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화
33. 계약
드르륵.
VIP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180cm가 넘는 장신의 미남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떡 벌어진 가슴팍에는 온갖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채로.
“승훈아. 짜장면은 사 왔어?”
장준혁은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짜장면을 찾고 있다.
“형도 참. 병실에 어떻게 짜장면을 가지고 들어와?”
장준혁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푸념이 흘러나왔다.
“야 명색이 매니저라면 어떻게든 좀 해봐라. 너 형이 죽어가도 짜장면 한 그릇 안 먹일 거냐? 죽을 뻔한 형 소원 하나 못 들어줘?”
“헛소리 그만하고 인사나 해 형을 구한 은인 정윤호 씨가 왔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장준혁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프기는 한데 견딜 만은 합니다. 근데 거기 있지 마시고 가까이 오세요. 제가 일어나기 좀 불편한 상태라······”
몸에 수액 줄이 주렁주렁 달린 탓에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아. 예.”
곁으로 갔더니 장준혁이 내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정윤호 씨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제 제삿날이 되었을 겁니다.”
너털웃음을 짓던 장준혁은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자신의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으으윽.”
다급히 이승훈 매니저가 곁으로 와 장준혁을 부축했다.
“어휴. 그러기에 조심 좀 하라니까! 웃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이승훈 매니저의 잔소리에 장준혁이 아랫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하여간 잔소리만 늘어서는. 입맞춤까지 한 우리 윤호 씨를 보니 반가워서 그랬다.”
인공호흡을 한 걸 가지고 입맞춤이라니!
난 다급히 급히 손을 휘저었다.
“준혁 씨. 그건 어쩔 수 없이 한 겁니다!”
훠이 장준혁의 입술아!
내 기억에서 지워져라!
당황해 진땀을 흘리는 나를 보고 장준혁이 장난스레 웃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저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편히 말씀해 보세요. 목숨을 구한 값이라 생각하시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요. 뭘.”
내 대답에 장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있나요. 이 장준혁 사전에 그냥 받는 건 없습니다!”
괜찮다고 했지만 장준혁은 내 말을 들을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이 제안 안 받으시면 당장 굴렁쇠 엔터 앞으로 가서 드러누울 겁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입맞춤 당했다고 아주 개진상이라도 부려 볼까요?”
탑스타의 개진상이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이건 이길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진상이 무서워서라도 받아야겠네요.”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준혁이 눈짓하자 이승훈 매니저가 내게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삼각별이 그려진 차 키였다.
“사고로 차가 엉망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 차를 타세요.”
장준혁이 죽다 살아나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건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만.”
“과하다니. 내 목숨값이 이것보다 적습니까?”
1억짜리 벤츠 E 클래스 승용차가 눈앞에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바라고 한 일도 아닐뿐더러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보험료와 기름값.
이런 걸 함부로 타고 다니다간 파산이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말단 매니저에게 외제 차는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 유지비 때문에 그러시나 본데. 그렇다면야······. 승훈아 차는 리스로 돌리고 주유 카드는 매월 빵빵하게 넣어드려.”
“그럴게요.”
뭐가 이리 휙휙 진행돼?
이쯤 되니 더는 거절하기 곤란해졌다.
탑스타란 성격이 좋건 나쁘건 자기 뜻대로 하는 게 몸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 호의를 여기서 더 거절하면 대놓고 싸우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색한 표정으로 차 키를 받아들였다.
“그럼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제야 장준혁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하하. 선물을 받고 이렇게 불편해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준혁의 말에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였다.
“아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오신 김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이라뇨. 편히 말씀하세요.”
장준혁이 이제까지와 달라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쪽 회사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저희 굴렁쇠로 오신다고요?”
“예. 이유는 여기 승훈이가 말해 줄 겁니다.”
이승훈 매니저는 오늘 일 때문에 생긴 장준혁의 곤란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고로 펑크 난 대부분의 방송 스케줄은 다음번 출연으로 대체했지만 광고주 몇 군데에서 소송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라는 거다.
“소송요?”
“네. 아시다시피 오늘 사고로 준혁 형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게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문제는 준혁 형이 건강 보조 식품 광고를 몇 개 진행 중이었거든요.”
“아!”
원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건강하지 못한 이미지를 줘서 회사 제품 이미지에 피해를 준 상황이군.
“대충 알겠습니다.”
“이래서 건강 보조 식품 광고를 하는 게 아닌데······ 그쪽 회사들이 이런 일에는 민감해하더라고요.”
이승훈 매니저가 허탈하게 웃었다.
광고 주들이 피해를 받은 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의의 사고를 당한 당일에 이렇게 나온다는 건 경우가 없는 일.
아마도 사고를 핑계로 배상이라도 받으려는 것 모양이다.
“하여간 사정이 이러니 빨리 큰 소속사를 잡아야 할 상황입니다. 오늘 급히 알아보니 굴렁쇠 법무팀이 일을 잘하기로 유명하더라고요.”
다시 한번 조금 전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깨달았다.
난 경계심을 더 높여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곤 장준혁의 제안에 답했다.
“잠깐 회사에 연락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영입은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장준혁급이면 최소 본부장급 이상이 상대해야 했다.
“예. 다녀오세요. 조건은 까다롭게 하지 않을 거라고 꼭 좀 이야기해주시고요.”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복도로 나와 구성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준혁이 우리 회사로? 진짜야?
“예. 꼭 저희 2실이랑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본부장님에게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조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장준혁과의 계약에 관해서 전달한 뒤 3실에서 내 이름을 팔아 계약을 가로채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러자 구성철 실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고함을 쳐댔다.
* * *
굴렁쇠 엔터의 실장급 회의가 끝이 났다.
굵직한 사건들이 다뤄졌지만 역시나 핵심은 장준혁의 영입이었다.
구성철 실장이 3실의 가로채기를 몰아세웠지만 김동수 실장은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오해라면서.
TK 엔터가 가로채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일단 계약부터 해놓고 정윤호가 있는 배우 2실로 넘길 생각이었다면서 말이다.
구성철 실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쏘아붙였지만 김동수 실장은 끝까지 우겼다.
그리고는 또 다른 탑스타인 차태훈과의 계약을 추진 중이라며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여간 저 미꾸라지 자식. 말만 뻔지르르하지.”
구성철 실장이 회의실을 나선 김동수의 뒤통수에 대고 씩씩거렸다.
그때 뒤 따라 나온 이동민 실장이 말했다.
“참아. 어쨌건 장준혁은 너희가 데리고 왔잖아.”
이동민 실장이 달랬지만 구성철은 씩씩거리는 분을 참지 못했다.
“내가 윤호 볼 면목이 없다. 저놈이 저렇게 뻔뻔스럽게 나오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고.”
구성철은 김동수 실장의 뻔한 거짓말에도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는 걸 아쉬워했다.
구성철 실장의 반응에 이동민 실장이 피식거렸다.
“어째 새파란 신입이 너보다 일을 잘하는 거 같냐?”
이동민 실장의 짓궂은 농담에 구성철 실장이 즉각 반격했다.
“그러는 넌? 윤호 없었으면 체리블라썸 연말 무대도 못 잡았다던데?”
이동민 실장의 얼굴도 확 붉어졌다.
“이게 말을 해도!”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김동수로부터 시작된 불똥이 구성철 실장과 이동민 실장에게 튀었다.
잠시 후.
“······우리 뭐 하고 있냐?”
“그러게.”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구 실장. 우리 늙은 거냐?”
구성철 실장이 피식 웃는다.
“너 대표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할 수 있냐?”
“미쳤어?”
두 사람은 강감찬 대표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60살이 된 지금도 철인 3종 경기에 매년 출전할 정도로 건장한 강감찬 대표가 떠올랐으니까.
구성철 실장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이동민 실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실장. 체리블라썸은 곧 3집 들어간다며?”
“3집이 될지 디지털 싱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바로 들어가야지. 그러고 보니 나도 윤호 볼 낯이 없다. 2집 손절을 빨리했어야 했는데. 윤호 지적을 듣고서야 뜨끔하더라고.”
구성철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바뀐 정윤호의 모습은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니까.
“이제라도 안 늦었음 됐지. 그나저나 잘하자 더 안 쪽팔리려면······.”
“너나 잘해 인마.”
구성철 실장과 이동민 실장은 서로를 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고작 1년 차 하나 때문에 실장급들이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 * *
“레디~ 액션!”
2019년 12월 28일.
<아침이 간다> 마지막 화인 26화 촬영 현장에서 유진이의 열연이 펼쳐지는 중이다.
“방금 봤냐? 유진 씨 눈물 연기?”
“이지연 작가님 배우 보는 눈이 날카롭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봐요.”
“안 그래도 충무로에서도 여배우 가뭄이라 난리던데 좋은 배우가 하나 나왔네. 이번 화 나가고 나면 여기저기서 러브콜 많이 들어오겠다.”
“근데 회당 출연료 10만 원이라면서? 저 연기력에 10만 원이라니······”
“어쩔 수 있나요? 계약이 그런걸. 다음 작품부터는 제대로 받겠죠.”
시청률이 20% 고지를 넘자 스태프들은 다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아침이 간다>에 관한 기사들이 연예 기사면에 대폭 실리면서 한동안 멈춰 있던 유진이의 스타그램도 본격적으로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정유진@miso_1004]
[게시물 24 팔로워 1만 팔로우 150]
춥습니다. 추워요. 오들오들.
(사진 : 아침이간다_촬영현장_흥해라.jpeg)
#아침이간다 #한겨울 #얼어죽겠다 #배고파요 #유진이는다이어트중 #풀만먹고삽니다. #초식인간 #맨날풀이야 #오늘도풀이야
[좋아요♡ 2350개]
(댓글)
-risa : 어? 정유진. 복귀했네.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garosu10 : 박은성 뺨 때리는 거 최고! 연기력까지 갖춘 줄 몰랐어요. 엄마랑 같이 응원하고 있어요.
-parknambong : 내가 원조 팬클럽 회원임. 아직 천호동에 사시나요?
-loveYJ : 유진 씨. 복귀만을 기다렸어요. 팬카페 놀러 오세요.
-padopado : 드라마 대박 나라! 아니 이미 대박 났으니까 차기작도 흥해라!
유진이의 계정 이름은 미소천사.
관리는 회사 홍보부에서 게시물의 글만 유진이가 적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해시태그는 누가 붙인 거야? 이것도 유진인가?”
연기 마치고 나오면 물어봐야겠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지만 아직 골치 아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오늘까지였지······.”
유진이의 차기작 선정 문제가 내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냐 <신의 이름으로>냐.
어떤 드라마에 출연할 건지 말하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하지만 아직 강감찬 대표는 최준우의 추문에 관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에 구성철 실장과 강지영 본부장은 연일 이지연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어떻게 한다?’
난 다이어리를 살피며 다시 한번 기억의 흔적을 더듬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월 15일]
-PM 11:05 (보고 사항) 주간 스타 속보. 최준우 클럽 BLUE 입구에서 약에 취해 난동. 현행범으로 체포.
앞으로 한 달 뒤.
주간 스타의 장문기 기자가 최준우의 실체를 캐는 데 성공한다.
약에 취해 맥주병으로 여자의 머리를 내려찍은 끔찍한 피해자의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일제히 최준우를 비난했다.
더군다나 최준우와 함께 연기했던 여배우들의 피해 사례까지 터져 나오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진다.
이런 더러운 사건에 유진이의 이름이 얽히는 걸 막으려면?
무조건 유진이가 <신의 이름으로>에 캐스팅되는 걸 막아야 했다.
‘그래.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될 일이 아니야. 오늘은 직접 움직여 봐야겠다.’
장문기 기자가 특종을 터트렸을 때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이제야 당시에 장문기가 한 발언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