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화
100. 예고
강감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견제하고 싶어도 서울예술종합대학교 출신이 이 업계에 많았기에 일부러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까.
“주호성이라. 에이스 엔터에 있었네?”
“예. 대리 3년 차라 이번에 옮기면서 팀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데리고 왔습니다.”
인사 서류를 보던 강감찬 대표의 눈가가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면 주호성 이 친구도 배우 3실로 보낼 거냐?”
루이스와 디딤돌 엔터의 붕괴 사건 이후 김동수 실장이 영입한 배우는 무려 여섯 명.
그 탓에 배우 3실은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이다.
“예. 정 대리가 있을 땐 사람이 늘어도 티가 안 나더니 나가자마자 삐걱대더군요. 그래서 정 대리한테 붙여줄 한 명 빼고는 다 배우 3실로 투입해야 할 상황입니다.”
“휴우. 다들 윤호 같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강감찬 대표의 푸념에 강지영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정 대리야 규격 외죠. 그 친구만 한 사람이 이 업계 전체를 통틀어 어디 있나요?”
“그래. 그러면 정상봉 그 친구를 윤호한테 붙여주고 다들 배우 3실로 보내거라.”
“예.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나가려던 강지영 본부장을 붙잡았다.
“아 그리고 윤호는 나한테 좀 올라오라고 하고.”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안색을 찌푸렸다.
“그걸 말씀하시게요?”
“그래. 말해야지.”
강감찬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몇 달간 굴렁쇠 엔터를 비워야 했으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이따가 제가 데리고 올라올게요.”
강감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단 정윤호에게 말할 내용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 말고도 또 따로 있었으니까.
* * *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향했다.
배우 2실의 회의실에는 구성철 실장과 오덕구 팀장 그리고 주영훈 팀장이 모여 있다.
그 앞에서 어제 이태풍에게 있었던 일을 조금 더 상세히 보고했다.
“대천 부회장이면 골치 아픈데요. 실장님. 아예 접근을 못 하게 하려면 기사를 흘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구성철 실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CEO도 아니고 대천그룹의 실소유주의 스캔들이야. 어차피 어떤 신문사도 안 받아 줄 거고. 이런 문제는 뭉개고 가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맞대봤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자자. 다들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정 대리. 신입 사원은 점심 먹고 오후에 배정되어 올 테니까 그때 인사하고.”
“예. 실장님.”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 보니 점심 무렵이 되었다.
배우 2실 직원들과 회사 앞 국밥집으로 가기 위해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로비에서 강명길 팀장이 인솔하는 네 사람이 보였다.
셋은 오늘 오기로 한 신입 사원이다.
그런데 강명길 팀장과 함께 걸어가는 한 명은······.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인간이다.
‘뭐야?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지?’
주호성.
회귀 전 탑 엔터테인먼트에서 김동수의 행동대장이라 불리던 놈이 내 눈앞에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주호성은 김동수가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지르던 인간이었으니까.
인간 자체가 충성스러워서가 그런 건 아니었다.
주호성이 원하는 것은 여자와 돈.
김동수는 일만 잘하면 주호성이 회사에서 여자 연습생들을 건드려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뒷돈을 받았지만 상납을 잘 해서 오히려 권장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주호성이 여기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은 저놈이 올 때가 아닌데?’
* * *
주호성은 아침부터 신입 사원들과 어울려 다니다 점심까지 먹고서야 배우 3실로 올라왔다.
주변을 살피던 주호성이 김동수 실장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김동수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소파에 앉자 김동수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일찍 불러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실장님. 약속하신 것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알아. 인마. 빠진 월급은 내가 채워 줄 테니까 하던 대로만 해.”
“어련하시려고요.”
김동수는 에이스 엔터에 있던 주호성을 팀장으로 승진시키며 불러들였다.
서울예술종합대학 출신의 선후배 사이인 데다 김동수가 독립하게 되면 함께 일해보자고 진즉부터 약속된 사이니까.
특히 지난 한 달간 정윤호가 있으면서 벌인 일들을 수습하기 위해 주호성 팀장을 조금 일찍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돈이 들어오던 루트가 절반 이상이 막혔으니 돈 만드는 재주가 있는 주호성의 힘이 급하게 필요해진 것이다 “펑크 난 걸 메꾸려면 힘 좀 많이 써야 할 거야.”
주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쇼. 김 실장님. 저 주호성입니다.”
김동수는 자신보다 더 악랄하게 돈을 챙기는 주호성의 모습을 알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정윤호 그 녀석도 손 봐줘야 해. 너도 알지? 그놈 때문에 우리 계획이 적어도 육 개월은 늦춰졌단 말이야.”
주호성이 킬킬대며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 맡겨만 주십시오. 선배님.”
김동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자. 그럼 일어서서 이사님한테 인사나 드리러 갈까?”
“예. 서예종 라인의 큰 선배님이신데 잘~ 보여야죠.”
김동수가 씨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 * *
대표이사실.
강지영 본부장과 내가 들어섰을 때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 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강감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복도에서 스쳐 지나갔던 주호성 팀장도 함께였다.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 실장은 날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난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다들 받는 둥 마는 둥이다.
그런데 맨 왼쪽에 앉은 주호성 팀장이 입맛을 다시며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듯.
교회 오빠처럼 선하게 생긴 외모지만 그의 검은 속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김동수와 주호성 팀장이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주호성 팀장도 서울예술종합대학 라인이니까.
“왔으면 앉아라.”
강감참 대표가 본부장과 나에게 자신의 소파 왼쪽을 가리켰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이 이사는 내가 지시한 대로 해주고 특히 최근 배우 3실이 관리하는 인력이 많이 늘어났으니 이 실장이 잘 관리하고.”
이제 슬슬 대화가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그런데 갑작스레 강감찬 대표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실장급 회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이달 말일부터 석 달간 좀 쉴 생각이다.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리들 알고 있어.”
무슨 휴가를 석 달간이나 가지?
여기가 무슨 유럽 회사도 아니고.
강감찬 대표가 없다면 이기철 이사를 비롯한 서울예술종합대학 라인이 날뛸 텐데?
거기다 최고 결정권자가 이기철 이사가 되는데?
이제 막 유진이가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체리블라썸이 컴백하는 이 시기에?
일어날 온갖 일들이 머리를 흔들어댔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꾹 참고 강감찬 대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슬쩍 쳐다보니 이기철 이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웃음을 참고 싶은데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 참. 주주분들한테는 내가 직접 설명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나 없는 동안 회사 운영 잘 부탁한다. 이 이사.”
이기철 이사가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되물었다.
“대표님. 무슨 일로 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참찬 대표가 피식 웃는다.
“뭐긴 뭐야. 늙어서 그래. 늙어서. 재충전도 할 겸 쉬겠다는데. 왜? 나 좀 쉬겠다는데 고작 석 달도 맡아서 못 해?”
강감찬 대표의 대답에 이기철 이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발끝이나 따라갈 수 있겠냐만 오실 때까지 성심을 다해 회사를 이끌어 보겠습니다.”
그 뒤로 몇 가지 의미 없는 인사가 오가는 동안 난 온갖 상념과 고민에 휩싸였다.
뒤에서 넉넉하게 지켜주던 강감찬 대표의 부재라니.
마치 갑옷을 벗고 전쟁터로 나가는 기분이다.
대화가 끝나자 강감찬 대표가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 그리고 주호성 팀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들 봐. 난 여기 둘이랑 할 말이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손짓하자 이기철 이사는 웃음을 감추고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강감찬 대표가 소파에 몸을 천천히 기댔다.
고급스러운 가죽이 늘어지며 강감찬 대표의 몸을 포근히 감쌌다.
잠깐 숨을 고른 강감찬 대표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본부장. 나 없는 동안 잘할 수 있겠냐?”
“잘······해야죠.”
곁에 있던 강지영 본부장이 답했다.
“윤호는?”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분명히 강감찬 대표의 발인 일정은 다이어리에서 사라졌는데 왜 쉰다는 거지?
설마 회귀 전 뇌졸중이 벌써 기미가 보이는 건가?
순간 난 얼굴색을 굳히고 강감찬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혹시 건강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내 흥분한 태도에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석아. 누가 보면 죽는 줄 알겠다.”
“대표님!”
“이 녀석이 이기철을 닮아가나. 왜 소리를 질러? 걱정하지 마라. 주치의 선생님도 수술만 하면 금세 회복된다고 하시더라.”
“수술이요?”
강감찬 대표가 날 지긋이 쳐다보더니 말했다.
“강 본부장. 둘이서 대화하게 잠깐 자리 좀 비워줘.”
“예. 대표님.”
강지영 본부장이 걱정하는 기색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 *
강감찬 대표와의 독대 자리.
강감찬 대표가 날 지긋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윤호야.”
“예. 대표님.”
“힘들지 않냐?”
“버틸만합니다.”
“역시 젊으니까 좋구나.”
10년을 회귀해 한창때 몸으로 돌아오자 밤을 새워도 거뜬했다.
그런데 강감찬 대표가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뇌종양이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난 그대로 멈춰 버렸다.
미래에 뇌졸중의 원인이 이거였군.
과로로 인해 고혈압으로 쓰러진 줄 알았는데 미리 건강 검진을 보라고 하길 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일었다.
뇌종양이 그리 만만한 병이 아니니까.
“뭘 그리 놀라. 극 초반이라서 별로 위험하지도 않다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뇌종양이라면서요!”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는다.
“걱정하지 마라. 의사가 극 초기에 발견해서 진짜 운이 좋았다고 하더구나. 수술하고 후유증 없으면 한 달 안에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미친 듯 폭주하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극 초반이라니 천만다행이다.
물론 부위가 부위다 보니 안심은 안 되지만.
“재활까지는 넉넉잡아 석 달 정도로 잡아 볼 생각이다. 그래서 휴가라는 핑계로 말을 돌린 거다.”
말을 마친 강감찬 대표가 내 손을 붙들었다.
두툼한 그의 손에서 잔잔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지영이를 좀 도와줘라.”
그의 말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제가 뭐 도울 게 있겠습니까? 알아서 잘하시는 분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이제는 편을 정하란 이야기다.”
강감찬 대표의 말은 간단했다.
라인을 선택하란 소리다.
“이기철 이사나 김동수 실장이 널 찍은 이상. 넌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라인을 탄 거다.”
“······그렇긴 하죠.”
“나 없는 동안 이기철이 얼마나 날뛰겠냐? 지영이 혼자서는 못 버티니까 부탁 좀 하자.”
어차피 전쟁은 벌어진 지 오래다.
3실을 누르던 내가 당하던.
거기다 내 목표를 이루려면 회사의 주축인 배우 1실도 포섭해야 했다.
끝까지 편을 정하지 않다가 추가 기울자 결국 김동수의 편을 들게 되니까.
난 결국 고개를 끄덕여 강감찬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족하지만 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강감찬 대표가 내 손을 풀어 준다.
“그래. 그리고 적어도 체리블라썸이 컴백하는 이달 말까지는 버티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허허. 녀석도. 하여간 잔소리는 내 마누라랑 딸보다 네가 더 하다니까.”
나는 툴툴대며 테이블에 놓인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라인을 선택한 이상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싶었다.
“그런데 대표님. 서예종 라인을 왜 이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혹시 지분이 많이 밀리는 겁니까?”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었다.
“정확히 봤다. 이기철 이사와 녀석을 후원하는 주주들의 지분을 합치면 나보다 훨씬 더 많다.”
현재 굴렁쇠 엔터의 지분 구조는 강감찬 대표가 29%.
이기철 이사가 6%.
나머지 주주들이 65%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주들은 당연히 서울예술종합대학 라인.
다만 강감찬 대표의 능력과 업계 신망도가 높기에 경영을 맡겨 놓았다고 한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회사의 가치가 급락할 거다. 그러니 주식을 상장할 때까지는 함부로 날 밀어낼 수가 없지.”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이다.
“그렇다면 수술 일정도 숨기시는 게 좋겠네요. 괜한 흠만 잡힐 수도 있을 테니까요.”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넌 니가 담당하는 연예인만 성공시켜라. 그러면 자연스레 나나 지영이에게 힘이 실릴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제야 강감찬이 이기철이나 서울예술종합대학 라인을 왜 못 쳐내는지 완벽히 알 수 있었다.
강감찬 대표의 경험과 연륜 그리고 성과 때문에 버티는 거지만 본질적으로 이 회사는 서울예술종합대학 라인의 쪽의 소유나 다름없다.
“혹시 대책은 있으십니까?”
순간 강감찬 대표의 입가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있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