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화
88. 트로이의 목마 4
구성철 실장과 나는 복도에 서서 임원 회의가 끝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인상을 찌푸린 이기철 이사가 김동수와 함께 나왔다.
급히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지만 이기철 이사는 인사도 받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김동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라졌고.
곧이어 재무이사와 본부장이 강감찬 대표와 함께 따라 나왔다.
인사를 꾸벅했더니 강감찬 대표가 구성철 실장과 날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부서 이동 때문에 왔냐?”
“아 예······”
“그러면 뒤는 내 방에서 이야기하자. 정 이사. 그 건은 내가 말한 대로 좀 부탁하자.”
“예. 대표님.”
재무이사가 사라지자 강감찬 대표는 강지영 본부장과 우릴 자기 방으로 이끌었다.
대표이사실에서도 똑같은 설명이 반복됐고 내 설명을 들은 강감찬 대표는 고민에 빠져 버렸다.
“윤호야. 도저히 안 되겠냐? 영인이 걔. 에이스 엔터 이 실장과 만날 약속까지 잡아 놨다더라. 이적하겠다고.”
어떤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인터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강감찬 대표가 대꾸했다.
“들어오라고 그래.”
잠시 후 이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진이가 들어왔다.
그런데 유진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늘 생글대던 얼굴에는 차가운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뭔가 굳은 결심을 한 듯 입까지 꾹 다물고서.
“우리 2실 최고의 유망주께서 여긴 웬일일까?”
강감찬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
하지만 유진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 웃음을 짓지 않았다.
“대표님.”
유진이의 딱딱한 말에도 강감찬 대표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래. 유진아. 뭐든 이야기해 봐.”
유진이가 날 힐끗 바라보곤 폭탄 발언을 해버렸다.
“저 회사 관둘게요.”
순간 회의실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유진아! 너 무슨 말이야!”
유진이의 폭탄선언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가 손을 들어 유진이와 날 제지했다.
“일단 앉아서 찬찬히 이야기나 해보자. 정 대리도 진정하고 앉아 봐. 우리 유진이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부터 들어 봐야 할 거 아니냐?”
주영인과 마찬가지로 유진이도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연예계 은퇴를 한다고 해버리면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강감찬 대표는 나와는 달리 편안한 표정이다.
30년 경력에서 나오는 포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표님.”
놀란 가슴을 억누르고 자리에 앉자 유진이가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공손한 태도로 또박또박하는 발음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제게 모든 편의를 다 봐 주신 거 지금도 감사드리고 있어요.”
“그거야 네게 가능성이 있어서 그랬던 거지. 안 그랬으면 내가 널 영입했겠냐?”
유진이가 감사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절 데리고 올 때 제게 하신 약속 기억하세요?”
유진이의 물음에 강감찬 대표가 가만히 유진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무슨 약속?
회귀까지 한 내가 모르는 약속?
그때 강감찬 대표가 입을 열었다.
“기억하고말고.”
“그 약속 안 지키셨잖아요.”
도저히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관두려고?”
“예. 그래서요.”
알쏭달쏭한 대화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유진이는 강감찬 대표의 지긋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묻자. 그 약속의 조건.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이죠.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어요.”
강감찬 대표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깐 눈을 감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긴. 그렇구나. 알겠다.”
잠깐.
알겠다니?
여기서 대화가 그렇게 끝나면 안 되잖아?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진아! 그만두긴 왜 그만둬? 그리고 대표님도 너무하십니다! 유진이 잡으셔야죠! 이대로 유진이 보내면 안 됩니다!”
내 외침에 강감찬 대표가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왜? 유진이가 나가면 너도 나가게?”
“예! 나갑니다!”
내 대답에 강감찬 대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참. 살 떨려서 대표 짓도 못 해 먹겠다. 배우들도 협박해~ 직원도 협박해~. 이거 서러워서 원.”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내가 횡설수설하자 강감찬 대표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급하긴.”
“예?”
“유진이는 잡는다. 대신 하나를 버려야 하니 그런 거지.”
“아······.”
강감찬 대표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유진이를 붙잡고 주영인을 버린다는 뜻.
설마 그 경우까지 염두에 둔 건가?
강감찬 대표는 유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킬 테니 나간다는 말은 취소해라.”
“예. 대표님. 계약서 보내주시면 계약 바로 연장할게요.”
“그거 말고.”
“알아요. 그것도.”
여전히 대화는 알쏭달쏭하지만 일단은 나간다는 말을 취소한다니 안심이다.
“본부장. 정 대리 인사 발령은 지금 즉시 내려.”
“대 대표님?”
“더는 고민할 거 없다. 다 가지려다 놓치는 게 많다면 결정을 해야지. 그리고 본부장. 영인이 불러서 실장급으로 제대로 된 놈을 붙여주겠다고 제안해봐. 그것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포기하는 수밖에.”
단호한 강감찬 대표의 지시가 이어졌다.
강지영 본부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말했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는 반론은 수용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 대리. 한 달간 수고 많았다. 생판 낯선 배우 3실에 가서도 너무 잘하고 있기에 내가 욕심 좀 부렸나 보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발령은 곧 날 테니 유진이는 집에다 데려다주고 좀 쉬어라.”
“아······ 예.”
너무도 속전속결로 결과가 난 탓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면 두 사람은 먼저 나가봐.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강감찬 대표의 말에 유진이가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나 역시 유진이를 따라나섰다.
말없이 유진이와 함께 배우 2실에 들렀다.
그동안 유진이를 맡고 있던 이영진 매니저에게 강감찬 대표에게 받은 지시 사항을 전했다.
차 키를 받아든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늘 유진이를 태우고 다니던 슈퍼붕붕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 순간.
조용히 있던 유진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은 한숨을 들이켰다.
“헉헉. 죽는 줄 알았네. 나 대표님한테 엄청 무례한 거 맞죠? 그쵸? 아 이제 어떻게 해요?”
유진이는 두 손을 얼굴로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면서.
아니 이미 사고 다 쳐놓고 뒤늦게서야 불안해하면 어쩌라고?
“할 말 다 해놓고 뒤늦게서야 그런다고 뭐 달라질 거야 있겠냐만······ 그보다 유진아. 대표님과 한 약속은 또 뭐야?”
유진이가 두 손을 살짝 벌리고 말했다.
“음. 그건 비밀이에요.”
“뭐?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물어봤지만 유진이는 결코 그 비밀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 * *
주영인은 김동수 실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촬영장으로 가던 길을 돌려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곤 곧장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강감찬 대표가 이기철 이사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사. 잠깐 영인이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예. 대표님.”
이기철 이사는 주영인을 잠깐 노려보다 나가버렸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난 후.
주영인은 꾸벅하고 인사를 한 뒤 강감찬 대표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표님.”
“그래.”
“진짜 정 대리 배우 2실로 돌려보내는 게 맞나요?”
“그래. 조금 전에 발령냈다.”
덤덤한 강감찬 대표의 말에 주영인이 인상을 썼다.
“제가 말한 조건 못 들으셨어요?”
“들었다. 정 대리 안 붙여주면 회사 나간다면서?”
“설마 제가 블러핑을 치는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강감찬 대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널 발탁한 게 난데 내가 널 모를까. 영인이 넌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지.”
3년 전.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로 그녀를 만난 강감찬 대표는 직접 주영인을 영입했다.
그리곤 그 당시 가장 뛰어난 매니저인 김동수 실장에게 맡겨 애지중지 키워왔었다.
“그런데 왜 이러세요? 이젠 저 필요하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여전히 넌 내 새끼다. 언제까지 그럴 거고.”
“근데 왜요? 왜 내 부탁을 안 들어주는 건데요! 매니저 하나 발령내 달라는 게 그리 어려운 부탁인가요?”
주영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강감찬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자식들끼리 싸우면 아비는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으냐?”
“예?”
주영인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멈칫했다.
하지만 강감찬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못 해. 둘 다 이쁘고 귀여워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거든.”
주영인은 잠자코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둘리는 아비가 될 생각은 없다.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 넌 네 인생이 있는 거니까. 남은 6개월 채울 필요 없이 이번 드라마만 잘 끝나면 바로 보내주마.”
강감찬 대표가 자신을 잡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영인에겐 큰 충격이었다.
언제나 친딸처럼 보살펴 주던 강감찬 대표인데 말이다.
사고를 쳐도 막아주고 늘 오냐오냐 챙겨주던 강감찬 대표가 태도를 바꾸자 주영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후회 안 하시죠?”
“하겠지······”
“근데 왜요!”
“됐다. 말해준다고 남을 것도 아니고. 네 눈빛만 봐도 안다. 벌써 결정을 내린 거.”
“그래요! 에이스 엔터에서 조건 진짜 좋게 들어왔어요! 그래도 정윤호 그 사람만 붙여주면 되는데! 그게 왜 안 되는 거죠? 그동안의 인연을 생각해서 이유라도 말해줘요!”
입을 다물려던 강감찬 대표도 주영인의 절실한 태도에 생각을 돌렸다.
“간단한 일이다. 내겐 너보다 정 대리가 더 필요하다는 것뿐이니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영인은 당연히 정유진 그 얄미운 기집애가 무슨 수를 썼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윤호가 언급되다니.
“정 대리 때문에 날 내치다니!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 똑바로 말한 게 맞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가 하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잘하는 배우들은 많다. 그들 하나하나가 소중하지만 의외로 재능은 천차만별이라 그 수는 제법 된단다. 하지만 윤호 같은 매니저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거든.”
“······”
“사람 보는 눈은 타고난 너니까 알 것 아니냐? 강 팀장도 김 실장도 다 싫고 정윤호가 필요하다며? 그래 딱 그 이유다. 나 역시 그 정윤호가 필요하다고. 그놈 하나가 제2의 주영인 제3의 주영인을 만들어 낼 테니까.”
주영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이라도 했다간 그게 진짜 사실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가 빠진 자리가 아쉽긴 하나 윤호는 그 빈틈을 다 채우고도 남겠지. 그러니 나라고 어쩔 도리가 있냐?”
주영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다고 해도 강감찬 대표가 정윤호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주영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똑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바닥에 닿기 전 주영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영인은 원래의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기 전까진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넌 언제나 그랬지.”
“앞으론 저도 인정사정 안 봐줄 거예요.”
“어련히 그러려고.”
강감찬 대표는 아픈 속내를 감추고 주영인을 배웅했다.
주영인의 성격상 다른 회사로 간다면 굴렁쇠 엔터의 앞길을 막는 강력한 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영인이 사라지자 강감찬 대표는 소파에 지친 몸을 기댔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녀석이지만 딸처럼 여겼던 주영인이 자신의 곁을 떠나가자 상실감이 오롯이 느껴진 탓이었다.
“윤호야. 좀 적당히 잘하지 그랬냐······”
정윤호가 점점 더 활약할수록.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커가고 있었다.
주영인은 몰랐지만 그녀뿐 아니라 다른 배우 3실의 배우도 정윤호를 붙여달라는 제의를 해오고 있었다.
너무 빠른 성장에 감춰보려도 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 그리 쉽게 감춰지던가.
결국 강감찬 대표는 정윤호를 더 밀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주영인이란 엄청난 배우를 놓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걱정을 다 하게 될 줄이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통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결국 강감찬 대표는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찾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