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3화
143. 영원한 1등은 없다 4
에비앙에 오는 동안 강지영 본부장 그리고 구성철 실장에게 미친 듯 전화를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끄응. 이 시간까지 바쁘시네.”
가수 2실과 배우 2실의 규모가 점점 커지다 보니 강지영 본부장과 구성철 실장도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덕에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나 혼자서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에비앙에 도착하자 입구에 있던 정장의 경호원들이 날 막아 세웠다.
“오늘은 예약 손님만 받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기철 이사님 호출받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정윤호라고 합니다.”
경호원들이 마이크를 대고 신원을 확인했다.
무슨 일인지 유독 경비가 삼엄해 보였다.
신원 확인이 끝나자 직원 한 명이 나와 날 이끌었다.
직원 뒤를 따라가던 중 홀이 텅 빈 걸 보며 물었다.
“손님들이 아무도 없네요.”
“예. 오늘 회장님께서 통째로 빌리셨습니다.”
회장?
어떤 회장을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돈지X이다.
에비앙의 하루 매출이 억 단위라던데 그 돈을 낼 바엔 호텔 스위트룸을 잡을 것이지.
“여깁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직원이 VVIP 방문을 열어주자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이 보였다.
이기철 이사 김동수 실장 이상식 대표.
그리고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은 장웨이 회장이다.
모인 사람들을 본 순간.
이 자리는 이기철 이사가 아니라 붉은달의 이상식 대표가 만든 자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기철 이사를 부추겨 나와 유진이를 불러들인 게 틀림없다.
역시 유진이를 안 데리고 오길 잘했다.
장웨이 회장이라면 어떤 짓을 할지도 몰랐으니까.
키 170cm 정도에 몸이 퉁퉁한 장웨이 회장이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혼자 오셨군 그래.”
젊을 때 한국에서 7년간 산 경험이 있기에 장웨이는 한국말을 꽤 능숙하게 할 수 있다.
덕분에 중국의 다른 미디어 그룹보다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고.
장웨이의 목소리에서 실망의 기색을 느꼈는지 이기철 이사가 얼른 거들고 나섰다.
“정 대리. 유진이는?”
“죄송합니다 이사님. 도저히 술자리에 올 컨디션이 아니었습니다.”
룸 안의 사람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장 회장님이 유진이가 출연하는 드라마에 100억을 투자하시기로 한 기념으로 만든 자리니까 어서 불러. 술은 안 마셔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이상식 대표도 날 설득하려 들었다.
“그래. 정 대리. 오늘 이야기만 잘 되면 유진 씨 출연료 협상도 다시 해줄 테니까 일단 불러. 이런 이야기를 전화로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이상식 대표는 절박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그에게 지금 장웨이 회장의 투자금은 그야말로 단비일 테니까.
하지만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밤늦은 시간 술자리에 여배우를 불러냈다가 괜한 구설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내일 날이 밝으면 회사에서 이야기하시죠.”
내 말에 이상식 대표가 발끈하며 소리를 쳤다.
“어허! 이 친구가! 경영진이 지시하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단 대리 주제에 어디서 감히 토를 달아?”
‘내 고용주도 아닌데 당신이 왜 나서서 난리야?’
그 순간 장웨이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사람들을 말렸다.
“됐어. 그만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상식 대표의 사과에 장웨이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유진 씨의 팬이라서 투자하기 전에 사인이나 한 장 받으려고 부탁을 했는데 괜한 소리를 했나 보이. 자자. 여기 앉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건데 오늘은 술이나 실컷 마셔 보자고.”
자주는커녕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하지만 난 속내를 감춘 채 장웨이 회장이 내민 빈 위스키 잔을 들었다.
“제가 술이 좀 약합니다. 그러니 한 잔만 받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김동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회장님이 주시면 고맙게 받는 거지 어디서 건방지게!”
김동수는 굴렁쇠 엔터가 아니라 마치 화연 미디어 그룹의 직원이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배알도 없는 인간 같으니.
장웨이가 손을 들어 김동수를 말렸다.
“괜찮아. 요즘 젊은 친구답게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좋기만 한걸.”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김동수는 강감찬 대표 앞에서보다 몇 배는 더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자네 말대로 한 잔만 하게.”
장웨이의 손에 들린 술은 무려 한 병에 1200만 원이 넘는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인 글렌피딕 40년산이다.
쪼르륵.
장웨이 회장이 따르는 위스키가 내 투명한 글라스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글라스가 가득 찼는데도 장웨이 회장은 술을 따르는 걸 멈추지를 않았다.
위스키가 가득 차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독한 위스키가 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테이블을 적셨다.
‘설마 이 노인네가 자기 기분 상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콸콸콸!
병을 거꾸로 기울이자 남은 술이 거세게 흘러나오며 위스키병 입구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렸다.
1200만 원짜리 글렌피딕 40년산 한 병을 통째로 한 잔에 부어버릴 줄이야.
장웨이가 날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한 잔일세. 어떤가? 이 장웨이는 좁쌀만 한 인간은 아니란 말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기함할 행동이다.
하지만 업계 톱까지 올라가 봤던 나는 가진 자들의 진상이란 진상은 다 겪어봤었다.
겨우 이 정도쯤이야.
난 그의 시선을 받으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득 찬 위스키 잔을 들이켰다.
원샷.
목을 타고 올라오는 독한 위스키의 스모키향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위스키를 탁 털어 마시자 장웨이 회장은 껄껄대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하오! 이 친구 술이 약하다더니. 마실 땐 화통하군. 으하하!”
장웨이 회장은 기가 죽지 않은 내 모습이 재미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제멋대로란 소리다.
곁에서 멍하니 보고 있던 이기철 이사가 정신을 차린 채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저희 정 대리가 뭘 몰라서 회장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장웨이 회장이 고개를 젓는다.
“아냐. 아냐. 오래간만에 재미난 친구를 만났는데 사과는 왜 하는가?”
장웨이 회장은 더는 큰 소리를 내지 말라며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의 이름으로>에 얼마나 투자하고 언제 투자할지 같은 이야기들을 말이다.
하지만 난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투자금이 얼마가 됐건 이지연 작가는 조만간 제작사를 바꿀 테니까.
그런데 장웨이 회장이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봐. 젊은 매니저 친구.”
“예. 회장님.”
“혹시 정유진 양에게 주연을 시켜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당연히 나 역시 유진이를 주연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출연료나 상이나 모두 주연이 가장 우선되니까.
하지만 이지연 작가와 약속이 우선이다.
더군다나 유진이가 맡은 배역은 충분히 빛날 수도 있는 역할이기도 하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장웨이 회장은 손가락 두 개를 추켜 올렸다.
“유진 양이 ‘신의 이름으로’에 주연을 맡고 싶다면 내가 책임지고 200억을 꽂아주지. 대신에 나도 얼굴도 안 보고 꽂아줄 수는 없으니 모레까지 편한 시간 잡아서 보고. 어떤가?”
장웨이 회장은 작전을 바꿔 배역과 돈으로 유혹했다.
그 순간 날 제외한 방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 욕심이 깃들었다.
200억.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벌어도 꿈도 꾸지 못할 돈이다.
그러나 화연 미디어 그룹의 회장인 장웨이에게는 여자 하나의 호감을 사기 위해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돈이었다.
개인 재산만 조 단위가 넘어가고 화연 미디어 그룹의 자산은 수십 조가 넘어가니까.
하지만 난 장웨이 회장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작가님에게 여쭤보고 제 배우에게 의사를 전달한 뒤에나 결정을······”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김동수 실장이 다급히 내 말을 가로막는다.
“회장님. 자 잠깐만 정 대리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시간 좀 주십시오.”
김동수가 장웨이 회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장웨이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이왕이면 좋은 대답이 돌아왔으면 좋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김동수가 날 잡아끌다시피 하며 룸 밖으로 나섰다.
허리를 굽히며 조심스레 문을 닫은 김동수는 날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야 인마!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조건 달지 말고 무조건 한다고 해야지! 유진이는 나중에 설득해도 되잖아! 주연으로 꼽아주는 것도 모자라 200억을 투자해주신다는데!”
김동수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려 200억이란 돈에 김동수의 눈이 탐욕으로 이글대고 있었다.
“실장님. 설마 그 돈이 화대라는 거 모르십니까? 우리가 돈만 주면 여배우를 넙죽 바치는 양아칩니까?”
김동수 실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새X. 말하는 본새하고는. 다 늙은 영감이 젊은 여배우에게 반해서 호기를 부리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냥 모른 척 자리 한번 잡아주고 혹시 허튼짓이라도 하면 튀어나오면 되는 거지! 안 그래?”
“그 술자리가 그냥 술자리로 끝나겠습니까? 그리고 유진이가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 배우를 안 했으면 안 했지 접대 자리는 절대 안 나간다고요!”
“정 대리. 너랑 나랑 사이 안 좋은 거야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인마. 이건 아니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투자자와 술 한잔하는 게 그게 무슨 접대야? 그냥 밥 한 끼 하자는 거나 마찬가진데!”
“하여간 전 반댑니다.”
“아 이게 진짜! 뭐 이런 벽창호 같은 놈이 다 있어!”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씩씩거리는 김동수다.
여차하면 폭력이라도 사용하고 싶겠지만 어차피 싸움으로는 안 되는 걸 알기에 저러는 거겠지만 말이다.
“됐고. 그러면 넌 먼저 가봐라.”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는 게 오히려 의심스러운데?
“인사 안 드리고 가도 됩니까?”
“어차피 안 된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할 텐데 분위기 흐리지 말고 그냥 가라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난 룸 안으로 들어가는 김동수를 보며 에비앙을 나섰다.
김동수가 뒤를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난 내쫓던 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악착같은 독기였으니까.
다시금 강지영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
-정 대리. 무슨 일이에요?
내게서 사정을 들은 강지영 본부장은 즉시 나를 불러들였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집으로 와요. 우리 집 알죠?
“예. 본부장님.”
* * *
강지영 본부장의 집.
난 장웨이 회장의 제안과 이지연 작가가 현재 제작사를 바꾸겠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말했다.
“하긴 200억을 그냥 투자할 리가 없죠.”
“예. 장웨이 회장의 여성 편력이 꽤 심합니다. 지금은 밥 한 끼 술 한잔이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잖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여간 여배우가 조금만 인지도를 얻으면 날파리들이 어찌나 날아드는 건지. 근데 장웨이 회장이 여자 밝히는 거 확실한 정보는 맞죠?”
“예. 중국 쪽에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화연 미디어 그룹 회장이 한국 여배우들을 컬렉팅하는 거로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이건 회귀 전 장웨이의 경쟁자인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사장 왕룽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알았어요. 그 소문이 맞는지는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사실이면 뒤는 제가 직접 커버할게요.”
유진이의 ‘청명’ 역의 출연료는 편당 1000만 원으로 정해져 있다.
<파란 하늘>에서 유진이가 보여준 연기력 덕분에 가능해진 금액.
하지만 200억이란 투자금을 받는다면 편당 1억 정도까지도 부를 수도 있었다.
순전히 유진이 때문에 들어온 투자니까.
유진이와 회사는 수익 배분이 7:3이기에 지금 이 순간 무려 7억에 달하는 수익 분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강지영 본부장이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왜요?”
“대표님은 언제쯤 돌아오실 것 같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빨라도 9월 초는 되어야 할 거 같아요. 미국 쪽은 수술 후 경과와 재활을 엄청 신경 쓰더라고요.”
이기철 이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회복이 덜 된 강감찬 대표를 더 일찍 와달라고 할 순 없다.
“빨리 오셨으면 좋겠네요.”
“고생스럽겠지만 버텨봐야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 테니까 정 대리도 저를 믿고 힘내 주세요.”
“예. 본부장님.”
강감찬 대표가 모든 권한을 이기철 이사에게 일임한 상태라 강지영 본부장도 업무 이야기가 낀 상황에서는 쉽게 관여할 수 없었다.
보고를 마친 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강지영 본부장이 갑작스레 내 팔을 붙잡았다.
“정 대리. 잠깐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