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6화
로웨나가 옆에서 자신을 괴짜 보듯이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이한은 닐리아를 불렀다·
“닐리아· 정령들한테 불의 기운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좀 물어봐줄래?”
“알겠어·”
닐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정령들에게 공손히 부탁했다· 솥 안에 있는 화염의 정수를 확인해달란 부탁이었다·
부탁을 받은 정령들은 터벅터벅 걸어와 솥 안의 열기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기겁해서 호다닥 도망쳤다·
“···나 때문에 도망친 건 아니지? 솥의 기운 때문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로웨나는 전혀 쓸데없는 부분에 집착하는 이한의 모습에 당황했다·
“너 때문에 도망친 거 아니래· ···아닌 거 맞지? 진짜지? 겁먹어서 아니라고 하는 거 아니지? 응· 불의 기운이 생각보다 너무 강해서 물러났다는데·”
“과연·”
약하다면 모를까 기운이 강해서 나쁠 것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이한은 아덴아르트를 불렀다·
“황녀님· 정령한테 다시 한 번만 물어봐주시겠습니까?”
아덴아르트는 알겠다는 듯이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는 정령과 잠시 교감을 나눈 뒤 말했다·
“···미안합니다· 워다나즈· 정령이 접근하길 두려워합니다·”
“····”
이한은 소환된 정령들끼리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안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잠깐 사이 바로 정보 공유를 하다니·
“앗· 그럼 내 화염 참새 정령을 소환해야겠군·”
“아냐· 내가 잘 달래볼게·”
닐리아는 아덴아르트가 소환한 정령을 잘 달랜 뒤 부탁했다·
고민하던 정령은 결국 쪼르르 솥 앞에 가서 그 열기를 확인했다·
“불의 기운이 많이 강한 것 말고는 이상 없다는데?”
“그래···”
이한의 목소리는 살짝 시무룩했다· 로웨나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잘 해결됐는데 어째서?
* * *
직원들과 함께 새로 들여온 찻잎의 품질을 확인하고 비단의 자수를 검사하던 아리언은 학생들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무슨 일이십니까?”
“아리언 님· 폐기된 염목근을 재생시켰습니다· 여기 받아주십시오·”
“네? 그게 재생이 가능합니까?”
운송 과정의 실수로 폐기된 시약을 재생했다는 말에 아리언은 더더욱 놀랐다·
상단의 일 때문에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저렇게 폐기된 시약을 재생시켰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에인로가드에서만 내려오는 비전인가?’
놀랐지만 아리언은 일단은 납득할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에인로가드 아닌가· 안에서만 내려오는 특별한 마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걸 다시 받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폐기된 시약이라 드린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앗!”
뿌리가 담긴 나무상자의 뚜껑을 연 아리언은 깜짝 놀랐다·
염목근의 모습이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색은 몇 배로 시뻘겋게 짙어져 있었고, 근처로는 불씨가 탁탁 튈 정도로 화염의 기운이 지독했다·
‘···뭔 용암 위에서 레드 드래곤의 숨결을 받고 길렀나???’
자신이 아는 것보다 몇 배는 강력한 시약의 기운에 아리언은 당황해서 물었다·
“이거 염목근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여기 형태, 색· 기운· 성질· 다 맞잖습니까·”
‘색하고 기운은 다른 것 같은데요···’
아리언은 직원에게 부탁해 작은 확대경 아티팩트를 갖고 오게 한 뒤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놀랍게도 염목근이 맞았다·
그 기운이 훨씬 강력해서 그렇지·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 도련님의 마법이 뛰어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폐기된 시약을 이렇게 강화시킬 줄은··· 대체 어떤 비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화염을 연금술 기구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응축시킨 뒤 염목근을 절였습니다만·”
이한의 말에 아리언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다른 워다나즈 가문의 사람들과 달리 이 소년은 유쾌한 농담을 참 즐기는 것 같았다·
에인로가드의 비전을 유출할 수 없다는 대답을 저렇게 품위 있게 돌려서 말하다니·
“그러시겠죠· 어쨌든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학생 여러분들께서 직접 팔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의외의 제안에 이한과 친구들은 웅성거렸다· 아리언은 뒤에 있는 찻잎과 비단을 가리켰다·
“이것도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판매한 겁니다·”
칠흑색 비단 위에 자리 잡은, 금실과 은실로 놓은 그림과 무늬 자수는 제국에서 아지르모라고 불리는 최고급 옷감이었다·
그걸 선배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저 최고급 비단을 선배들이 만들었단 말입니까?”
“최고급 비단은 아닙니다만·”
“!”
그 말에 이한은 뒤늦게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렇군···! 비싼 사치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그, 그런 기운이 있어?”
닐리아는 당황해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은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가장 비싼 사치품을 많이 접해본 아덴아르트도 그런 기운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럼 이건 뭡니까?”
“값싼 비단을 염색시키고, 가짜 금과 은으로 실을 대체한 물건이지요· 모조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값은 꽤 나갑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비싼 재료로 비싸게 팔 여유가 없었다·
값싼 재료와 마법으로 비싸게 파는 게 바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었다·
“설마 저 찻잎도···?”
“저건 진짜 찻잎입니다· 학생들이 온실에서 빠르게 재배했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2학년 학생들도 슬슬 느끼고 있었지만, 3학년쯤 되면 필요한 시약과 물건들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의뢰를 받는 것도 괜히 하는 일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 고학년들은 언제나 시간과 금화에 쪼들렸다·
이런 식으로 밖의 상인들과 계약을 맺고 물건들을 납품한 뒤 돈을 받는 건 비교적 쉬운 만큼 꽤 많은 학생들이 하는 일·
하지만 지금 이한과 친구들은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고 인맥도 제법 넓었다·
제약이 없는 만큼 직접 파는 게 가장 이득이었다·
“과연· 조언 감사드립니다·”
일리가 있는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대한의 이득을 볼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잠깐만요!”
“?”
돌아서려는 이한 일행을 아리언이 다시 불렀다·
아리언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염목근 한 상자만 지금 살 수 있겠습니까? 도시에 물량이 별로 없어서···”
생각해보니 곧 있을 도시 연금술사 모임에 염목근이 한 상자 필요했다·
품위 있게 상대를 배려한 만큼 그대로 대화를 끝내고 싶었지만 아리언은 상인이었다·
좋은 물건을 구할 기회가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다!
* * *
“이 정도면 되겠지?”
학생들은 상자에 재포장을 끝냈다· 그러던 도중 살코가 의견을 제시했다·
“잠깐·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지금 시점에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판다고 하면 추적이 붙을 수 있어·”
“확실히 그렇군· 흠· 가명을 쓰긴 해야겠는데·”
변장과 별개로 이름도 따로 쓸 필요가 있었다·
잠깐 고민한 이한은 상자 위에 <나고 가문>이라고 적었다·
“나고 가문이 뭐야?”
“내가 만든 가상의 가문· 저번에 너희 구출할 때 쓴 신분이 그 가문이다· 참· 너희들도 외워야겠군·”
“?”
앙라고는 뭘 외워야 하나 싶어서 눈을 끔벅였다·
“자· 나고 가문의 스테달은 제국 남부의 해적들한테 붙잡혀 있다가 사략함대를 이끄는 토르게르드의 딸 라게사한테 구출된 귀족인데···”
“····”
30분 후·
앙라고는 초점이 흐려지고 멍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제 외운 거 같아·”
“그래· 잘 했다· 준비는 철저해야지·”
‘근데 투기 파동 때 재산 모은 건 왜 기억해야 했던 거지?’
앙라고는 그게 궁금했지만 여기서 물었다가는 1시간 동안 또 추가 신분 강의를 들을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아· 맞아· 보물지도 재산 이야기에 빼놓은 게 있었군·”
‘안 돼!’
“잠깐만· 이한·”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앙라고는 요네르가 끼어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메이킨!’
“가문 이름은 좋은데 문장도 있어야 해· 문장 없이 이름만 적으면 어색해보일 수 있어·”
“아차··· 그랬지·”
지적을 들은 이한은 10초 정도 고민했다·
가문에 어울리는 문양을 고민하기 위해서·
그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가명 용도였으니까·
슥슥슥-
“이건 어때?”
“···거꾸로 매달린 해골인가?”
“맞아·”
“좀 도발적인 것 같은데··· 아니다· 어차피 걸리면 똑같이 징벌방 가겠지· 그럼 이걸로 한다?”
요네르는 굳이 해골 교장을 자극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친구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싶었다·
어쩌면 제자로서 존경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가문 이름 됐고, 문양 됐고··· 나고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 뒤 납품하면 되겠군· 아· 요네르· 요아넨 님의 공방은 어때?”
이한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금술 공방의 이름을 꺼냈다·
뛰어난 연금술사인 요아넨이라면 이 염목근의 가치를 분명히 알아봐주리라·
“그건 안 돼·”
“어째서?”
예상 외의 대답에 이한은 조금 놀랐다·
요네르가 안 된다고 할 줄이야·
혹시 요아넨 님과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요아넨 언니는 시약 살 때는 진짜 칼같이 흠집 지적하면서 절약하거든· 비싸게 팔려면 다른 곳이 나을 거야·”
“과연···!”
혈연이라 하더라도 봐주지 않는 철저함에 이한은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이런 지혜로운 친구가 있으니 크게 한 몫 거둘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애들아·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랑덴 시의 최고 거상이 되는 거다!”
“그··· 그렇게까지?”
* * *
“메이킨 님 오시면 나 없다고 하게!”
연금술사 한 명이 공방에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방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연금술사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치다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탁-
“뭐, 뭐지? 누구인가? 누가 투명 물약을 마신 건가?”
“쉿· 조용히 하게·”
“파후석?! 왜 그러고 있나?”
“메이킨 님 오시면 나 없다고 하려고·”
“····”
뒤늦게 온 연금술사들은 그제야 동료들이 다 투명화 물약을 마시고 공방 곳곳에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료들이 한 수 위였던 것이다·
“다들 염목근을 못 구했나?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희귀한 시약도 아닌데!”
“하필 리치몬드 가문의 운송선이 침몰해서··· 다음 물량이 들어오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한 달? 한 달이면 메이킨 님이 우리 모두를 말려 죽이고도 29일은 넉넉히 남을 걸세!”
연금술사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방 작업에 필요한 시약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전원이!
메이킨 가문의 요아넨이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광기 넘치는 마법사긴 했다· 필요한 시약이 계속 없다면 공방의 연금술사들은 하루에 25시간 동안 일해야 할지도 몰랐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연금술사는 기겁하며 투명 물약을 자신에게 던졌다·
자수정 안경을 낀 공방의 주인, 요아넨 메이킨이 안으로 들어왔다·
탁!
요아넨이 주머니에서 작은 돌조각을 꺼내 던지자 공방 안의 투명화 효과가 모두 흡수되었다·
천장이나 옷장, 솥 안에 숨어 있던 연금술사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메이킨 님·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반드시 시약을 구해오겠습니다· 부디 진정해주십시오·”
“아·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요·”
요아넨은 매우 흥미 가득한 얼굴로 작은 시약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끈을 풀러 안에 든 시약을 꺼냈다·
‘염목근? 아니· 너무 기운이 강한데· 염목근으로 만든 특수한 시약인가?’
“아는 연금술사한테 이 염목근을 하나 받았어요·”
“이게 염목근이란 말입니까?!”
“맞아요· 흥미롭죠·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그 연금술사도 상인한테 선물로 받았는데 이 염목근이 곧 도시에 풀린다고 하더군요·”
“····”
“····”
“저희가 이걸 찾아서 구매하지 못한다면 하루에 26시간 일해도 좋습니다!”
연금술사들은 염목근이 뿜어내는 열기보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