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1화
라온은 보라색 파도에 뒤덮인 초원을 바라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보드리 마을이 있는 이 지역은 본래 넓은 초원과 산지가 섞여 있는 곳이다· 대륙 중부처럼 비옥한 땅은 아니지만, 가축을 먹일 정도의 풀은 충분했는데, 지금은 보라색 물결 때문에 잡초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기····’
하지만 단순한 사기는 아니야·
사기란 죽은 자의 원한을 응집시킨 힘이다· 사령술사들과 싸우며 강한 사기들을 접해보았지만, 지금 초원을 뒤덮은 기운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콰아아아아아!
문제는 땅을 뒤덮은 사기만이 아니다· 저 추악한 보라색 물결 속에서 괴기스러운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우우웅·
진혼검도 보라색 사기에서 음험함을 느꼈는지 조심하라는 듯한 검명을 울려주었다·
-고약하구나·
라스가 대지를 굽어보며 혀를 찼다·
-한두 명의 죽음으로는 저런 악취가 나오지 않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희생당한 것 같구나·
녀석은 누구인지는 몰라도 끔찍한 놈이라며 미간을 구겼다·
‘그렇겠지·’
라온은 출렁이는 보라색 물결을 보며 짤막한 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커지고 있으니까·’
보라색 바다는 그 자리에서 출렁이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며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안 내려가고 왜 가만히 있어? 너도 지친··· 어?”
마르타가 라온을 놀리려다가 산 아래를 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저게!”
그녀는 대지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보랏빛 물결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보라색 연기? 아니, 기운인가? 뭐, 저런 것이····”
버렌 역시 눈으로 보이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더러운 냄새가 나····”
루난은 벌써 사기의 악취를 맡은 듯 손가락으로 코를 부여잡은 채 눈매를 찌푸렸다·
“끄으읍····”
도리안이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며 숨을 꺽꺽 들이켰다·
“저, 저게 뭐죠?”
그는 어둑하게 번뜩이는 보라색 물결을 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죽은 자의 원한을 응집시켜서 만들어진 사기다·”
라온이 손가락을 튕겨서 광풍대 검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사기에 노출되면 육체가 썩고, 정신이 검게 오염된다· 전신에 마나를 둘러서 대비하도록·”
광풍대에게 호흡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서 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오른 산의 초입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보드리 마을 사람들인가·’
생각보다 많군·
본래 보드리 마을은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는데, 영주나, 도시의 패악질에 질린 사람들이 모여서 준도시급으로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철전대는 앞에 있군·’
철전대 검사들은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보라색 물결 앞에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트레빈····’
철전대의 선두에 서서 강대한 검격을 내리치는 금발의 중년인이 보였다· 트레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몬스터들을 밀어냈다·
‘상태가 좋지는 않군·’
트레빈은 남북맹과의 전쟁 이후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지만, 사기에 노출된 상태에서 계속 싸워왔기 때문인지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떨고 있었다· 많이 지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힘이 빠진 상태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철전대와 보드리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크 괴튼은 내려가서 사람들을 돕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광풍대· 전력을 다해서 철전대의 앞에 서도록·”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광풍대에게 돌격 지시를 내렸다·
“예!”
광풍대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서 차갑게 굳은 대지를 박찼다· 그들은 처음 여정을 떠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고오오오오·
라온은 광풍대의 뒤를 쫓으며 사방으로 기감을 뿌렸다·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는군·’
자신의 감각에 잡히지 않는 것을 사령술사가 없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당한 게 있기에 방심을 풀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며 보법을 밟았다·
-하아····
라스는 물결치는 보라색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저녁은 나딘빵이겠군·
‘저녁만일까?’
라온이 초원을 가득 채운 보라색 바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
‘아마 내일은 물론이고, 모레까지는 나딘빵일걸·’
-이런 빌어먹을!
라스가 콧잔등을 확 구겼다·
-저 지랄을 벌인 놈 나오라고 해! 본왕이 잡아 줄 것이니라!
녀석은 마왕이라고 해도 때려잡아 주겠다며 주먹을 쥔 손을 흔들었다·
* * *
“허억····”
트레빈은 사기의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부패된 웨어 울프의 목을 베고서 탁한 숨을 내뱉었다·
“끝이 없군·”
눈앞에서 출렁이는 보라색 바다는 본래 개울보다도 작았다·
하지만 자신과 철전대가 잡았던 몬스터의 시체를 집어삼키며 불어나더니, 마을 사람까지 먹어 치우고서 지금처럼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커져 버렸다·
물결이 늘어난 만큼 저 안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도 많아져서 쉴 새 없이 싸워도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대, 대주님! 우측 전선이 밀립니다!”
철전대 검사가 부패된 오우거의 주먹을 막으며 어금니를 씹었다·
“좌측도 이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좌측에 있던 검사 역시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떨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버텨! 죽어도 버텨라!”
트레빈이 호흡을 짧게 들이키고서 보라색 물결 속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그가 뻗어낸 검신 위로 피어난 강환이 사선으로 회전하며 강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와아아아아!
완전하지 않다고 해도 강환은 강환이었기에 몬스터들이 모조리 찢겨나가고, 보라색 파도가 크게 휘청였다·
후우우우우·
하지만 언제 충격을 받았냐는 듯 보라색 바다는 다시 빈 공간을 채우고 자신과 철전대를 향해 밀려왔다·
“곧 지원이 올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트레빈은 참으라고 말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들겠지·’
저 사기의 파도는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부패된 몬스터들이 죽으며 뿜어내는 시독도 있었기에 수련이 얕은 검사들은 힘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보드리 마을 사람들이 전부 대비하지 못했기에 힘들다고 해도 이 전선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밀려나면 주민들은 모두 죽는다! 끝까지 버텨!”
트레빈은 사기가 섞인 숨을 들이켜면서도 연달아 강환을 쏘아내 지친 검사들을 지원해 주었다·
“거, 검사님· 저희는 괜찮으니····”
머리가 허옇게 물든 노인이 물에 젖은 천으로 입을 막은 채 다가왔다· 처음 도움을 요청했던 보드리 마을의 촌장이었다·
“이만 떠나십시오· 제가 괜히 검사님을 불러서····”
촌장은 정말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사기에 노출당해서 뺨과 귀가 썩어가고 있음에도 미안하다며 턱을 떨었다·
“그런 말씀 마시오!”
트레빈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 검사로서 이런 일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소· 만약 댁들을 놓고 도망쳤다가는 곧 찾아올 그 친구가 아주 호통을 칠 것이오!”
그는 촌장에게 물러나 있으라고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라온이라면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여 광풍전에 들어가지 않겠냐는 카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진정한 의와 협을 가슴에 품고 있는 라온의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콰아아아아아!
라온을 떠올리니, 조금이지만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다· 검극 위로 강환을 일으켜 눈앞으로 다가오는 보라색 파도를 밀어냈다·
후우우욱!
밀려났던 보라색 물결이 크게 출렁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았을 때 꽤 강한 몬스터가 나올 징조였다·
“어···?”
트레빈이 사기의 파도 속에서 나온 존재를 보고 헛바람을 흘렸다·
‘사람?’
이번에 나온 건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좀비처럼 피부가 창백했고, 생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트레빈이 눈매를 찌푸릴 때 검사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캬아아앙!
막기는 했지만, 저 검사 좀비는 사기를 오러처럼 다루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뿜어내는 사기가 강해서 다른 검사들을 싸우기 힘들 것 같았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겠어·’
다른 검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검사 좀비의 머리통을 아예 깨부숴버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보라색 바닷속에서는 끝없이 부패한 몬스터와 검사 좀비들을 쏟아냈다·
“끄어억····”
우측에서 싸우던 어린 철전대 검사가 안색을 새까맣게 물들은 채 쓰러졌다·
“수, 숨이 안 쉬어져····”
“젠장!”
“대주님····”
다른 검사들도 사기와 시독에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검을 떨구고 무릎을 꿇었다·
“비, 빌어먹을!”
“아아악!”
아직 버틸 수 있는 검사들도 쓰러진 이들을 보호하려다가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철전대가 간신히 버텨내던 전선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대주! 여기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일단 물러나야 합니다!”
철전대 부대주인 카망이 검사 좀비의 목을 베어내며 비명 같은 외침을 질렀다·
“후퇴····”
트레빈이 후퇴를 말하려는 순간 사기의 파도가 크게 요동치며 부상을 당하고, 쓰러진 철전대 검사들을 덮쳤다·
‘아····’
트레빈이 사기를 막기 위해서 검을 뻗어내려고 했지만, 모든 곳을 막을 수는 없었다· 먼저 손을 뻗은 좌측 대신 우측의 검사들이 파도에 먹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제 와서 우측으로 손을 뻗는다면 좌측의 검사들이 죽게 될 테니까·
‘빌어먹을!’
저들의 주마등이 대신 보이는 듯 자신의 눈앞으로 수하들과 쌓아 올린 그간의 일들이 떠오른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끄으윽!”
트레빈이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절규를 터트릴 때였다·
콰아아아아아!
까뭇한 밤이 갈라지고, 혜성의 꼬리를 그린 듯한 붉은 선이 그려진다· 새빨간 불길을 머금은 칼날이 철전대를 덮치려던 보라색 파도를 갈랐다·
쿠구구구구!
적색 불꽃은 사기의 파도를 밀어내고도 힘이 남은 듯 그 안에서 튀어나오려던 몬스터까지 불태워버렸다·
“저 검은····”
트레빈은 사기의 바다를 밀어내는 불꽃의 검을 보고서 구겨진 얼굴에 미소를 드러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기다리던 그 이름을 외쳤다·
“라온!”
* * *
“오랜만입니다· 철전대주님·”
라온이 트레빈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헌데 이런 사기도 해결 못 해서 가문에 지원을 요청하시다니, 실망이네요·”
트레빈이 아리안 가문에 지원을 와주었을 때 했던 말을 돌려주며 가늘게 웃었다·
“그, 그게 아니라····”
트레빈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일단 정리부터 하죠·”
라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검은 하늘 위로 찬란한 빛들이 번쩍였다·
쿠와아아아아아!
광풍진을 세운 광풍대 검사들이다· 그들이 한 호흡으로 펼쳐낸 검격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면 보라색 바다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와 검사 좀비들을 모조리 터트려 버렸다·
하지만 보라색 바다는 아주 잠시 멈췄을 뿐 다시 꿈틀거리며 이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지독하군·”
산 위에서 볼 때보다 사기의 농도가 진하다· 철전대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저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출렁이는 보라색 바다 속에 지독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오러를 이용해서 공격해도 소용없다· 정말 물을 베는 것처럼 금세 다시 차오르니까·”
트레빈은 강환을 쏘아내도 저 보라색 바다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게 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고는 들었는데, 사기까지 터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라온은 왜 이 부분을 말하지 않았냐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 지원 요청을 보낼 때는 이 정도의 사기가 아니었다·”
트레빈이 일렁거리는 보라색 물결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처음에는 작은 개울 정도의 크기에서 고블린 같은 놈들이나 나왔지· 하지만 그 개울이 점점 불어나더니· 어느새 이 정도 크기가 되어서 우리를 에워쌌다·”
그는 검게 죽어가는 땅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다른 도시의 패악에 도망쳐서 이곳까지 온 이들이다· 삶의 터전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어····”
트레빈은 본인의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하며 말아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되찾아 주면 되죠·”
라온이 가늘게 웃으며 제천검을 돌렸다·
“뭐···?”
“새로운 수하가 원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습니다·”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 이건 내 고집이었어! 너까지 힘을 뺄 필요는 없다!”
트레빈은 일단 물러나자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봐야 의미 없어요·”
마르타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 녀석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거든·”
그녀는 포기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입니다· 한다고 말하면 하는 사람이라·”
버렌은 놔두는 게 좋다며 고개를 저었다·
“환영····”
루난은 잘 왔다고 말하며 트레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너희들····”
트레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제 발로 지옥에 찾아온 걸 환영합니다·”
크레인은 눈 밑이 시꺼멓게 물든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크 괴튼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주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니까·”
그가 손가락을 들어서 앞을 가리켰다·
쿠와아아아아아아!
제천검의 새하얀 칼날에서 뻗어나간 열염의 빛이 초원을 집어삼킨 보라색 바다의 절반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