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화
주문연맹주(1)
주문연맹·
중앙전선에서 가장 강성한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대륙 최대의 술사집단·
이 세상의 모든 주문을 엮어 다음으로 향하는 대답을 만들겠다는 비원의 주체·
대연결이라는 비원에 헌신하는 술사들 중에는 레녹조차 경시할 수 없는 천재들이 수두룩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주문과 술식을 연결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비원이 대체 무엇이기에 접합술주 같은 괴물조차 협력하고 있었는지·
마법과 술식의 재능을 타고났기에 레녹 역시 꾸준히 그들을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흥미를 가졌지만-
바로 그 연맹의 수장을 이런 자리에서 마주하게 될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주문연맹의 수장이자 교단과 중앙전선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전쟁의 주인·
헤아릴 수 없는 천재와 술사들의 정상에 올라앉은 우두머리·
그리고 맹주 본인이 직접 기거하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특수한 케이스로 존재하는 유리정원·
‘토르번 마탑주의 말에 한치의 과장도 없었군·’
아름다운 유리정원을 바라보던 레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리 위로 향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향하는 그 눈빛이 일견 복잡하게 흐려졌다·
‘정원 자체가 세계의 경계선과 가장 가까운 장소라고 했던가·’
정원 위로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은 인위적으로 조형한 환상 따위가 아니다·
저것은 말 그대로 별의 바깥에 위치한 외해(外海)를 고스란히 투영하는 풍경·
이 유리정원이 현실과 외해의 경계선에 무엇보다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증거다·
천견같은 승천자조차도 본신으로는 출입하지 못했던 세계의 경계선·
모든 물리법칙과 개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 환경을 이 정원의 주인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구현해냈다는 증거·
쩌저저적···!!!
투명한 유리정원에 피어난 꽃들이 봉오리를 돌려 레녹을 바라본다·
공간이 유리처럼 갈라지면서 균열이 퍼져 나오고 정원을 투명한 광채로 물들였다·
헤아릴 수 없는 아주 거대한 기척이 바로 옆에서 레녹을 깊게 들여다보는 듯하다·
“····”
대상지정 저항을 생각하면 당할 일은 없겠지만 맹주가 자신의 정원에서 레녹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을 생각한 레녹이 맹주를 향해 먼저 말을 걸어 신경을 돌리려던 순간·
“네가 지닌 술식의 내력과 인과를 읽어낼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무언가가 너를 보호하고 있군·”
그림자 너머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채보의 마안이 지닌 분광(分光)의 공능인가·”
“···뭐?”
대상지정 저항이 아니라 칠채보의 마안을 언급하는 맹주의 말·
하지만 맹주는 레녹의 반문에 대꾸하지 않고 기척을 깊게 가라앉혔다·
레녹의 의식을 이 유리정원에 불러두곤 홀로 생각에 빠진 듯한 기묘한 모습·
“····”
그림자 너머 의자에 앉아 있는 맹주를 바라보며 레녹이 의식을 고조시켰다·
‘승천자에 준하는 권능을 갖춘 초월자다· 어쩌면 본인이 승천자일지도 모르지·’
오래전에 에반 바일런의 신분으로 초대를 한번 받은 적이 있지만 정작 레녹도 맹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중앙전선에서 가장 거대한 술사집단을 이끄는 초월자·
맹주 본인 역시 아득하게 높은 경지에 이른 술사이자 괴물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생각하지 못한 술식이나 권능으로 그의 신변을 억류하려 할지도 모르는 일·
상대가 어떤 술식을 사용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만큼 무엇보다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터·
사용하는 계통· 술식의 전조· 이 유리정원은 맹주의 권역인 건지· 이미 승천자에 준하는 위계에 달한 건지·
하지만 맹주는 그런 레녹의 경계어린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토르번 마탑주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지·”
“····”
“사상의 지평을 넘은 번개· 인지와 속도를 역행하는 힘의 주인이라 했던가·”
침묵하는 레녹을 두고 목소리가 한가롭게 말했다·
“그 부주의한 귀족이 한눈을 파는 거야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리 빠른 시일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
‘의념이····’
맹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레녹이 무심코 표정을 찌푸렸다·
그림자 너머에 앉아 있는 맹주의 기척이 생각했던 것과는 굉장히 달랐기 때문·
레녹조차 위압감을 느낄 만큼 압도적이거나 연원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것도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뒤틀림이나 승천에 실패한 것처럼 어긋나고 망가진 것조차도 아니었다·
평범함·
아무런 마력이나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을 그저 눈앞에서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차분한 목소리와 기척· 평탄한 말투와 어조·
이 아름다운 유리정원의 주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맹주 같은 초월자에게서 생각한 적 없던 범상함이 그곳에 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자였군·’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한층 의념을 끌어올려 정신을 단단하게 보호했다·
주면연맹주는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조차도 이의 없이 충성을 바치던 초월자·
맹주가 실제로 아무런 힘을 지니지 않은 존재일 가능성은 없다·
모종의 방식으로 자신의 힘과 기세를 숨겨 레녹조차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
그러한 짓거리를 레녹의 감각을 피해 해낼 수 있다는 것부터 맹주 본인이 초월적인 술사라는 것은 틀림없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함이 오히려 맹주라는 존재를 더욱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위화감·
맹주 본인이 그 위화감을 일부러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레녹이 멋대로 그 간극을 읽어내고 반응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그렇게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림자 안에서 레녹을 바라보던 맹주가 말했다·
마치 레녹의 생각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맹주의 대답·
“나 역시 네가 나의 정원에 이리 쉽게 동조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 따지자면 이 상황에 대한 귀책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있는 거지·”
“····”
“이 순간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각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나 오히려 그만큼 재능 있는 술사라면 손대지 않는다·”
고요한 정원 위로 맹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스스로 만개한 재능이라면 굳이 타인의 손을 거칠 필요도 없이 홀로 아름다운 꽃을 피울 테니·”
그림자 너머로 유리처럼 투명한 손가락이 힐끗 엿보였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투명하고 위태로운 형상·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맹주가 이 정원의 별빛 아래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전부·
“이 정원 자체가 연맹이 수집한 술식을 보관하는 저장고였군·”
레녹이 힐끗 시선을 들어올렸다·
“시귀술주의 일 때문에 내 의식을 정원에 불러서 말을 걸어온 건가?”
맹주는 무엇하나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녹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시귀술주는 헤드로 군벌의 장군급 개체가 지닌 힘을 술식화시켜 추출했고 그것을 유리정원에 올려보냈다·
그것을 바로 옆에서 관측한 레녹의 의식이 동조하고 감응하면서 유리정원의 존재를 감지했고·
정원에 동조한 레녹의 의식을 확인한 맹주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
그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세가지·
세계의 경계선에 가까운 이 유리정원이 주문연맹의 술식을 보관하는 용도로써 이용되고 있다는 것·
시귀술주와 같은 연맹의 간부들은 특정한 공양의식을 통해 정원과 접속할 수 있다는 것·
맹주가 레녹과 접촉해 말을 걸어온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경우라는 것이었다·
“연유가 어떠했든 나의 정원을 감지하고 동조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
레녹의 말에 맹주가 긍정하듯 답했다·
“재능 있는 술사라면 언제고 대연결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만큼 나는 그 꽃을 쉽사리 꺾지 않으려 한다·”
“····”
“시귀술주의 일 역시 그러하지·”
의자에 앉은 맹주가 발치에 피어난 꽃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방울소리와 함께 유리처럼 투명한 꽃잎이 흔들렸다·
“그녀의 재능은 연맹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야· 적어도 시귀(屍鬼)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생소한 현상임은 틀림없지·”
뚜둑···!!
가볍게 손목을 꺾어 꽃의 줄기를 잡아당긴다·
정원의 꽃을 꺾어 든 맹주가 그림자 속에서 그것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꺾여 스러지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지금 내게 시귀술주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설득하는 건가?”
맹주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레녹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일이군· 당신 같은 초월자가 누군가의 생사를 그런 식으로 부탁할 줄은 몰랐는데·”
대연결을 구축하는 접합술주를 죽일 때도 일절 개입하지 않던 맹주가 이제 와서 시귀술주의 생사에 관여하려 한다니·
레녹이 이 유리정원에 동조해왔기에 개입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술주의 생사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는 것뿐인지·
어느 쪽이든 주문연맹을 이끄는 수장의 반응은 레녹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제안으로만 느껴질 뿐·
하지만 맹주는 레녹의 질문을 듣자마자 느릿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들려줄 말을 고르듯이 팔걸이를 두들기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위에 올라타 있지·”
“····”
“나는 대연결의 주체가 아니라 무대를 만들어주는 존재일 뿐·”
맹주가 말했다·
“내 힘을 빌리지 않고 만들어진 기적이기에 내게 있어 그것은 더욱 가치가 있다·”
“대연결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건가?”
“위대한 실패자들 중에서 스스로의 대답을 진실로 바꿔낸 건 오직 두 사람뿐이었지·”
레녹의 질문에 맹주가 답했다·
“구세주의 우연과 신살자의 필연처럼 같음과 다름을 초월한 대답만이 옳고 그름을 넘어설 수 있으니····”
“···그건·”
“그건 애초에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기적인 셈이지·”
차분한 맹주의 목소리에 희미한 냉소가 섞이는 순간·
레녹은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안에 나를 두지 않음으로서 그를 초월하려 한다·”
“····”
알고 있다·
레녹이 만난 모든 초월자들을 통틀어 가장 평범해 보이는 이 자야말로·
교주와 단장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세계에서 무엇보다 믿기 어려운 진실을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고한다·
그것 자체가 맹주 본인이 지닌 초월성의 증거라는 사실을 레녹은 이제서야 깨달았던 것·
“····”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대화에 마음을 놓았었나·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위화감조차도 맹주의 본질을 가리키는 암시일까·
그림자에 가려진 기척은 한없이 투명해서 여전히 그 감정과 외견을 읽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레녹은 여느 때보다 어렵게 평정을 가장하면서 입을 열었다·
“시귀술주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라기에는 지나치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군·”
“····”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건 애초에 술주의 일 때문이 아니겠지·”
시귀술주의 재능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소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맹주는 말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한 맹주는 정원에 피어난 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버렸다·
맹주 자신이 술주의 생사에 미련을 두지 않는 그리고 그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모순된 표현·
그 자체가 단지 맹주 자신이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레녹은 이해했던 것이다·
“시귀술주의 일은 빌미일 뿐· 나를 통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하고 있군·”
레녹이 맹주를 날카롭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정원에 동조한 내 의식에 말을 건 것부터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기준을 충족하는 존재인지를 확인하려 했었지·”
맹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도살해자의 이명을 얻은 이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호전적이라 중대한 사안을 논의할 상대는 아니었으니·”
“····”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평정심은 인정할 만하군· 그건 네 술식소양과는 별개의 재능이니 이쯤이면 이야기를 해도 되겠어·”
의자 뒤켠에서 맹주가 몸을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정원의 밤하늘을 바라보던 맹주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만간 연맹에서 대연결의 새로운 재구축을 시작할 거다·”
“대연결의 구축이라고?”
“채프먼이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대술주의 자리를 새로운 후보로 채우는 과정이지·”
맹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기 대술주의 후보는 정해졌고 남은 건 대연결에 정식으로 술식을 연결하는 의식 뿐이다·”
“····”
들어본 적이 있다·
첫 번째 관문에서 접합술주를 쓰러뜨린 직후 그의 입을 통해 전해들었던 대연결의 재구축·
차기 대술주를 지정하고 그 술식에 맞게 대연결을 새롭게 조정하는 거대한 과정의 일부라고 했었던가·
접합술주가 남긴 말과 맹주의 설명을 대조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맹주가 이어서 말했다·
“대연결의 재구축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연맹의 골치 아픈 숙적을 하나 제거할 생각이다·”
“····”
“나는 그 순간을 도와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억제력을 찾고 있지·”
그제서야 맹주가 하는 말을 이해한 레녹이 팔짱을 꼈다·
“연맹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술사전력을 원하는 거였군·”
“너 같은 술사의 시간을 사는데 천금의 보화로도 부족하다는 걸 안다·”
맹주가 말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지·”
“····”
다른 사람도 아닌 주문연맹의 맹주가 하는 말이기에 마냥 헛소리로 들리지는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 대가든 그가 말하는 계획의 리스크든 어지간한 범주를 크게 뛰어넘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맹주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수락하는 것을 넘어서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의문이 있었다·
“주문연맹의 전력을 감안하면 외부인의 힘을 빌려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레녹이 물었다·
“누구를 상대할 생각이기에 당신이 직접 공을 들이는 거지?”
“연맹이 교단과 휴전과 재전을 반복한지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
맹주가 답했다·
“사도들을 필두로 하는 전면전은 감당할 수 있으나 평범한 이치로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교단에 있다·”
“···설마·”
“교주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필두사도·”
레녹의 안색이 살짝 변한 찰나 맹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2사도를 사도의 좌에서 끌어내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