”
사검마가 어디서 나온지 모를 사기를 펼치며 서리의 빛을 막으려 들었다·
화아아아아아!
하지만 은빛 서리는 사검마의 사기와 손을 얼음 조각으로 바스러뜨린 후 놈의 몸까지 얼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사검마는 천천히 얼어붙어 가는 본인의 몸을 보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터트렸다·
팔이 잘리고, 뼈와 살이 뜯겨나갈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 뭘 한 거야?’
-설귀의 옷이라는 이름의 고문법이니라·
라스가 길게 입맛을 다셨다·
-동상을 입어도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살이 뜯겨나가는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니라·
녀석은 수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수장은 지옥의 고통을 당해도 싸다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이, 이 지독한 냉기! 설마 네놈이 그 푸른 마왕과!”
사검마는 이제야 라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눈동자를 뒤틀었다·
“끄으윽, 마왕의 힘이 있었으면 본좌의 주술을 지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맹약을 한 것이냐!”
그는 왜 고문으로 본인의 입을 열지 않았냐는 듯 턱을 떨었다·
“이게 빠르잖아·”
라온이 평온하게 턱을 저었다·
“뭐?”
“고문은 귀찮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이렇게 하면 바로 네 답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
지금은 사검마가 추하게 보이지만, 그는 세상에 몇 없는 초월자다·
주술을 지우고 고문으로 놈의 입을 열게 하려면 최소한 반나절 이상 걸렸을 것이기에 빠른 길을 택했을 뿐이다·
“아아····”
사검마는 마왕인 라스보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 듯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절대로····”
그는 어떻게든 도망을 치려는 듯 남은 사기를 이용하여 주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지독하리만큼 강했다·
-버러지가·
라스가 비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타아악!
은빛 서리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더니, 주술을 외우던 사검마의 입과 눈동자 그리고 일렁거리던 사기마저 얼려버렸다· 그의 모든 것이 은빛 서리 안에 갇혔다·
-버러지는 이 이상 살아서 숨 쉬는 것도 아까우니라·
라스가 손가락을 내리자, 사검마가 모래 알갱이처럼 갈린 채 박살 난 땅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극한의 고통과 공포를 느낀 듯 사검마였던 가루들이 바들바들 떨린 채 흩날렸다·
-끝났구나·
라스가 콧방귀를 뀌고서 손가락에 깃들어 있던 영혼을 빼냈다·
-끄으응, 이 정도로도 반동이 오다니····
녀석은 큼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본인의 몸을 주물렀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니, 정말 힘이 든 것 같았다·
후우우욱·
라스가 나가자, 손가락에 다시 감각이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차갑다기보다는 따스한 느낌이었다·
‘고생했어·’
라온이 식은땀을 흘리는 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네놈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수하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에 열받았을 뿐이니라!
라스는 헥헥 거리면서도 본인의 분노를 풀었을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리고?’
-약속은 지키는 거겠지?
‘당연하지·’
라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동안 먹고 싶은 음식을····’
-열흘이잖아! 이 사기꾼아!
라스는 힘든 와중에도 약속을 다 기억했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래· 그래·’
라온이 웃으며 손을 내릴 때 뒤편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주!”
“라온!”
“괜찮아···?”
물러나라는 지시를 보내놓았던 버렌, 마르타, 루난이 상황이 끝난 것을 파악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와 주었다·
세 사람의 눈동자에는 크게 돋아난 걱정이 느껴졌다·
“괜찮다· 다 끝났어·”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내고서 위로 올라갔다·
“저, 정말 네가 사검마를 꺾은 거야?”
“신주오령을 잡다니, 보고도 믿어 지지가 않네····”
마르타와 버렌은 지금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믿었어····”
루난은 진심으로 신뢰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주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이룰 줄이야····”
트레빈이 사검마였던 얼음 조각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시대가 바뀌는구나·”
그는 라온에게 시선을 돌리며 깊은 탄성을 흘렸다·
“그건 너무 거창한··· 윽!”
라온이 웃으며 손을 젓다가 복부를 부여잡았다·
‘사기가 다시 요동치는군·’
전투가 끝났기에 아스카라의 투기가 사라지며 몸에 남아 있는 사기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억지로라도 버티려고 할 때 진혼검에서 연한 빛과 바람이 피어나더니 자신의 육체에 남아 있는 사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진혼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괴롭히던 사기를 모조리 먹어 치운 후 만족했다는 듯 큼지막한 검명을 울렸다·
‘고, 고맙다·’
라온이 진혼검을 보며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옅은 검명을 흘렸다·
‘스승님의 영혼이 들어간 이후에 뭔가····’
본인의 의지가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본래부터 진혼검은 스스로의 의지가 있었지만, 리메르의 영혼이 들어간 이후에는 그게 더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으으윽·
라온이 리메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을 때 라스가 조금 전의 자신처럼 전신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 너한테도 후유증이····’
라스가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영체만으로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건 큰 힘과 영혼을 소모하게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후유증이 큰 것 같았다·
-오, 오느니라·
라스는 무언가가 온다고 말하며 입술을 떨었다·
‘통증이?’
-아니! 놈이! 이 세상 최악의 존재가 오고 있느니라!
녀석이 이를 꽉 깨물며 손을 펼치는 순간 눈앞으로 푸른 메시지가 올라왔다·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셨습니다·]
[하나의 시대를 저물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특성····]
튀어나온 건 세상의 최악의 존재가 아니라, 사검마를 꺾으며 얻은 보상이었다·
-이제 감으로도 알겠느니라! 이 망할 놈의 시스템!
라스는 악을 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
라온은 차게 식은 눈으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본왕을 그런 눈을 보지 말거라! 네놈도 털까지 다 뜯기고 난다면 본왕과 똑같이! 끼아아아악!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이건 심하지 않느냐!
‘····’
라온의 눈동자가 더 차게 식은 채 굽어졌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