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준동자 (1)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연쇄살인마를 본 적이 있습니까?
***
서기 9년. 10월 31일.
낙엽이 흩날리는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교정을 한 소녀가 걷고 있었다.
웨나 위저드.
극악 사탄을 죽인 장본인이자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였다.
키는 170센티미터, 펌을 먹인 금발 머리가 어깨에서 갈라져 흘러내렸다.
단정한 외모와 눈빛만이 10년 전 어릴 때의 모습을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벌써 바람이 차네.”
최후의 전쟁이 끝난 이후, 시로네는 위저드에게 마법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7살의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삶이라는 판단이었다.
위저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구나.’
졸업반 서열 1위인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다음 달에 있을 졸업 시험뿐.
당연히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선상에서 경쟁을 치를 테지만, 그녀가 졸업 시험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저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인 사사였다.
“뭐가 그렇게 급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위저드와 달리 사사는 서운한 표정이었다.
“말도 없이 훈련에 불참하면 어떡해? 그것도 오늘 대인 전투 평가인데.”
오늘 위저드의 상대는 22살의 니콜라이로 졸업반 서열 3위의 강자였다.
“알잖아, 남학생들하고는 잘 안 싸우는 거. 특히 니콜라이는 자존심이 세서.”
위저드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에이, 니콜라이가 너는 인정하잖아. 솔직히 너랑 하는 대인 전투는 싸우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게 목적인데, 뭐. 그 녀석, 되게 실망했어.”
과연 그럴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야. 사사.”
다시 풍경을 향해 돌아서는 위저드의 옆모습을 사사는 지그시 살폈다.
“위저드, 솔직히 심란하지?”
“응? 뭐가?”
“그렇잖아. 결혼식 갔다 온 뒤부터 완전 센치해져 가지고. 역시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위저드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니까.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스승님하고 나랑 몇 살 차이가 나는데.”
“흐음.”
사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나 친구의 마음에 불청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아아, 그날 진짜 재밌었는데.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은 다 온 거 같더라. 음식도 엄청 맛있고. 특히나 우리 공연, 반응 죽였잖아.”
“하하! 그거?”
시로네의 결혼식을 떠올린 위저드도 웃음이 터졌다. 확실히 멋진 공연이었다.
3일 전.
토르미아의 수도 바슈카.
마야의 축가가 끝나자 천 명에 가까운 인파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브라보!”
세계 최고의 디바의 공연을 본 것만으로도 참석한 의미가 있을 정도였다.
마야는 신랑 신부에게 다가갔다.
“결혼 축하해! 시로네, 에이미.”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가 꽃을 든 채로 마야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공연 때문에 바쁠 텐데 이렇게 와 줘서. 혹시 무리한 거 아니야?”
“호호! 어떻게 빠지겠어? 에이미의 부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케이든이 걸어왔다.
이제는 공식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도 조만간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축하한다, 시로네.”
“고마워.”
이제는 서로가 사랑을 찾았기에 결혼식에 부담 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케이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가던 마야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에이미, 끝까지 잘해! 파이팅!”
“아자.”
에이미가 해맑게 웃으며 주먹을 치켜들자 하객 쪽에서 폭소가 터졌다.
네이드가 사회를 이어 갔다.
“세계 최고의 디바! 마야 씨의 공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에는 뭔가 좀 아쉽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알페아스 마법학교 후배들의 특별 공연이 이어지겠습니다!”
“특별 공연?”
시로네와 에이미는 서로를 돌아보았으나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순서였다.
“어, 어?”
하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빠른 템포의 음악이 연주되면서 무대 위로 3명의 소녀가 뛰어올라 왔다.
하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난 의상도 압도적이지만, 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최강의 마법사였다.
“위저드?”
시로네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반면 하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최고다! 이게 결혼식이지!”
10대의 활기 넘치는 안무를 선보이던 소녀들이 시로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몸을 바짝 밀착시키더니 저마다 웨이브를 타기 시작했다.
푸 하고 웃음이 터진 에이미가 입을 가리며 허리를 숙이고, 시로네는 혹시라도 몸이 닿을까 싶어 아예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으으.”
시선을 돌려 구원 요청을 해 보지만 네이드는 숨이 넘어갈 듯 웃고 있을 뿐.
‘저 자식···.’
넌 나중에 결혼식 한 번 더 해.
“시로네 오빠아.”
손 키스를 보낸 위저드가 입술로 쪽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다시 무대로 돌아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깔깔대고 웃는 것이었다.
“하, 하하.”
시로네의 표정도 좋은 볼거리였다.
한편 루피스트, 플루와 함께 하객석에 앉아 있던 알비노는 사방에서 방방 뛰는 젊은 하객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거참, 요즘은 ‘식’의 의미가 변한 건가? 이루키가 4살 때 딱 저러고 다녔는데.”
뒷자리의 플루가 상체를 굽히더니 알비노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종전 세대잖아요. 요즘 애들은 저희 때하고도 달라요. 긍정적이고 좋은데요, 뭐.”
알비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잉! 이 나라 토르미아가 장차 어찌 될는지.”
“어우~.”
플루가 야유했다.
“자꾸 그러니까 젊은 층에서 미움을 받는 거죠. 실제로 그런 분도 아니시면서.”
“껄껄! 안 그러면? 끼워 주기는 하고? 마음껏 웃는 것은 젊은이들로 족해. 적어도 늙은 어미 개는 현실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꽉 잡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열심히 해. 비서실장 정도로 안주하다가는 나중에 어디 가서 에헴 소리도 못 낼 테니까.”
옆자리의 루피스트가 동의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치.”
플루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자리로 돌아가자 알비노는 다시 위저드를 살폈다.
“그래, 올해 졸업이라고?”
“네. 시로네와 한 약속이기도 하고, 당사자도 그걸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태는?”
“10년 동안 특별한 이상 증세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요. 내년에는 협회에 소속되어 제1급 대마법사 칭호를 받을 예정입니다. 즉, 18살에 제1급. 이례가 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반대할 사람도 없죠.”
알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류 최강의 마법사. 단순 전투력만 놓고 보면 시로네를 능가했을 것으로 추정되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무사히 잘 자라 주었구먼.”
시대의 극악, 하비츠를 상대하는 것은 7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네.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거대한 벽 앞에서는 나쁜 감정조차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리더의 자질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이지. 자발적 감수성을 가진 집단 유기체. 그래서 여타의 종보다 통제가 어렵지만, 일단 방향성만 잡히면 그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저 아이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게. 앞으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저 요란한 춤사위도···.”
환한 표정의 위저드를 바라보던 알비노가 수염을 만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어여쁘지 아니한가.”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열렸다.
다음 날 수업이 있는 위저드는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때 시로네가 찾아왔다.
“잠깐 괜찮아?”
“스승님?”
위저드는 바짝 긴장했다. 여전히 그녀를 긴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그냥 즐겁게 해 드리고 싶어서. 혹시 저희 공연이 무례했다면···.”
“하하, 아니야. 재밌었어.”
가장 큰 걱정이 덜어진 위저드가 한결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왜 저를?”
물론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이지만 피로연은 신랑이 바쁜 행사였다.
“학교로 바로 간다며. 이제 곧 졸업 시험이겠네.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해.”
“네.”
방심이라니.
직접 가르친 스승이 제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핵심이 아니었다.
“스승님,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에이미 언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 그래. 음···.”
시로네는 난감한 듯 눈썹을 긁더니 결국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혹시, 뭔가 힘든 일이 있니?”
“네?”
위저드는 눈을 깜박거렸다.
과연···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딱히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노파심에. 이제 곧 졸업을 한다니까 나도 생각이 많아져서.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와서 상의해. 어떤 얘기라도···.”
위저드가 웃었다.
“스승님도 참.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 아세요? 아까 그렇게 혼쭐을 당했으면서. 아, 알았다.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오신 거죠?”
위저드가 가슴을 흔드는 시늉을 하자 시로네는 난색을 표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네네! 빨리 가세요. 신부 목 빠지겠네. 피로연 끝나고 신혼여행도 가야죠.”
위저드는 강제로 시로네를 돌려세우고 두 손으로 힘껏 등을 밀어냈다.
그녀의 눈에 그리움이 담겼다.
‘역시 이 사람은···.’
따듯하다.
“하하, 알았어. 그럼 여행 끝나고 학교로 갈게.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자.”
“저 말고 스승님이나 걱정하시죠? 에이미 언니는 엄청 뜨거울 테니까.”
“까불기는.”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고 멀어지는 시로네의 뒷모습을 위저드는 눈으로 배웅했다.
아마도 시로네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말을 삼켰는지.
‘그래, 잘한 거야.’
시대의 박애인 시로네의 직계 제자이자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마법사.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위저드는 두 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손끝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
“그래. 재밌었지.”
그렇게 말하고 위저드는 몸을 돌렸다.
친구의 말투에서 슬픈 감정을 읽은 사사는 그저 발을 맞추며 걸어 주었다.
“응?”
기숙사 입구에 남자가 서 있었다.
“크리스?”
현 졸업반 서열 2위로 교내에서 인기가 좋지만, 졸업반 시작과 동시에 위저드에게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인 경력이 있는 동기였다.
사사가 물었다.
“크리스? 네가 웬일이야? 여기 여자 기숙사인데.”
“위저드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너, 오늘 대인 전투 불참했지? 니콜라이를 상대로 말이야.”
“그런데?”
“나한테는 그럴 필요 없다고. 반드시 널 이기고,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라는 걸 보여 줄 테니까.”
“으음.”
위저드는 눈썹을 긁었다.
그녀가 남학생들과 대인 전투를 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였다.
“저기, 크리스. 날 좋아해 줘서 고맙긴 한데, 내가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닐 뿐이지.”
“거짓말.”
“뭐?”
“난 알아.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아리안 시로네. 당연하겠지. 어릴 때부터 널 가르쳤고 지금도 그나마 너랑 맞먹는 건 그 사람뿐이니까. 세상 사람들은 6 대 4 정도로 네 우위를 점치던데.”
위저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너! 지금 감히 누구를 함부로 평가하는···!”
“이것 봐!”
크리스가 소리쳤다.
“고작 이 정도에도 화를 내잖아! 평소에는 마법의 교과서처럼 냉정한 네가! 어릴 때부터 그랬어. 넌 언제나 시로네, 그 사람만 보고 있었다고. 그래서 널 꺾겠다는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남자니까!”
위저드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지만 덕분에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잘해 보렴.”
“큭.”
세계는 차갑다.
감정이 얼마나 아름답든,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위저드의 몫이었다.
“너도 애쓰고 있는 거잖아.”
크리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그냥 내가 할게. 내가 증명할 거야. 그러니 대인 전투에서 나를 피하지 말아 줘.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크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사가 안타깝게 말했다.
“속은 깊은 애야. 알지?”
위저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여자 기숙사 201호.
“후우.”
방으로 돌아온 위저드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이제 막 도착한 결혼식 사진 액자가 화장대 앞에 놓여 있었다.
사진 끝 쪽에서 바보처럼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턱시도를 입은 시로네와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에게 돌아갔다.
“역시 예쁘다, 에이미 언니.”
감정은 정리가 됐지만, 법적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역시 기분이 묘했다.
“에이, 뭐.”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잡념을 날려 버리고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만지는 그때, 손길이 우뚝 멈췄다.
“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침대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처럼 진한 속눈썹, 말코 아래로 풍성하게 자란 콧수염, 길게 내려온 인중.
“···하비츠.”
시대의 극악, 사탄의 재림.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위저드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