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화
152.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2
KBC <뮤직 스테이지>에 출연하는 체리블라썸의 대기실.
혹시라도 장은영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라도 할까 걱정돼 오늘 하루 체리블라썸의 매니저를 자청했다.
체리블라썸은 이미 리허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나갔기에 현재 대기실에는 나와 한명호 팀장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두 명만 남아 있다.
체리블라썸이 리허설을 마치길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여전히 스캔들이 터지는 일정은 그대로다.
예상했던 대로 장은영은 자신의 비밀 계정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자기 위치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계정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건지.
그때였다.
쾅!
요란한 소음과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정윤호! 어디 있어?”
가수 1실의 차상진 실장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씩씩거리며 날 찾았다.
“너 인마! 감히 우리 은영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한명호 팀장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비켜! 내가 오늘 저 새X랑 끝장을 보고야 말 테니까!”
“은영이 문제 때문에 이러시는 거라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저희도 입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닙니다.”
“야! 한 팀장. 은영이가 저 새X한테 협박당한 거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뭐 뭐라고?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물렁하기만 했던 한명호 팀장이 생각 외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3년간 온갖 고생을 함께 해 왔던 체리블라썸의 멤버들이 협박을 당했다는 걸 듣고는 눈이 돌아가 버렸다.
덕분에 차상진 실장의 꼴만 우습게 된 셈이다.
“돼 됐고 너랑은 할 말 없으니까 비켜. 내가 오늘 윤호 저놈 콩밥 먹이고 말 테니까.”
차상진 실장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신고해 보세요.”
“뭐?”
“신고하든지 고소하든지 원하는 대로 해 보시라고요.”
“너 지금 뭐랬어?”
“대신 은영이가 한 짓은 장문기 기자한테 불어버릴 겁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시는가 본데 참 재미있는 내용이 실릴 겁니다.”
차상진 실장의 표정이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너······. 지금 본부장님이 오냐오냐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예. 은영이 때문에 지금 뵈는 게 없네요.”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차상진 실장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해댔다.
“이 이번 일.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 이사님한테 다 보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막말로 내가 뭘 어쨌다고?
박현우 측에서 고소해 온다면 모를까 장은영이라니.
가소롭지도 않다.
내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결국 차상진 실장은 아무것도 못 한 채 몸을 돌렸다.
쾅!
요란한 소음과 함께 대기실의 문이 닫히자 한명호 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괜찮겠냐? 이기철 이사가 널 자르겠다고도 나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싱긋 웃으며 답했다.
“어디 한번 해 보라죠. 해고라도 당하면 다 터트려 버리고 부당해고로 노동청에 신고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꼬리 안 밟히게 골든로드가 한 짓도 제보하죠 뭐.”
“그래? 그럼 나도 그래야겠네.”
한명호 팀장이 뜻을 같이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리허설을 마친 체리블라썸이 돌아왔다.
그런데 우연희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연희야? 왜 그래?”
우연희는 이주영 대리의 부축을 받으며 한 발을 들고 깨금발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뭘 아냐? 어디 봐 봐.”
우연희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세리가 고자질했다.
“윤호 오빠! 언니 리허설하다가 넘어졌어요!”
“뭐?”
우연희가 뭘 그런 걸 말하냐 타박했지만 이주영 대리에게 들어보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조금 전 무대에서 춤을 추던 도중 신발 끈이 끊어지며 발목을 접질렸다면서.
잠깐만.
에나멜 소재로 된 붉은 하이힐의 고리가 끊어져?
고래 심줄보다 질겨서 어지간해서는 끊어질 리가 없는 신발인데?
“신발 어디 있어?”
은아가 신발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요.”
신발을 받아서 자세히 보자 고리 부분이 쩍 하고 벌어져 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마치 예리한 것에 베인 듯한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자국에는 투명한 목공용 풀의 흔적이 보였고.
그렇다면 이건 누군가 고의로 잘라놓은 다음 다시 붙인 게 확실했다.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두 명의 스타일리스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낀 박이윤과 이은향이 동시에 사과를 해왔다.
“정 대리. 미안. 제대로 확인을 하고 협찬을 받아 와야 했는데.”
“죄송해요. 정 대리님!”
당장이라도 닦달해 범인을 밝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연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박이윤과 이은향의 사과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우연희에게로 다가갔다.
“연희야. 다리 좀 확인하게 소파로 가자.”
“아. 네.”
일어서려는 우연희를 막았다.
“그대로 있어. 들어서 옮길 거니까 내 목을 잡아.”
“걸을 수 있어요.”
“그러다 상태가 더 나빠질지도 모르니까 내 말 들어. 자 그럼 옮긴다?”
우연희의 두 손이 내 목을 잡는 순간 공주님 안기의 형태로 우연희를 달랑 들어 올렸다.
“꺄악!”
지난 8주간의 힘든 스케줄을 소화한 탓인지 그녀의 몸은 너무도 가벼웠다.
우연희를 소파에 내려놓고 접질린 발로 손을 가져갔다.
“오 오빠. 저기······ 양말은 제가 벗을게요.”
우연희가 부끄러워하며 접질린 발목을 손으로 가린다.
“그러다 발목이 더 상할 수 있어. 내가 벗길 테니 가만히 있어.”
“네······”
조심스레 양말을 벗기고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다행히 크게 삔 건 아니었다.
“뼈는 상한 게 아니네. 일단 마사지할 건데 너무 아프면 이야기해?”
“아 알았어요.”
우연희의 허락을 받고 복사뼈 부위를 어루만졌다.
일그러졌던 우연희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그사이 이주영 대리와 한명호 팀장이 밖으로 나가 얼음을 구해왔고 난 타월과 얼음을 이용해 간이 팩을 만들었다.
차가운 얼음 팩이 닿자 우연희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한명호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무대를 취소하고 병원이라도 갈까?”
“아뇨. 지금은 제가 마사지를 해주는 게 나을 겁니다. 병원 갔다가 오는 동안 더 나빠질 수 있거든요.”
운동선수 출신인 이주영 대리가 내 말에 공감했다.
“정 대리 말이 맞아요. 염좌류의 부상에는 찜질이랑 스포츠 마사지가 최고예요.”
“후우. 그런데 오늘 무대에는 설 수 있을까?”
발목 염좌는 보통은 전치 2주짜리 부상이다.
하지만 8주 연속 1위란 기록을 앞에 둔 탓에 다들 포기하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난 임시방편을 꺼내 들었다.
“일단 발목에 테이핑해서 내보내면 억지로나마 무대를 소화할 수는 있을 겁니다.”
순간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무대가 끝나는 대로 바로 병원 데려가서 상태를 보죠. 제가 이런 부상을 잘 치료하는 병원을 압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그와 동시에 찜질과 마사지를 번갈아 해주며 붓기를 최대한 가라앉혔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 본 방송에 나갈 시간이 찾아왔다.
난 이주영 대리에게 가방에 있는 테이프와 가위를 꺼내 달라 말했다.
격렬한 댄스를 추는 아이돌은 운동선수만큼이나 부상을 자주 겪는다.
그 탓에 난 스포츠 젤과 함께 운동선수들이나 사용하는 테이프를 늘 가지고 다녔다.
이주영 대리가 꺼낸 테이프를 받아 들고 발목 관절을 지지해주는 테이핑을 마쳤다.
“연희야. 발목 한번 돌려볼래?”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우연희가 발목을 슬쩍 까닥거린다.
“어?”
“어때? 안 아프지?”
우연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와 신기하네. 근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안 아프죠?”
“테이프가 보조 근육 역할을 하거든. 하지만 진짜 나은 건 아니니까 조심해.”
“알겠어요.”
우연희가 일어서려고 하자 이주영 대리가 등을 내밀었다.
“업혀.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다리 쓰지 마.”
“언니 죄송해요.”
“죄송은.”
이주영 대리는 무대를 마치면 업고 오겠다며 약속했다.
“이왕이면 한 팀장님도 좀 도와주십시오. 최대한 발목을 안 움직이게 해야 하니까요.”
“알았다.”
한명호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부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이 사라져야 구두에 손을 댄 범인을 찾을 수가 있었으니까.
* * *
무대에 나가려는 체리블라썸 멤버들 모두의 신발을 스카치테이프로 돌돌 감아 혹시 있을 사고를 방지했다.
이주영 대리는 우연희를 업었고 한명호 팀장이 나머지 멤버들을 인솔하며 대기실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그래. 수고.”
대기실에 남은 스타일리스트 두 명이 내 눈치를 본다.
경력 4년 차 박이윤은 얼마 전까지 골든로드를 담당했고 이은향은 이제 막 경력 3개월의 인턴.
그 탓에 박이윤이 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랬습니까?”
내 질문에 두 사람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정 대리. 설마 지금 우릴 의심하는 거야?”
역시나 먼저 반응한 쪽은 한 달 전까지 골든로드를 담당했던 박이윤이다.
그러나 내가 진짜 의심하는 건 바로 이은향이었다.
회귀 전 이은향은 탑 엔터테인먼트에서 모든 스타일리스트를 총괄하던 김동수 계열의 인사였다.
디자이너들과의 관계도 좋고 영어도 되는 데다 해외 패션쇼를 돌며 의상을 찍어오는 순발력도 좋아 연예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하곤 했고.
비록 서예종 출신은 아니지만 유능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김동수의 성향 탓에 꽤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게 된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은향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책임자인 박이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박이윤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정 대리. 설마 우리가 저질렀다고 의심하는 거야? 연희 다친 건 나도 속이 쓰린데 가끔 협찬받는 제품 중에 하자가 있어서 줄이 끊어지기도 하곤 해.”
난 끊어진 우연희의 신발을 들어 올려 한번 칼을 댔다가 재접합한 하이힐 고리를 박이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박 선배가 볼 때 이게 하자로 끊어진 것처럼 보이세요?”
날카롭게 잘린 부위를 본 박이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니. 이건······.”
역시 박이윤은 아니다.
그녀는 속내를 잘 숨기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난 연거푸 질문을 이어갔다.
“이 제품. 박 선배가 받아오셨어요?”
“아 아냐! 오늘은 내가 늦게 출근해서 여기 은향이가 받아왔어! 잠깐만. 설마?”
순간 박이윤의 눈이 이은향에게로 향했다.
이은향이 놀란 척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아 아니에요. 저 저 같은 일개 인턴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요?”
벌벌 떠는 모습이 가증스러울 정도다.
“은향 씨. 말할 거면 지금 말하세요. 아니면 이거 바로 경찰에 넘길 겁니다.”
“아니 아니에요······ 전.”
당황한 이은향이 주저주저한다.
설마 인턴인 자신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바로 지적할지는 몰랐나 보다.
나 역시 회귀하지 않았으면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이 업계의 인턴들에겐 보통은 그 정도 깡은 없으니까.
“CCTV 돌리면 다 나오니까 좋은 말 할 때 불어요. 아니면 지금 당장 경찰 부릅니다.”
폰을 꺼내 112를 눌러 놓고는 이은향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여차하면 통화 버튼을 누를 거라고.
이은향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그러니까······”
‘조금만 압박하면 되겠네.’
회귀 전에 악독했던 이은향에 비하면 현재의 이은향은 너무도 손쉬운 상대였다.
그때였다.
찰싹!
왼손에 하이힐을 든 박이윤이 전력을 다해 이은향의 귀싸대기를 날려버렸다.
“꺄아악!”
박이윤이 바닥에 쓰러진 이은향을 향해 길길이 날뛰었다.
“감히 협찬받은 신발에 손을 대?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쉴새 없이 쏟아지는 욕설에 이은향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빈다.
“서 선배.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죄송하면 당장 말해! 정 대리님이 안 넘기면 내가 널 경찰에 넘겨버릴 테니까!”
서슬 퍼런 박이윤의 말에 이은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가 저지른 짓을 실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