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40. 명품 or 병맛 1
1년 전.
유진이는 처음으로 연기 레슨을 받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주영인과의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발탁한 게 아니라 대표님 특별 지시라니까?
-우리 대표님이지만 사람이 참 이상하시네. 버거퀸 얼짱 알반지 뭔지 모르겠지만 한탕 해 먹고 빠질 애를 특별대우하면 연기에 목숨 거는 후배들은 뭐가 돼요?
-영인아. 제발 말조심 좀 하자. 그러다 대표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들어가면 또 어때요?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이상해진 건 사실인데.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와서는.
입사 일주일째 최현민 트레이너 앞에서 갈굼을 당했던 일을 말한 유진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여기까지만 할게요. 길게 말하면 구질구질하니까.”
대충 들어봐도 신데렐라의 계모 수준으로 괴롭힌 것 같은데.
하여간 주영인의 노골적인 간섭에 최현민 트레이너도 레슨에 무관심해졌단다.
“미리 말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어?”
“연기 선생님을 바꾸고 싶다고 양태민 매니저님께 부탁을 드렸어요. 근데 아시잖아요. 당시 절 담당하시던 양태민 매니저님은 얼마 있다가 3실로 옮긴 거.”
“아······.”
알지.
유진이를 맡고 두 달 만에 3실로 옮긴 양태민 선배.
내게 인수인계도 제대로 하지 않아 속으로 엄청 욕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조차 일부러 그런 것 같다.
이게 내가 유진이를 맡기 전의 상황이었다.
하나같이 회귀 전에는 몰랐던 일이다.
난 그때는 유진이뿐 아니라 다른 배우와 가수들의 로드를 겸하고 있었기에 유진이 한 명에게만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내 가정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영인과 김동수가 유진이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매니저를 바꿔 버리고 트레이너를 사주해 레슨을 망쳤다니.
“고생······ 많았구나.”
유진이를 홀로 뒀었다는 죄책감에 목이 살짝 메어왔다.
하지만 유진이는 이젠 다 지나간 일이라며 생긋 웃었다.
“뭐 연예계는 원래 이런가 보다 했죠. 그리고 구박을 받아도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니까. 왜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요.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맞죠?”
회귀 전 깡 하나로 정상까지 올라간 게 정유진이라는 배우다.
2살짜리 아이를 기르겠다 마음먹은 게 고작 19살.
그녀의 깡은 엄마로서 살면서 더욱 단련된 것 같다.
코끝이 찡해졌다.
원해서 길러진 깡이 아니라 깡이 있어야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
유진이는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오빠라서 말하는 거예요. 오빠는 진짜 내 매니저인 거 같으니까······요.”
미소를 구하고 배역을 안겨주느라 노력한 탓에 유진이가 날 조금씩 매니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즉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것을.
주변 모두가 자신을 견제한 터라 나에게도 쉽사리 말하지 못한 것 같다.
난 울컥하는 심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유진아. 앞으론 그런 일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아니다. 내가 앞으론 절대 그런 소리 안 듣게 해줄게.”
내 확답에 유진이가 씨익 웃으며 거수경례를 해 왔다.
“넵. 매니저님!”
그런데 유진이의 눈웃음에 20대 정윤호의 심장이 갑작스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근.
‘윤호야. 너 위에 문제가 있었지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래도 이번 정기 검진 때 심장 검사도 한번 받아야겠다.
* * *
유진이의 집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환한 표정의 미소가 주인아줌마의 손도 뿌리치고 짧은 다리로 도도도 뛰어와 날 반겼다.
“삼촌이다!”
“어. 어. 조심해.”
난 두 팔을 뻗어 미소를 안았다.
“삼촌! 미소 보러 왔어요?”
품에 안긴 미소는 내가 사준 파워터프걸 인형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러엄~. 미소 보러 왔지. 우리 미소를 하루라도 안 보면 견딜 수가 없어서.”
내 대답에 미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오늘도 놀다 갈 거예요? 밤늦게까지?”
초롱초롱한 미소의 눈빛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놀아주고 싶다는 욕구가 물씬 솟아올랐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버거퀸 광고 컨셉 회의에 참석하란 지시 때문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이거 어쩌지? 삼촌 일이 있어서 지금 바로 회사로 가 봐야 하는데?”
그때였다.
미소의 환한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미소야. 삼촌이 미안해. 오늘은 삼촌이 바빠서 얼굴만 보고 가지만 또 올게. 응?”
미소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맨날······ 바쁘잖아요.”
미소가 투덜대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은 것 같다.
아 어떻게 하지?
그때 등 뒤에서 유진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미소는 엄마랑 놀까?”
“으······응. 알았어.”
불퉁한 표정의 미소가 내 품에서 떠나 유진이에게 안겼다.
품 안에 있던 미소가 사라지자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비어버린 기분이 든다.
“우리 미소. 삼촌 가니까 섭섭해?”
“응.”
“그래? 그러면 우리 미소. 엄마보다 삼촌이 더 좋아?”
유진이의 짓궂은 질문에 미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엄마가 좋아! 아 그러니까 삼촌이 안 좋다는 것도 아니야! 그니까. 그니까······.”
대답하던 미소가 엄마와 날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역시 엄마라 그런지 한 방에 미소의 침울한 기분을 날려 버린다.
유진이가 웃으며 미소를 달랬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데 미소야. 삼촌이 오늘 좀 바쁘거든? 그니까 나중에 놀자.”
미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섭섭하다는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곤 미소에게 말했다.
“미소야. 삼촌이랑은 내일 또 보면 되잖아. 그치?”
그제야 미소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약속!”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민 미소에게 나 역시 손가락을 걸었다.
조그마한 새끼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놓지 않겠다는 듯 꽈악 힘을 준다.
절대 어기면 안 되는 약속이 하나 생겨버렸다.
그때 흐뭇하게 우릴 보고 있던 주인아줌마가 말했다.
주인아주머니는 4년 전부터 유진이네 모녀와 함께 살았기에 미소가 유진이의 딸이란 걸 알고 있다.
유진이와 미소를 가족처럼 아끼는 사람이고.
“내가 잡채 좀 싸 줄 테니까 잠깐 들어와서 앉아 있어요.”
“예? 저 바로 가 봐야······.”
하지만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 아주머니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걸터앉자 미소는 내 옆으로 올라와 유치원 생활에 대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삼촌. 진구는요. 내가 좋대요. 그런데 철민이도 내가 좋대요. 근데 난 둘 다 좋아요. 어떻게 해요?”
식은땀이 등골을 적셨다.
눈높이 교육을 해야 하는데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이어리의 일정을 삭제하는 것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응? 어. 그니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삼각관계에 대해 뭘 아는 게 있어야지.
결국 내 답은 단순하고도 간단한 내용이었다.
“으흠. 친구들이랑은 다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둘 다 나를 사랑한다잖아요. 근데 난 사랑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사랑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거라잖아요!”
“그 그렇지.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내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난 친구들 간의 단순한 우정 정도로 생각했었지!
“어떻게 해요? 삼촌?”
“하하하. 그 그게······ 말이지.”
곁에 앉은 유진이는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행히 주인아줌마가 날 구했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나눠 들어요.”
손 한 번 크시네.
큰 김치통에 잡채를 한가득 가지고 나온 아주머니 덕에 난 미소의 어려운 질문을 피했다.
하지만 미소는 다음번엔 꼭 답해야 한다고 어려운 숙제를 던졌다.
어떻게 하지?
* * *
회사로 돌아가자 회의실에선 버거퀸에 관한 광고 컨셉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구성철 실장과 홍보팀 김미혜 대리 그리고 오덕구 팀장이 테이블에 깔린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 윤호 왔냐?”
“예. 실장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오덕구 팀장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유진이 오디션 합격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러면 이제 대리도 달 거고. 아 맞다. 윤호야. 회사 창립 이후에 1년 차가 대리로 승진하는 게 처음인 거 알지?”
“예.”
“대리 달면 연봉 팍 뛰는 거 알고?”
굴렁쇠 엔터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걸 막기 위해 대리를 달자마자 연봉을 단번에 천만 원 이상 올려 준다.
한 달로 치면 거의 100만 원 정도가 더 들어오는 셈이었다.
“승진 턱 제대로 쏘겠습니다!”
“오~. 기대하고 있을 게.”
오덕구 팀장의 소란에 구성철 실장이 타박했다.
“윤호가 승진하는데 왜 오 팀장이 더 들떠?”
오덕구 팀장이 삐죽이며 대꾸했다.
“제 부사수가 승진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윤호를 키우느라 제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오 팀장. 말은 똑바로 하자 윤호를 언제 네가 키웠냐? 자기가 알아서 컸지.”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줬는데요.”
오덕구 팀장의 말대로였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고시원에서 나와 처음 원룸 보증금으로 돈을 내고 나니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가전제품을 살 돈이 없어 삼각 김밥 같은 거로 끼니를 때웠다.
그걸 본 오덕구 팀장이 중고 냉장고와 세탁기 중고 밥솥을 구해다 줬었다.
물론 구성철 실장도 가스 레인지나 TV까지 선물해 줬었고.
덕분에 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걸 누릴 수가 있었다.
그때의 마음의 빚은 배우 2실을 떠나서도 늘 가지고 있었는데.
회귀 전 갚지 못한 그 빚은 이제부터 갚아나갈 생각이었다.
장난스레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죽였다.
“이게 다 두 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걸 멈추고 멋쩍게 말했다.
“크흠. 네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감사는······”
“흠흠. 그래 축하하고 대리 발령 난다고 회사 생활 끝나는 거 아니니까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하자.”
인사를 마치자 구성철 실장이 버거퀸 광고 회의로 이야기를 돌렸다.
“자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급한 일부터 하자. 오늘까지 광고 컨셉 의견 첨부해서 홍보실로 보내달라더라.”
“예. 실장님.”
“그리고 김 대리. 윤호한테도 광고 시안 보여줘야지.”
“네.”
나는 김미혜 대리에게 버거퀸 홍보실에서 보내준 두 가지 광고 콘티 두 가지를 받았다.
하나는 광고 기획사 1위인 JUN 기획에서 만든 명품 컨셉의 광고.
그리고 또 하나는 신생 기획사인 마린보이 에이전시에서 만든 병맛 광고.
두 광고 모두.
내 기억 속에 있던 광고들이었다.
하지만 두 광고의 운명은 확연히 달랐다.
난 광고 콘티를 보며 슬그머니 에브리데이 V10을 보며 내 기억과 대조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2월 1일]
-PM 09:00 (보고 사항) 로티리아 병맛 광고. 대박. 1일 조회 수 100만 돌파.
‘이 기획안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마린보이 에이전시에서 보낸 기획안의 컨셉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신상 버거를 손에 넣는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등장인물이 모두 한 사람이었다.
마왕 용사 용사의 동료 간신 부하 괴물 등등.
회귀 전 각양각색의 다양한 인형 탈과 재미있는 말투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광고였다.
워낙에 인기가 많다 보니 시리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고.
반면 JUN 기획에서 만들었던 광고에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2월 14일]
-PM 07:00 (보고 사항) 버거퀸 명품 광고. 갑질 논란 광고와 버거 동시 출시 중단.
하나는 대박 하나는 똥망.
그러나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을 하진 않았다.
원래의 역사에는 똥망을 선택했던 버커퀸이지만 이번에는 대박을 선택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구성철 실장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일단 우리끼리는 JUN 기획의 광고로 정했다.”
“예?”
“명품 버거라는 제품 컨셉에 맞게 기획도 잘 나왔고 광고 감독이 유명훈이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네 의견은 들어봐야지 싶어서.”
하필이면 골라도 똥망을 고른다니!
웃고 있는 구성철 실장을 향해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안 됩니다! 실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