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대반격(4)
#17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출생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모든 것이 나와 다른 작자의 마음을 돌리는 행위가 쉽다면 그게 이상할 터였다.
그래서 설득에 능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데샨과 마르야가 좋은 예시였다.
특히 아데샨은 굳이 정신 장악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다룰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돌이켜 보면 내가 아버지가 된 것도 그녀의 주장에 설득당해서가 아닐까 싶다.
“역시 그랬던 거지. 안전한 날이라 강조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크윽!】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잡념에 빠지기 마련이다.
칼과 칼이 닿으며 금속음이 튀긴다.
단순한 검격이었지만 아벨을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가까스로 목이 잘리는 것을 면한 그가 뒤로 물러났다.
【젠장 무슨 속도가···!】
아벨이 중얼거렸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 채였다.싸움이 시작되고 5분째.
놈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슬슬 포기하지? 아직도 내가 대머리들을 죽였다는 걸 못 믿겠냐?”
【닥쳐라···허억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
숨소리가 거칠었다.
저렇게 다쳤으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았다.
우리의 발밑은 피와 도려져 나간 살점으로 흥건해진 채였다.
내 몸에서 나온 건 한 방울도 없었지만.
‘궁금하네. 어디까지 재생이 가능하려나.’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과다출혈로 죽었을 양이었다.
하지만 내 삼촌은 평행세계에서도 구역질 나는 괴물이었다.
피웅덩이에서 나뒹굴고 있는 왼팔 두 짝과 오른팔 하나.
무릎 위부터 잘려나간 오른쪽 다리가 그의 가공할 재생력을 방증하고 있었다.
절단된 사지가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물론 10초가 걸리든 5초가 걸리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속임수는 개뿔. 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좆밥인 거겠지.”
【건방 떨기는···그 혀를 잘라 주마.】
아벨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검신을 감싸고 돌던 빛무리가 한층 더 강해졌다.
반짝거리는 마나가 갑옷처럼 놈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내게 입은 상처들도 다시 스멀스멀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반드시.】
“조카 혓바닥 자른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게 맞냐?”
진지한 표정에 헛웃음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나쁜 새끼고 저쪽이 세상을 구하는 용사라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 뻔뻔함도 사실 이해는 갔다.
원래 세상에서도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회개한 자식이었으니.
‘왜 나는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걸까.’
나는 내가 설득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대화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말을 안 들어 처먹는 꼬라지를 보라지.
“댁도 참 걸물이야. 이쯤 격차를 보여 줬으면 꺾일만도 한데.”
결국 나는 호로자식이 되어야 할 운명인 것 같았다.
피를 함뿍 머금은 린은 아지랑이 같은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아벨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아압!】
“역시 훌륭해.”
절로 감탄이 나오는 위세다.
아버지의 검과 닮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난폭하다.
하얀 빛무리는 이제 검신뿐만이 아니라 칼자루까지 휘감은 채 섬광을 발하고 있었다.
검신의 길이만 3m에 이르는 빛의 검은 세상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세상에서는 본 적 없는 내가 아는 어떤 칼잡이와도 비견할 수 없는 폭발력.
아마도 이게 근원을 흡수하지 않은 아벨의 최고 전력일 터였다.
“너는 내가 반드시 설득해 주마.”
잡생각은 집어치웠다.
칼자루를 한 바퀴 돌려 잡은 뒤 땅을 박찼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려진다.
구름이 얼어붙고 암초를 삼키려던 파도가 아가리를 벌린 채 멈춘다.
주변이 흐릿해지나 싶더니 아벨의 투지 어린 면상이 코앞에 나타난다.
【아 아 아 아 아 아···】
느릿해진 세상에서는 목소리도 느리다.
놈은 아직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가볍게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벴다.
칼끝이 바닥을 긁으며 두 개의 은빛 반원을 그렸다.
아벨의 양쪽 어깨 위로 붉은 선이 새겨진다.
【······!!】
아벨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이렇게 빨리 인지하다니 역시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였다.
칼이 멈추자 마침내 세상이 속도를 되찾는다.
구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아가리를 벌린 파도가 암초를 덮친다.
아벨의 어깨 위로 새겨졌던 선이 벌어진다.
그와 교차한 내가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아벨의 양쪽 팔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크악!】
칼이 떨어진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선혈이 하늘을 적신다.
팔이 두 개라서 분수도 두 줄기다.
본인에게 생체 실험을 거듭한 아벨의 피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흑장미를 연상케 하는 보라색을 띠었다.
【잘도 이런 짓을!】
아벨이 눈을 부라렸다.
한층 강렬해진 살기가 바늘처럼 몸을 찌른다.
그가 포효하자 양 팔의 절단면 위로 뼈와 살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일전에 재생한 것보다 훨씬 빠른 것이 20초면 복구가 완료될 것 같았다.
“한계를 시험해 보자고.”
물론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시간이 다시 느려진다.
은빛 원이 떠오르고 놈과 내 몸이 교차한다.
아벨의 양쪽 다리와 몸이 분리되며 경쾌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서걱!
사지를 잃은 몸뚱어리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크헉!】
팔의 재생이 멈췄다.
이번에는 타격이 좀 있는 것 같았다.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지만 내 설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른발로 가슴을 짓밟자 아벨이 피를 토했다.
나는 칼자루를 놈의 목에 겨눈 채 입을 열었다.
“협조하고 싶어지면 말해.”
【네놈이 감히···걱.】
아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검이 놈의 혓바닥과 목젖을 동시에 베어낸 탓이었다.
나는 이어서 그의 몸을 내키는 대로 쑤시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허벅지 위까지 이목구비나 아랫도리도 가리지 않고.
【멈춰···멈춰라···그륵!】
“이것도 나름 재밌네. 가지치기 하는 것 같고.”
간만에 느끼는 노동의 보람이었다.
아벨은 혀가 재생될 때마다 뭐라 지껄였지만 나는 한 마디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직 마음이 꺾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맞다. 너 아까 누님한테 뭐라고 했냐?”
【컥! 커어억! 컥!】
“자식들은 어떻게 지내냐고? 이 씨발새끼야. 그게 할 말이냐?”
설득하는 겸사겸사 나바르도제의 복수도 해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대머리를 잡는 데 필요한 존재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먼저 목을 쳤을 터였다.
“좋아 시간도 많은데 잘 됐네. 한번 끝을 보자고.”
【자 잠깐···으극.】
“나도 참 성격이 많이 죽었어. 그딴 꼴을 보고도 참았던 걸 보면.”
【크하아아악!】
갈라진 안구에서 수정체가 튀었다.
푸르른 절경 아래 설득이 이어졌다.
역시 미래 기술이고 나발이고 클래식한게 최고였다.
문득 로돌란의 카라카 심문관이 해줬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심문관에 재능이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엥?”
그렇게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몸부림치던 아벨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뭐야. 뒈졌어?”
【·······】
발로 툭툭 건드려 봐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나 전신에 새겨진 상처 역시 재생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숨만 미약하게 붙어 있을 뿐.
거인의 피로 만든 묘약에도 한계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아하 피곤하셨나 보네.”
상정했던 상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내 팔뚝을 가볍게 베었다.
흘러나온 피가 아벨의 입으로 들어갔다.
몇 초가 지나자 놈의 상처가 다시 아물기 시작했다.
【여 여기는···?】
머지않아 아벨이 깨어났다.
본격적으로 설득을 시작하기 전에 비해서 안색이 나빠진 게 보였다.
그의 가슴팍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던 내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허어억!】
놈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사람 같았다.
아벨은 나를 뿌리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그럴 수 있는 팔다리가 아직 재생되지 않은 채였다.
“그럼 이어서 해볼까.”
나는 담뱃재를 털고 일어났다.
적절한 휴식을 취했으니 더 즐겁게 설득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면은 이미 보라색 카페트처럼 변한지 오래였다.
다시 검을 뽑아드는 순간이었다.
【이 이제 그만해라! 믿겠다!】
아벨이 질색하며 외쳤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반응이었다.
“뭘 믿는데?”
【허억 헉···네가 침략자들을 해치웠다는 것을 믿겠다···확실히 큰소리를 칠만 하더군.】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선은 내 검에 고정된 채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걸 보니 내 설득이 인상깊기는 했나 보다.
“좋아. 그럼 협조할 거냐?”
【하지만 그 정신 나간 계획에는 찬동할 수 없다.
어디까지 알고 지껄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로 침공해 온 침략자를 상대하는 것과 놈들의 본진으로 진입하는 건 완전히 달라.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되찾은 것마저 잃어버릴 거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어리석기는···!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분명 너를 제외한 놈들도 침략자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했지. 차라리 남아 있는 떨거지들을 이용해서 시선을 끌고 너와 내가 침략자 종족의 근원을 탈취하는 거다. 크흐흐 반으로 나눠도 우주를 떨게 할 힘이지.】
아벨이 웃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치는 걸 봐서는 본인이 굉장히 천재적인 주장을 했다고 믿는 듯했다.
확실히 합리적이기는 하네.
“하아아아····”
앞머리를 쓸어넘긴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삼촌을 어찌하면 좋을까.
“쯥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뭐라고?】
“역시 나는 설득에 재능이 없다니까.”
【어 어째서? 그만! 다가오지 마라!】
아벨이 손사래쳤다.
그의 양쪽 어깨 위로는 어느새 작은 팔이 돋아나 있었다.
지금까지의 재생과는 스타일이 달랐지만 어찌됐든 낫고 있는 걸 보니 내 피도 약빨이 좀 듣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다.
더욱 진득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
잠깐만 눈 감고 있어요.
나는 코트를 벗어 카인의 유골함을 덮었다.
그래도 동생인데 계속 보여주기에는 좀 죄송스러운 광경이었다.
“우리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눠 보자. 피를 좀 빼다 보면 정신이 드는 순간이 올 거야.”
【크아아악! 멈춰라!!】
나는 머리 위로 검을 쳐들었다.
겨울의 뿔 위에서 다시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평행 세계에서도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게 참 안타까웠지만 못난 삼촌을 계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