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화
이정표(25)
49구역 상공의 하늘을 찢고 추락하는 천궁부유마탑 전쟁용군체 토르번·
살아 움직이는 엔진이자 터빈처럼 강렬한 굉음을 내뿜으며 맹렬하게 회전한다·
쿠구구구구!!!
단단한 금속성의 외골격과 그 기반을 떠받치는 새파란 뇌광의 기류·
외곽구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자기폭풍과 발칸 영공의 경계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고고한 전쟁마탑의 거체·
[일렉트로닉 필드 전개· 전지교합(電地橋合)·]
파지지지직!!!
부유마탑의 사방에서 뻗어 나온 수천 갈래 뇌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지상으로 뻗어 나갔다·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전쟁마탑과 49구역의 지상 일체를 이어붙이듯이 내리꽂히는 전류의 기둥·
[공간에너지 안정화 실시· 소요 동력 순환까지 4분 40초·]
[엔진냉각 시작· 융합로 과부하 열기 배출로 개방·]
[강하 개시·]
치이이익!!!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부유섬의 사방에서 후끈한 증기가 피어오른다·
동시에 지상과 이어붙인 마탑의 거체가 가속하면서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강철의 부유섬 아래로 펼쳐진 광대한 전류역장(電流力場)이 쉴 새 없이 번뜩이면서 탑의 출력을 끌어올리고·
49구역 중심부에 펼쳐진 레녹의 권역을 향해 전력으로 내려 찍혔다·
쿠아아앙!!!!
추락하는 전쟁마탑의 거체가 권역 상공에 진입한 순간 허공에서 수십 종에 달하는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막아선다·
별자리를 그리는 천구의 형상처럼 발광하는 초대형 마법진이 수십 종씩 겹쳐져 펼쳐지면서 권역의 공간을 격리·
격렬하게 회전하는 마법진이 공간을 잘라내고 분단하며 내려 찍히는 무게를 고스란히 분산해 밀어냈다·
키이이이잉!!!
터터터터텅!!!
수백 미터 상공 위에서 쇠가 비틀리는 듯한 파열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무형의 충격파가 연신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늘에 떠오른 전쟁마탑과 지상에 솟구친 레녹의 마탑·
두 마탑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로의 권역이 위아래로 충돌하면서 그 경계선을 침범하고 밀어내고 있는 것·
“제니!!”
마탑 층계 사이를 내달린 딜런이 멀리서 휴대폰을 두들기는 제니를 보고 소리쳤다·
끼익!
난간을 타고 뛰어넘어 순식간에 제니의 앞에 멈춰선 딜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지금 전화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밖에···!!”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봐·”
제니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직 통화권은 무사해· 탑의 기능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거겠지·”
“····”
“토르번 마탑이 싸움을 걸어왔다면 분명 탑주의 존재 때문일 거야· 지금은 그의 신변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해·”
“탑의 외곽 결계가 부서지고 있어·”
딜런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이 직접 대응하는 게 아니라면 무한정 버틸 수는 없을걸· 이쪽에서도 움직여야 해·”
권역 자체의 내구성과 레녹이 설치해둔 결계가 전쟁마탑을 막아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다·
저 거대한 금속덩어리가 저항 없이 지상에 떨어졌다가는 말 그대로 전략병기에 준하는 피해가 발생할 터·
자칫 잘못하면 49구역 전체가 회생 불가능한 피해를 입고 쑥대밭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 탑 안에서 빌어먹은 밥이 얼만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철컥!!
불길한 붉은 빛으로 일렁이는 요도를 뽑아 든 딜런이 마스크를 고쳐 썼다·
“내가 다른 녀석들과 바깥에서 대응할 테니까 봉황전에 시동을 걸고 바로-”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딜런의 등 뒤에서 안경을 쓴 여성이 나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던 딜런이 눈을 끔벅거리면서 물었다·
“아 그··· 예의 귀족님이셨던가?”
“주티야라고 해· 반가워·”
주티야가 졸린 눈으로 딜런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장갑 사이로 비치는 딜런의 피부를 바라본 주티야가 물었다·
“불사체 실험의 참가자구나?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생존자 출신은 오랜만에 보는걸·”
“···그건 나중에 말해드릴 수 있으니까 왜 지금 움직이면 안 되는지 빨리 말해보십쇼·”
“토르번 측에서 견뢰의 마탑을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저렇게 무식하게 서로의 권역을 충돌시키지는 않았을 거야·”
떨떠름한 기색으로 손을 빼는 딜런을 보며 주티야가 대답했다·
“그보다는 견뢰의 권역을 무효화시키고 마탑을 직접 공격하려고 손을 썼겠지·”
“탑주가 여기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저 워메이지들이 우리 마탑을 파묻어 버릴 리는 없겠죠·”
제니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더더욱 뭘 노리는지 모르겠네요· 왜 이 시점에 공격을 시작한 걸까요?”
“명분이 필요한 거겠지·”
“명분?”
“발칸 쪽에는 사업을 벌이지 않지만 토르번 마탑이 벌이는 전쟁사업의 규모가 생각보다 꽤 크거든·”
주티야가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내전만 해도 십여 곳을 넘긴다는 말도 있고 전쟁사업이라는 게 워낙 큰돈이 오가는 일이잖아·”
“····”
“그런 일들을 모두 제쳐두고 발칸까지 달려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겠지·”
“저만한 거물이 칼을 뽑았으니까 아무거나 썰어보겠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까?”
“그것보다는 이 퍼포먼스 자체가 서로 합의를 거친 결과가 아닐까 싶은 거지·”
창문 밖을 올려다본 주티야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견뢰든 아켄드리아스든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니잖아·”
“····”
“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제니와 딜런이 알고 있는 반이라면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두 마탑이 충돌 중인 이 사태가 사전에 협의된 결과물이거나 아니면 협의가 어긋났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은 것·
어느 쪽이든 레녹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면 이쪽에서도 마땅히 대응해야 할까·
“그리고 어느 쪽이든 너희들이 먼저 나설 필요는 처음부터 없어·”
제니와 딜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주티야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싶어서 견뢰가 우리를 이 탑에 머무르게 한 거였으니까·”
“···네?”
슈우우웅···!!!
제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티야를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초원의 풍경이 들어왔다·
너비를 짐작할 수 없는 초원 위에 세워진 여러 개의 묘비와 그 묘지 안쪽에 세워진 거대한 교회·
그리고 그 교회의 예배당 앞에 퀭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비쩍 마른 거구의 남성·
“저건···!!”
마탑 상공에서 머무르고 있던 장례지도사 사이러스 아르델티오의 자성영역 장송귀해선·
죽은 자의 진혼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현실에 피어나 사라지지 않는 영역이 느릿한 속도로 상승한다·
살아 있는 엔진처럼 맥동하는 전쟁마탑이 떨어지고 권역 위로 상승하는 아득한 초원의 영역이 그를 받아낸 순간·
딜런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제니 귀 막아!!”
쩌어어어엉!!!!
장송귀해선의 영역 위로 전쟁마탑의 거체가 충돌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충격파를 터트렸다·
“큭···!!!”
권역의 하늘 위로 폭발하듯 퍼져나간 충격파가 49구역의 하늘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결계와 술식으로 보호받는 탑의 안에서도 그 진동 때문에 순간 머리가 흔들릴 정도·
“미쳤군· 마탑 간의 공방에 강제로 끼어들어서 충격을 대신 받아내다니···!!!”
창백한 표정으로 제니가 비틀거리는 사이 딜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영역의 내구도가 말도 안 되잖아· 귀족 나으리들은 다들 저런 괴물 같은 심상을 갖고 있는 건가?”
“사이러스의 영역은 애초에 전개하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데구르르 구른 주티야가 벌렁 드러누운 채 말했다·
“장례지도사 본인이 죽지 않는 한 영역은 계속해서 유지되지· 사이러스도 그걸 알고 전쟁마탑을 대신 받아낸 거야·”
“요 며칠간 탑 위에 기분 나쁜 흉물이 떠 있다 싶었더니 반이 거기까지 내다본 거였다고?”
“흉물이라니·”
딜런의 서슴없는 평가에 불만을 내비친 주티야가 힘겹게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결과적으로 견뢰의 마탑에 손상은 없어·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마탑 권역 상공에서 서로 충돌한 채로 멈춰선 전쟁마탑과 장송귀해선의 자성영역·
영역과 권역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잠깐의 소강상태·
그 결과를 온전히 인지하기도 전에 저 하늘 저편에서 강렬한 번개가 내리찍혔다·
그 뇌광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제니가 얼굴을 굳힌 순간 주티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견뢰 본인이 직접 해결할 생각인 것 같은데·”
* * *
권역과 영역이 충돌해 어그러지는 수백 미터 상공 위·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전쟁마탑의 최외곽 금속외벽 위로 푸른 뇌전이 번뜩였다·
철컥!!
쇠가 맞물려 비틀리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 등허리에 장착된 철갑날개가 거칠게 펄럭인다·
특수합금을 조립한 길레온의 철갑날개가 흐릿해진 순간 레녹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수백 미터 상공 위를 비행해 전쟁마탑 외곽을 반 바퀴 선회했다·
[전쟁마탑 권역 상공 아음속 비행체 1구 감지·]
[요뢰(邀雷)술식 44문 발동·]
쐐애액!!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한 전쟁마탑의 외곽 권역에서 전격계 요격술식이 발동·
무수한 번갯불이 줄지어 솟구치면서 레녹의 신형을 노리고 쏘아졌지만 닿지 않았다·
등허리에 매달린 철갑날개를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 레녹의 몸이 옆으로 꺾이면서 방향전환·
점멸과 가속을 반복하며 아음속의 속도로 전쟁마탑의 권역을 관통하고 수직으로 강하한다·
콰아아앙!!!
먹구름 낀 하늘 위로 내리찍히는 한줄기 낙뢰·
강렬한 천둥과 함께 전쟁마탑의 갑판 위에 내려선 레녹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판 위로 설치되어 있는 최신식 술식요격장비들 사이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
휘오오오!!
“····”
경직되고 긴장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공허한 적막감·
오래전 방위군의 이동요새를 혼자 공략할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시의회에 반역을 저지른 중장 에드머스 트레펜이 이끌던 이동요새의 크기도 굉장히 거대했지만·
지금 이 하늘 위에 홀로 부유하는 전쟁마탑의 면적과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쿠구구구!!!
천궁부유군체 전쟁마탑 토르번·
탑의 형상보다는 말 그대로 거대한 엔진 자체를 띄워 올린 듯한 기묘한 형상·
금속성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강철의 요새· 먹구름 낀 하늘 위로 벼락을 터트리며 부유하는 비행선·
구체적인 작동 원리나 제작 연원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있다·
지금 이 전쟁마탑은 특정한 추진력이나 비행술식을 통해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부유섬 전체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생산하는 전쟁마탑의 ‘부산물’일 뿐·
마탑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티팩트이자 가히 신화급의 유물이나 다름없다·
그 가치로 따지자면 어지간한 중형도시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재보·
전쟁사업으로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자산을 쥐고 있다는 토르번 마탑다운 장관이라 해야 할까·
레녹이 상념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는 사이 전쟁마탑의 갑판을 넘어 탑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누각에 도착했다·
새파란 뇌전을 휘감은 채 번뜩이는 뇌신의 궁궐처럼 장엄한 외견을 지닌 누각의 형상·
전쟁마탑의 갑판 삼면을 둘러싸고 층계를 이룬 채 솟구친 듯한 압도적인 규모·
그 장대한 누각 사방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기척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날개·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레녹이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아내는 사이 누각 저편에서 날카로운 뇌광이 번뜩였다·
파직 파직···!!
전쟁마탑의 금속성 외벽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
신체의 일부를 뇌화시켜 속도를 높이고 저항을 줄이면서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기동력을 손에 넣는다·
파앗!!
번뜩이는 전격을 두른 두 명의 마법사가 레녹의 눈앞에 섬전처럼 떨어져 내렸다·
벼락에 휘감긴 뇌태도(雷太刀)를 짊어진 늠름한 인상의 여성과 원형의 마법진을 등 뒤에 여럿 띄워 올린 소년·
“아 기억났다·”
뒷짐을 진 채로 술식포탑 위에 올라탄 소년이 레녹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데드라이즈의 회색 유령이 이끄는 예하부대가 비슷한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죠· 혹시 군단 출신인가요?”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두 마법사가 이번 일에 앞서 가장 먼저 레녹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선봉인가·
양쪽 모두 위계를 완성하고 7레벨에 도달한 성위마법사· 그것도 본신의 기척이 굉장히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는 쪽이다·
레녹을 앞에 두었음에도 의념에 일체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면 두 사람 모두 실전경험이 굉장히 많은 워메이지겠지·
“나는 그것보다 우리 마탑을 막아낸 저 자성영역에 대해 관심이 가는데·”
늠름한 인상의 여성이 레녹을 보며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장례지도사를 저런 식으로 부려먹다니 역시 거대도시에서 가장 미쳐 있다는 마법사는 달라도 뭐가 다르잖아·”
“····”
“중앙의 귀족들이 신기한 재주를 타고났다는 건 유명하지만 온 대륙을 돌아다녀도 저런 기예는 구경하기 힘들지·”
파직!!
뇌태도를 고쳐잡은 여성이 웃었다·
“뭐 그쪽이 라이엘 님의 제안을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지만·”
“너희들의 감상을 듣고자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 아니야·”
쩌적!!
레녹이 손목을 주무르는 것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새파란 전격이 터져 나왔다·
가득 찬 수조 안에 손을 담근 것처럼 흘러넘치는 압도적인 마력의 방사·
살벌하기 그지없는 전압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변한 찰나 레녹이 물었다·
“라이엘이라는 여자가 보이지 않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시작하면 되겠나?”
“···그 전에 이번 일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을 드리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설명이라고?”
“지금 이 의식은 뇌신전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지만 본 마탑 측에서는 얻어가야 하는 것이 몇 가지 더 있기 때문이지요·”
소년이 말했다·
“토르번의 전쟁사업은 탑의 마법사 전원이 어떠한 전장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워메이지이기에 성립하는 것· 그렇기에 저희는 정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이러한 역량을 설파하고 홍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해서 오늘 이 자리는 본 전쟁마탑이 고위 전투마법사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대처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연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의식의 결과에 따라 나와의 전투를 토르번 마탑의 커리어로 삼고 싶다?”
그제서야 두 사람이 시작에 앞서 찾아온 목적을 이해한 레녹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군· 나와 싸운 이들 중에서 그걸 대놓고 언급하면서 허락을 구한 쪽은 없었는데·”
“에반 마르티네스가 당신과의 전투를 통해 중앙전선 전역에 명성을 떨친 것을 지켜보았으니까요·”
레녹의 반응이 날카롭지 않은 것을 확인한 소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관문에서 천번이 세운 위업으로 인해 현재 당신의 이름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프리미엄이 붙어 있죠·”
“····”
“탑주님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저희로서도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얻어가려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미리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천번이 견뢰에게 살아남은 것으로 명성을 올린 과정에 대해 토르번 측에서는 꽤 감명을 받았던 듯하다·
아니 천번이 접합술주를 쓰러뜨린 시점에서 견뢰에 대한 평가가 덩달아 상승한 것에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토르번 측에서 견뢰의 이름값에 대해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시작에 앞서 그 부분을 이용해 먹고 싶다고 솔직하게 레녹에게 고하고 있다는 것 역시·
레녹이 그 부분에 대해 답하기 위해 입을 연 그 순간·
“뭐 사실 론이 말하는 것들은 전부 핑계에 불과하고·”
콰직!
뇌태도를 역수로 땅에 내리꽂은 여성이 씩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탑주님을 이겼다는 마법사와 한번 싸워보고 싶은 게 본심이지·”
“····”
론이라 불린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린· 그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열심히 설명한 저까지 바보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길이 보일 것 같아· 약간만 더 내다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론의 말을 무시한 여성 할린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위의 경지를 엿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선배님?”
“누가 네 선배라는 거지?”
“흠 나름 친밀감의 표시였는데· 너무 어설펐나?”
멋쩍은 미소를 지은 할린이 역수로 움켜쥔 뇌태도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푸른 뇌전으로 번뜩이는 태도의 날에 얼굴을 비춘 그녀의 표정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허투루 손속을 두지 말고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군·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의 진짜 ‘마법’을 보고 싶거든·”
“····”
“탑주님을 상대해 본 당신이라면 분명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레녹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내 평판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든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대륙 전역에서 전쟁사업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구성원들은 누구보다 강렬한 향상심을 품고 있는 것인가·
강자와 싸워서 깨달음을 얻고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
조직으로서는 손익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으로서는 손익을 초월한 토르번 마탑의 모순적인 행동원리·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이야말로 이 대륙에서 단일 마탑으로서는 무엇보다 강한 전력과 규모를 갖춘 것일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양손을 펼치면서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뇌광정(雷光井)]
[뇌허공동(雷虛空瞳)]
[집뢰편향(輯雷偏向)]
[전위공명 : 하모닉스]
빠아아아아앙!!!
레녹의 등 뒤에 푸른 빛의 헤일로가 떠오르며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
엄청난 양의 전력이 모여서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그때마다 사방으로 가감 없이 전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사방의 시공간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압도적인 파괴의 염상에 론과 할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그 순간·
“전격계 고유마법의 총본산을 상대로 느슨하게 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
“너희 마탑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요령과 기술· 비전과 오의까지·”
흘러넘치는 전격의 파문을 진 채 장엄한 누각 앞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웃었다·
“나도 최대한 많이 눈여겨보고 싶거든·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