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8. 검과 별(3)
#A58
“와아아 아직도 이렇게 많네! 이리 와서 물고기 좀 봐!”
“우와! 우와아! 진짜다! 낚시해도 돼?”
이릴이 손짓했다.
고개를 돌린 아리아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푸르른 강물 아래 등이 새카만 숭어떼가 유영하고 있었다.
수수한 물고기였지만 어항 속의 아로아나와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크흠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노를 젓던 슐리펜이 헛기침했다.
모녀는 뗏목 가장자리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자칫하면 빠질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본 이릴이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쳤다.
“에헤헤! 걱정 마세요 저 수영 잘 해요!”
“나도! 얼마 전에 에린 언니가 가르쳐줬어!”
“그렇다고는 해도···후우.”
슐리펜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다 보니 님버튼까지 오기는 했다만 초조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아침 댓바람부터 님버튼을 관광했다.
관광이라기보다는 농촌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손에 흙을 묻혀 가며 감자를 캐고 소젖을 짜고 그루터기에 앉아서 방금 짜낸 우유를 마셨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은지라 주민들에게 들키는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릴이 싸 온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은 뒤에는 사공이 되어 뗏목을 몰기에 이르렀다.
물론 기뻤다.
팔자에도 없는 일이었지만 슐리펜은 햇빛과 물만을 요구하는 식물처럼 아내와 딸이 행복해하는 모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즐겁다. 하지만 내게는 이럴 시간이····’
다만 불안할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것은 노가 아닌 검이었다.
이 순간에도 나비로제와 자이파는 더 강해지고 있을 터였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다는 걸까.’
슐리펜이 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질겅거리던 차였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이릴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에헤헤 이제 우리 다른 곳 가봐요. 앗! 저기 하류로 가면 저희 집 근처에 댈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슐리펜은 그렇게 했다.
반짝거리는 이릴의 눈동자에는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물살을 탄 덕에 노를 별로 저을 필요가 없었다.
뗏목에서 내린 그들은 머지않아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외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웠다.
감자를 보관하던 푸대는 여전히 뒷마당에 진열되어 있었다.
주변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이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히도 사람이 없네요. 관광객이 몰려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게 말이오. 운이 좋군.”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사실 운으로만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님버튼 여행이 계획된 당일 즉시 제도 관광청에 연락했다.
최고의 인기 관광지 중 하나인 로난과 이릴의 생가를 전세 내는 것은 그랑시아의 공작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슐리펜은 해냈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밝힐 일은 없을 터였다.
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헤 여기는 뭐야? 창고?”
“아하하 아리아한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창고가 아니고 여기가 엄마가 살았던 집이야.”
“에엑? 이게 집이라고?!”
아리아가 경악했다.
평생을 그랑시아 대저택에서만 살아온 그녀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영지 한구석에 있는 제설 장비를 보관하는 창고보다 작았으니까.
이릴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랑 로난 삼촌은 오랫동안 여기 살았었어. 더 오래 전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계셨지. 우선 들어가 볼까?”
“응! 들어갈래!”
아리아가 끄덕거렸다.
그녀는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오래된 나무 먼지 냄새가 확 풍겨왔다.
겉보다 더 낡은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정말로 변한 게 없네.”
별안간 이릴이 코를 훌쩍였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추억이 피어났다.
가족과 함께 밥을 먹던 식탁 다리 하나가 덜렁거리는 의자.
언젠가 로난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해서 돈을 모아놓았던 큼직한 가마솥····
그녀가 한창 시간 여행을 하던 와중이었다.
“웅?”
갑자기 아리아가 눈썹을 치켜떴다.
원래 큰 눈이 더 크게 떠진 것이 꼭 인기척을 감지한 토끼 같았다.
“왜 그러니 아리아?”
“엄마. 저 방에 뭐가 있어.”
“으응?”
이릴이 시선을 돌렸다.
아리아는 안방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앗 같이 가! 뭐가 있는데 그럴까요?”
“우웅···분명히 여기 어딘데.”
안방에 들어선 아리아가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좁은 방 안에는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큼직한 침대와 작은 옷장만이 놓여 있었다.
슐리펜과 이릴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어느 순간 코까지 킁킁거리던 아리아가 갑자기 엎드리며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아리아···!”
“아앗! 거기는 지지에요!”
부부가 동시에 기겁했다.
이릴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빼내려던 차였다.
한참을 달그락거리던 아리아가 확 몸을 빼냈다.
“찾았따!”
“어? 그 책은····”
이릴이 멈칫거렸다.
딸의 고사리같은 손에는 두껍고 큼직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짝!
별안간 이릴이 손뼉을 쳤다.
“우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히에엑!”
아리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추스른 그녀가 이릴에게 물었다.
“깜짝 놀랬어···엄마 책이야?”
“응. 정확히는 아리아네 외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동화책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어서 매일같이 로난에게 읽어 주고는 했는데. 헤헤 진짜 반갑다.”
분실하기 전까지는 정말 매일같이 읽었던 책이었다.
이릴은 표지를 살살 털어냈다.
진한 녹색을 띠는 표지는 가느다란 덩굴 수천 가닥을 엮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잠깐만요. 그 책 설마····”
별안간 슐리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책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색이 다른 덩굴 몇 가닥이 글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쓰이지 않는 고대의 언어.
슐리펜이 그 단어를 천천히 따라 읽었다.
[조화: 블뢰어]
“맙소사.”
슐리펜의 얼굴이 굳어졌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결과는 같았다.
조화의 블뢰어.
구원자 카인이 집필한 마법서 중 유일하게 발견되지 않은 한 권.
블뢰어를 훑어보던 이릴이 갸웃거렸다.
“응? 왜 그래요?”
“이건 보통 책이 아닙니다. 읽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으셨습니까?”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거나 속이 메스꺼워졌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어···당연하죠. 그냥 책일 뿐인데 그런 일을 겪을 리가 없잖아요. 얼마나 많이 읽었는데요.”
이릴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슐리펜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해 버렸다.
신경쓰이는 부분을 모두 짚고 넘어가기에는 정신력이 부족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아리아. 이걸 어떻게 찾았지?”
“웅? 그냥 기척이 느껴지길래 따라갔는데.”
“기척?”
“응. 지금도 느껴지잖아. 속삭이는 것처럼···답답해 하는 것 같아서 꺼내줬어.”
아리아가 웃었다.
슐리펜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은 아셀 다음으로 뛰어나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여섯 살 배기 딸에게 따라잡힌 것 같았다.
“···그렇군. 잘했다.”
“에헤헤.”
“부인. 그 책은 제가 가지고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응? 네에 저는 상관 없어요.”
이릴은 순순히 블뢰어를 내밀었다.
슐리펜은 마지막 금서를 자신의 배낭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릴은 평범한 동화책이라 했지만 이런 시골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책이었다.
···마침 잘 됐나.
잠시 침묵하던 슐리펜이 입을 뗐다.
“부인. 아무래도 저는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들을 붙여 놓을테니 아리아와 천천히 관광하다 오세요.”
“에엑?! 갑자기 왜요?”
“사실 조금 전에 아리아가 발견한 책은 보통 책이 아닙니다. 가치가 높은 것을 떠나서 굉장히 위험한 유물이지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안전한 장소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목소리가 진중했다.
이유도 논리적인 것이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실제로 카인의 마법서는 세 권 모두 최고 위험 등급 판정을 받는 유물이었으니.
하지만 이릴에게 그딴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슐리펜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아직 보여주고 싶은 곳은 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쏙 빠지다니! 절대 안 돼!”
“하지만····”
“그 책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요. 사실 불안해서 그런 거죠? 지금 이 순간에도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행 내내 초조해했잖아요 당신.”
이릴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리아를 동요시키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속내를 간파당한 슐리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정말이지.”
이릴의 볼이 부풀었다.
슐리펜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렸다.
그는 실제로 돌아가는 대로 훈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된 훈련을 찾아서 폭풍의 검을 벼리기 위해서.
슐리펜의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릴이 말을 이었다.
“바로 못 데려가준 것은 미안해요. 그런데 너무 시간이 일렀다구요. 원래 이맘때쯤 출발하려고 했는데.”
“시간이라니···도대체 어디를 갈 생각입니까?”
“먼저 두 번 다시 안 도망친다 약속해요.”
“······약속하지요. 얕은 꾀를 부린 것도 사과드립니다.”
“좋아요. 그래야지.”
얼굴을 떼어낸 이릴이 미소지었다.
태양 같은 웃음에 슐리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설프게 빠져나가려다 곤혹을 치를 뻔했다.
“우아···재밌다아····”
“앗! 어느새!”
아리아는 은근슬쩍 블뢰어를 꺼내 읽고 있었다.
마룡 오르세의 동화를 읽는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살금거리며 다가간 이릴이 그녀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아리아 공주님! 마지막으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 가 볼까요?”
“히에에! 잘못했어요!”
“에이~엄마도 다 읽은 동화책인데 뭘. 그럼 출발할까?”
“으 으응! 나도 가고 싶어!”
아리아가 빠르게 끄덕거렸다.
그녀에게 입맞춤을 퍼부은 이릴이 슐리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어서 가요. 당신 마음에도 쏙 들 거에요.”
****
밤이 깊었다.
사방에 내려앉은 어둠이 짙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그믐달에서 나오는 빛은 어슴푸레한 수준이었다.
슐리펜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부인. 괜찮습니까?”
“이 정도는 거뜬하죠! 하여튼 당신은 과보호라니까요!”
이릴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문제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아닌 밤중에 산을 타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두 사람의 손에 쥐어진 등불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래도 꽤 오래 걸어서···아름다운 발이 다칠까 걱정됩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길이라서 괜찮아요. 자 힘내서 가자구요!”
이릴은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한 번도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다.
돌과 나무뿌리가 잔뜩 솟아나 있었지만 그녀는 주저 없이 나아갔다.
“쿠우···쿠우우····”
아리아는 이미 지쳐서 잠든 뒤였다.
뗏목 여행에 이어서 등산까지 해 버린 탓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액체가 실시간으로 슐리펜의 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곳에 즐겨 찾아왔었다니···믿어지지가 않는군.’
슐리펜은 개의치 않았다.
허나 이릴이 어린 시절부터 여기를 즐겨 찾아왔다는 사실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거리도 거리거니와 굉장히 험한 장소인데.
여기의 어디서 매력을 느꼈다는 걸까.
뺨을 스치는 산바람이 으스스했다.
불현듯 앞장서서 걷던 이릴이 입을 뗐다.
“있죠.”
“예?”
“내가 옛날 이야기 해준 적 있던가요?”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차분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였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로난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