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4.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6)
#A54
레란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휘적였다.
에르제베트의 목을 조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연신 기침을 내뱉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캑 커흑! 도대체 저한테 뭘 물어보려는 건데요?”
“음···말은 거창하게 했는데 사실 면접이라 해도 별 거 없어. 그냥 각오를 보려는 거니까.”
“각오?”
“응. 나는 야망 있는 마법사를 좋아하거든. 아가씨는 그 자질이 충분해 보이고. 일단 같은 여자···그것도 결혼한 여자를 진심으로 연모하는 것부터 범상치가 않아. 아주 예쁜데 어디서 만난 사람이야?”
레란트는 아데샨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진 채였다.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그런 건 알아서 뭐 하시게요?! 멋대로 남의 머릿속을 읽다니 무례하기는···! 맞아. 그 외형 좀 바꿀 수 없어요?”
“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일부러 힘 좀 써서 베낀 건데 머리카락 빼고는 다 똑같지 않아?”
레란트가 에르제베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을 썼다는 말이 허풍이 아닌지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들꽃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체취까지.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아 진짜 하지 마세요! 이런 짓은 아데샨 언니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하하 진짜 좋아하나 보네. 미안하지만 못 바꿔주겠어. 아가씨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거든.”
“당신 정말···! 아니에요. 침착해. 이럴 시간이 없어요.”
에르제베트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그림자 대공의 폭주가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오필리아와 브라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면접인지 뭔지를 통과해서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잡담은 여기까지만 해요. 어서 그 면접이라는 걸 시작하시죠.”
“아하하 위세가 좋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그 전에 확인해야겠어요. 당신의 독자가 되면 제 친구들을 구할 수 있는 건 확실하겠죠?”
“그야 당연하지. 나는 지혜의 레란트다. 자아도 빼앗긴 멍청이 바쥬라에게 지지는 않아.”
레란트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자신만만한 태도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뒤로 세 발자국을 물러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질문할게. 둘 중에 마음에 드는 선택지를 고르면 돼. 원래는 여지 따위를 주지 않지만 아가씨는 얼굴이 내 취향이니까 특별히 대우해 주는 거야.”
“말씀하세요.”
“좋아. 첫 번째는 네 남은 수명의 반을 바치는 거야. 더도 덜도 말고 딱 절반만. 각오를 확인하는 유서 깊은 방법이지.”
“좋네요. 그걸로 할게요.”
에르제베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레란트가 당황하며 손사래쳤다.
“워 워. 진정해 아가씨. 수명의 절반이 우스워? 장생종도 아니면서 너무 성급한 거 아냐?”
“상관 없어요. 제 친구들을 확실하게 구할 수 있다면.”
“생각보다 더 거침없는 아가씨네···일단 두 번째 선택지까지 들어봐. 장담컨데 이쪽이 더 마음에 들 테니까.”
별안간 레란트가 손을 휘적였다.
그녀와 에르제베트 사이의 공간이 벌어졌다.
균열 너머로 대공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르제베트가 경악했다.
“다 다들!”
오필리아와 브라움은 폭주하는 대공의 그림자 속에서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몇 분을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에르제베트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 번째는 뭔데요?!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요!”
“진정해. 지금 말하려고 했으니까. 두 번째 선택지는···아아 나는 참 자비롭다니까. 저기 있는 친구들과 네 의동생 시온의 기억을. 정확히는 아가씨에 대한 기억만 내게 바치는 거야.”
“······기억을요?”
“응. 나는 지식을 모으는 걸 좋아하거든. 수 년에 걸친 사람의 기억은 지식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사람이 대화하고 만나고 경험한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까.”
레란트가 웃음지었다.
에르제베트는 경직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뿐사뿐 다가온 레란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맹세하건데 어떤 부작용도 없을 거야. 그저 네가 누군지만 잊어버리게 될 뿐이지. 나를 써낸 카인 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제 기억은 빼앗지 않는 건가요?”
“당연하지.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너는 얼마든지 친구들을 추억하거나 그리워할 수 있고 기존에 알던 정보를 기반으로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어. 후 진짜 인심 썼다.”
레란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자신의 수명 절반과 타인의 기억 일부라니.
두 번째 선택지는 말 그대로 순수한 호의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참 귀엽단 말이지. 잘 사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같아.’
그녀는 간만에 나타난 전도유망한 마법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을 정도로.
잠시 침묵하던 에르제베트가 입을 뗐다.
“레란트. 결정했어요.”
“그래 잘 선택했어. 지금 바로 기억을 뽑아 줄까?”
“아니요. 수명을 바치겠어요. 대신 꼭 제게 힘을 주세요.”
“······뭐라고?”
레란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에르제베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긴 레란트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아가씨는 굳이 본인의 수명을 바치겠다는 건가? 남의 기억이 아니라?”
“네.”
“왜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지? 저들은 너를 잊지만 너는 저들을 기억하고 있잖아. 그 점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더 유리한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텐데?!”
“레란트. 친구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어?”
레란트가 당혹성을 흘렸다.
에르제베트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실 친구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죠. 동전 한 닢이라도 허락 없이 가져가면 도둑질이에요. 제 기억이라면 모를까 타인의 기억에 손을 댈 수는 없어요.”
“이거 내 예상보다 훨씬 고지식한 아가씨였군. 너처럼 뛰어난 마법사의 수명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모르나?”
“알아요. 양떼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드높겠죠. 억만금으로도 살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과 이 선택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에르제베트의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명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가혹한 처사였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친구들과 여동생의 기억이.
그것도 자신과 함께해온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에르제베트에게 있어 그들과 함께 쌓아온 추억은 마법사로서의 재능보다 여명 마탑주의 자리보다 훨씬 더 소중한 보물이었다.
어쩐지 로난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해야 할 일이라 했다던가.
레란트와 눈을 맞춘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제 대답이에요.”
“······좋아. 그렇다 이거지.”
레란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내 정색한 그녀의 얼굴이 겨울처럼 차가워졌다.
에르제베트를 내려보던 그녀가 손을 뻗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손바닥이 수명을 거두어 가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담담하게 징수를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합격이다. 아가씨.”
툭.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에르제베트의 눈이 커졌다.
“에?”
“아하하! 이게 얼마만이람.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아직도 이런 마법사가 남아 있었다니. 엘시아보다 착한 애가 있기는 했구나.”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레란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 웃고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귀여운 아가씨. 사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야심이 아니야.”
“그 그럼요···?”
“의외로 자질도 완전히 절망적인 수준만 아니면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마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니까. 중요한 건 가르쳐줄 수 없는 부분이지. 사람의 됨됨이 같은 거.”
레란트가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에르제베트의 양쪽 볼을 부드럽게 감싼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얼굴과 얼굴이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순 자기만 아는 사람이 널린 세상에서 아가씨처럼 심성이 고운 마법사는 찾기 힘들거든. 너는 재능도 뛰어나지만 더 중요한 걸 갖고 있어.”
“무 무슨···!”
“시간이 없다 했으니 서둘러야겠지.”
에르제베트의 귀가 달아올랐다.
숲처럼 짙은 속눈썹마저 아데샨과 닮아 있었다.
레란트의 깊은 눈동자는 자신이 평생토록 선망하던 잿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지혜의 레란트는 너를 독자로 인정한다. 그대의 수명이 다하거나 내게 쓰여진 지혜를 모두 습득하는 순간까지 나는 네 서가에 머물겠다. 언젠가 그대가 진리를 깨닫기를 소망하면서.”
갑자기 레란트가 에르제베트의 턱 끝을 잡아당겼다.
책과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검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
“앞으로 잘 부탁해. 에리.”
얼굴을 떼어낸 레란트가 입술을 핥았다.
온통 새하얗던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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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폭주가 시작되고 오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커윽!”
“브라움.”
오러를 펼치며 분투하던 브라움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드러난 등판 위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갓난애의 머리만한 구멍을 본 오필리아가 눈썹을 치켜떴다.
“언제 이렇게 다쳐서···! 기다려 봐. 지혈해 줄게.”
“하하 고맙소···쿨럭 그나저나 그림자 대공은 역시 아무나 하는게 아니군. 저건 강해도 너무 강하잖아.”
브라움이 중얼거렸다.
대공의 촉수와 손발이 사방에서 방어막을 후려치는 중이었다.
바쥬라마저 삼켜 버린 대공은 폭풍우 몰아치는 밤바다처럼 날뛰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손짓하자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말하지 마.”
몸 밖으로 빠져나온 혈액도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허나 브라움의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뼈도 상당히 많이 부러졌고 출혈과 무관하게 기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 버렸다.
이대로라면 오러는 고사하고 본인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
오필리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죽지 마.”
“나도 그러고 싶다! 누구라고 이 음침한 곳에서 죽고 싶겠나! 쿨럭 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브라움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역시 즐거워서가 아닌 절망적인 상황을 잊기 위한 웃음이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을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입을 뗐다.
“······브라움. 내 권속이 될래?”
“뭣이라? 권속?”
“응. 그러면 너는 살 수 있어. 설령 온몸이 찢기더라도 부활할 수 있어. 흡혈귀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나는 원래 권속을 만들지 않지만····”
말꼬리가 늘어졌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새하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못지 않게 차가워진 브라움의 손을 쥐며 말을 이었다.
“너라면. 만들어줄 수 있어.”
“오 오필리아···크오옥!”
브라움은 대답을 맺지 못하고 핏덩이를 토했다.
그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선택해야 했다.
인간으로 죽느냐 밤의 일족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느냐.
그가 몽롱해진 의식 속을 헤매던 와중이었다.
브라움의 목덜미로 입을 가져가던 오필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르제베트?”
“···뭐?”
브라움이 움찔거렸다.
오필리아의 시선은 어둠이 뒤덮고 있는 도서관 한구석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오래 전 대공에게 삼켜진 공간.
“뭐야. 어디에 에르제베트 양이 있다는 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브라움이 뭐라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아?!!
두 사람이 바라보던 자리의 어둠이 불타 사라지며 찬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