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3화
-저 늙은이, 본왕이 팔을 뽑았던 버러지 아니더냐?
라스도 사검마를 알아본 듯 눈매를 찌푸렸다·
‘맞아·’
라온이 사검마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씹었다·
‘그놈이야·’
허옇게 센 머리카락과 실처럼 가는 눈매의 노인· 신주오령 소속이자, 사흑련의 수장 드렉이 확실했다·
“사검마·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주술로 이루어진 바위 속에 괴물 같은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사검마일 줄은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오황오마 바로 아랫급 세력인 사흑련의 주인이자, 부족할 게 없는 초월자가 왜 이곳에서 지독한 사기를 뿌려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좌는 돌아가고 싶었다·”
사검마는 은은한 웃음을 흘리며 양팔을 펼쳤다·
“돌아간다? 그게 무슨 뜻이지?”
라온은 사검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본좌는 푸른 마왕에게 팔이 뽑힌 후 나락의 길을 걸었다·”
사검마가 의수를 매단 어깨를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마왕에게 당한 상처는 아물지 않고, 끊임없이 본좌를 괴롭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회복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기만 했어·”
그는 하루하루가 지독한 고통이었다고 말하며 주름진 이마를 부여잡았다·
“거기다 팔까지 잃었으니, 본좌는 초월이되 초월이 아닌 경지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그런 게 아니야·”
사검마가 라온을 바라보며 섬찟한 웃음을 그렸다·
“본좌가 약해졌다고 신주오령의 잡것들이 무시를 해오더구나· 아니! 그놈들만이 아니야· 온 세상이 본좌를 날개가 꺾인 새처럼 취급했다!”
그가 보라색으로 물든 의수를 매만지며 이를 갈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은 알고 있느냐?”
사검마가 시간이 멈춘 듯 아주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힘을 잃은 자의 고통을· 하늘에 섰다가 땅으로 추락한 패자의 고통을 알고 있느냐고!”
그는 키득거리며 가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네놈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검마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본좌는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가 보라색으로 물든 의수를 통째로 어깨에서 뽑아버렸다·
터어어엉!
사검마가 의수를 바닥에 버리자, 초원과 산지를 휘감고 있던 사기의 바다가 거세게 요동치며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욱!
어머니가 아이를 키워내는 양수처럼 사기의 물결이 급격히 응축되며 사검마의 전신을 휘감았다·
‘지금 쳐야 하나?’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잡으며 입술을 씹었다·
-안 되느니라! 저렇게 압축된 사기가 폭발하면 뒤에 있는 놈들은 모두 죽을 것이니라· 네놈 역시 큰 부상을 입을 테고·
라스는 지금의 사검마는 화약고나 다를 바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켜볼 수밖에 없나?’
라온이 혀를 차며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끌어 올릴 때였다·
뿌드드득!
사검마의 어깨 위에서 보라색 살로 이루어진 새로운 팔이 돋아났다· 트롤 같은 재생력의 느낌이 아니다· 슬라임처럼 아예 새로운 몸이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다만 놈의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후우우우·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허옇게 센 사검마의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물들고, 회색으로 주름진 피부가 탄탄하게 조여들며 탄력을 갖췄다·
100살에 가까워 보이던 노인이 단 한 순간에 20대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쿠오오오오오!
사검마가 새롭게 돋아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자, 거대한 파동이 일어나며 그가 선 강바닥이 반으로 쪼개졌다· 무시무시한 힘의 발현이었다·
“그래· 이 힘이다· 본좌는 대륙을 호령하던 그 시절로 돌아아고 싶었느니라·”
그는 새로운 손으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가리며 음습한 미소를 그렸다·
“아니, 돌아갔다가 아니로구나· 다시 살아났다고 해야겠지·”
“····”
라온은 사검마의 보라색 팔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뭐야 저건····’
사검마가 젊어진 것보다, 새로운 팔이 돋아난 것보다도 저 팔에 깃들어 있는 사기의 양이 경악스러웠다·
초원을 모조리 뒤덮었던 사기의 바다 전체가 저 팔에 스며든 것 같았다·
“너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
라온이 웃음을 머금은 사검마를 보며 눈썹을 내렸다·
‘이건 정상적인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인간에게 새로운 팔이 자라나는 건 불가능하다· 사검마는 이곳의 사기를 이용하여 사이한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사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언제나 필요한 게 있지·”
사검마가 손가락을 가늘게 휘저었다·
“제물이다·”
“뭐···?”
“이 초원을 뒤덮었던 보라색 바다는 사흑련이 쌓아 올린 많은 것들이 응축된 사기의 정수다· 수많은 이들의 피가 들어가 있지·”
그는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라고 중얼거리며 가는 눈매를 살짝 들어 올렸다·
“피····”
라온은 사검마가 말한 피라는 단어를 되뇌며 마른침을 삼켰다·
‘산 제물이라고 했지····’
일반적으로 피와 땀이 스며들었다고 말하는 건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뜻인데, 사검마가 말한 피는 진짜 인간의 피를 뜻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트레빈은 사기의 바다 속에서 검술을 사용하는 좀비들이 튀어나왔다고 말했다· 하나 씩 맞춰지던 퍼즐이 단숨에 그 형태를 갖췄다·
“너 설마····”
라온이 사검마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수하들을 산 제물로 바친 거냐?”
“그래· 사흑련의 절반이 이 땅에 묻혔다·”
사검마는 자랑스러운 일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게 죽었을 것이다· 죽어서라도 본좌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아주 큰 영광일 테니까·”
그는 보라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내리며 웃었다·
“미친····”
라온이 제천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정신이 나갔어·’
자신의 무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사흑련의 절반을 제물로 바치다니, 사검마 자체가 음습한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큰 선을 넘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수하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라스가 사검마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당장 본왕에게 몸을 넘기거라! 이번에는 팔이 아니라, 저놈의 목을 뽑아버릴 테니까!
녀석은 진심으로 분노를 하며 앞뒤로 주먹을 흔들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사검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길쭉한 웃음을 흘렸다·
“본좌가 이 모습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무인의 오러가 필요했다·”
“무인의 오러?”
“그래· 사기는 충분했지만, 오러를 얻기는 쉽지 않았어· 그래서····”
그가 사기를 밀어냈던 만화공의 불길을 보며 턱을 주억였다·
“이 계획을 짰지· 너희들의 몬스터를 잡거나, 사기를 밀어내며 소모한 오러를 본좌가 얻을 수 있도록·”
사검마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며 작게 박수를 쳤다·
“사실 시간이 꽤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와준 덕분에 아주 빠르게 끝낼 수 있었어· 그놈의 말대로 이곳에서 일을 벌이길 잘했군·”
그는 완벽한 계획이었다며 자화자찬을 벌였다·
“그놈? 그건 누구지?”
사검마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 일은 저놈 혼자서 벌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잖느냐·”
사검마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이 상해보이는 것을 보니, 오마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신주오령이 결국 오마쪽으로 넘어간 건가?’
아니, 아까 무시당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확실하지는 않아·
이번 일은 신주오령이 아니라, 사검마와 사흑련이 단독으로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본좌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다· 사실 처음 만나는 놈들을 살려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사검마가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 지그하르트· 너는 그냥 보낼 수가 없겠구나·”
“네게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
라온이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너는 없지만, 나는 있다·”
사검마가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너는 마왕의 등장 덕분에 살아남았고, 나는 마왕의 등장 때문에 절망에 빠졌으니까·”
그가 검병을 잡으며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 이후로 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고, 네놈은 끝도 없이 솟아올랐지· 광룡 카이바르를 잡아서 용살자라는 이명을 얻고, 부왕 로만을 꺾어서 찬탈자라는 이명을 새기고, 남북맹과의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이뤄낸 업적을 하나씩 밝히며 손가락을 접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네놈의 이름이 불리지만, 본좌의 이름은 세상 어디에서도 불리지 않았다· 이미 사라진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불리지 않는 이명과 이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지·”
사검마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열등감이라는 단어가 비치는 것 같았다·
“네놈이 초월에 신시대의 초월자라 불리며 구시대의 말석인 나를 꺾는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더구나· 그래서 다짐했지· 다음에 네놈을 만나면 그 목을 따서 신시대인지 뭔지를 끝내주겠다고·”
그는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다며 키득거렸다·
젊은 외모에서 노인의 음성과 말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대주님!”
“조,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괜찮아···?”
사검마가 일으킨 폭발에 밀려났던 버렌, 마르타, 루난이 다가왔다·
“라온!”
“대주님! 괜찮으십니까?”
“사기의 바다가 사라졌는데, 왜 더 지독한 악취가 나는 거지?”
트레빈과 다른 검사들도 자신을 걱정하며 달려와 주었다·
“모두 물러나·”
라온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며 손을 저을 때 사검마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시작해 보자· 구시대의 초월자가 신시대의 초월자를 짓밟는 싸움을·”
사검마의 뇌까림과 함께 눈앞으로 보라색 참격이 밀려왔다· 그가 찰나의 순간에 쏘아낸 사기의 물결이었다·
쩌어어어어엉!
염해무결을 펼쳐서 밀려드는 사기의 물결을 갈랐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라온이 광풍대와 철전대에게 끝까지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였다·
치이이이잉!
보랏빛으로 물든 강바닥에서 섬광과도 같은 검의 형상이 솟아올랐다·
쩌저저저정!
제천검으로 다 막기 힘들어서 진혼검까지 뽑아서 자신을 꿰뚫으려고 하는 사기의 검을 쳐냈다·
‘무겁군·’
솟아오르는 사기의 검 하나하나가 초월의 검격이었기에 막는 것만으로도 손아귀가 떨렸다·
“사기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젊은 시절로 돌아가니, 이런 힘을 낼 수가 있었군·”
사검마는 본인의 무력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네가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구나·”
그가 거만한 턱짓을 하고서 검을 그어내렸다·
“이제 시작이거든·”
사검마의 검을 지나간 공간이 길게 갈라지고, 그 안에서 보라색 눈동자를 번뜩이는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저게 무슨····’
라온은 당황한 감정을 내리누르며 쏟아지는 사기의 괴수들을 제천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들은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며 검게 물든 이빨을 드러냈다·
진짜 괴수가 아니라, 사기로 이루어진 검격인 것 같았다·
후우우우욱!
만화공 화령을 펼쳤지만, 모든 괴수들을 막지 못하고, 허리를 가늘게 물어뜯겼다· 찢어진 상처가 썩어가는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이게 본좌의 마경이다·”
사검마가 사선으로 검을 휘두르자, 이전보다 더 짙은 사기의 휘감은 괴수들이 쏟아져 나와서 자신과 광풍대를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너희들이 이 세계에서 보게 될 마지막 광경이지·”
* * *
쿠구구구구!
사검마는 라온을 연달아 몰아치며 흥에 겨운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 힘이 필요했어!’
젊어진 육체에서는 활력이 넘치고, 사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적· 멀고도 멀다고 생각했던 그 단어가 자신의 무력에 깃든 것 같았다·
쿠와아아아아아!
사기의 검을 내리친 것만으로 대지가 뜯겨나가고, 라온이 휘청거리며 밀려난다·
저 젊은 초월자를 힘과 속도에서 압도하고 있다는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고작 그 정도였나? 그 정도로 본좌를 넘본다고?”
사검마가 공간을 베어내 사기로 탄생시킨 마물들을 소환했다· 검격이자, 소환술· 평범한 오러로는 절대 벨 수 없는 기예였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현묘한 보법을 밟으며 사기의 마물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며 계속 밀려나기만 했다·
‘아예 손도 못 쓰는군·’
자신을 꺾는다는 소리를 듣던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밀려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참기 힘든 희열이 몰려왔다·
놈의 목을 들고 가서 온세상 자신의 건제함을 알리고 싶었다·
‘그 마왕 놈에게도 복수를··· 윽!’
자신에게 굴욕과 절망을 주었던 푸른 마왕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놈을 생각하자, 그 고고한 푸른 눈동자가 떠오른다· 지금의 힘으로도 놈을 넘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니· 지금은 라온 지그하르트만 생각하자·’
푸른 마왕에 대한 건 이후에 생각하자고 다짐하고서 사기로 타오르는 검을 내리쳤다·
쿠구구구구!
음습한 사기가 폭발하며 라온이 서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끝이다·’
사기의 마물도 제대로 피하지 못한 라온이 지금의 검격을 막아내는 건 무리다·
놈은 오직 목만 남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제는 나를 무시한 신주오령 놈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에게도 약속만····’
사검마가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쿠우우웅!
천지가 출렁이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사기의 파도 속에서 붉고 푸른 섬광이 솟아올랐다·
촤아아아아아악!
사기의 파도의 절반을 황금빛 불꽃에 타오르며 가라앉고, 나머지 절반은 은빛 냉기에 얼어붙은 채 바스러졌다·
불꽃의 신검과 서리의 마검 사이에서 선명이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
사검마는 라온의 적안을 보며, 본인의 팔을 뜯어냈던 푸른 마왕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색은 너무나도 달랐지만, 고고한 눈빛 어려 있는 패왕의 위상은 똑같이 닮아 있었다·
“이제는 싸워도 되겠군·”
라온은 멀리 물러난 광풍대와 철전대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네놈 나를····”
사검마는 라온이 다른 검사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떨었다·
“가주님께서는 아직 무리라고 하셨지만, 오늘 넘어보는 것도 좋겠지·”
라온이 화염으로 타오르는 신검과 서리로 번뜩이는 마검을 세운 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신주오령의 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