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0. 짐승들(12)
#A40
눈보라가 잦아들고 있었다.
두 맹수의 대치는 침묵 속에 이루어졌다.
흉악무도한 살기가 자이파의 어깨 위로 일렁거리고 있었지만 바렌은 결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던 자이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생각났다. 예전에 황궁에서 내 앞을 가로막은 애송이로군.”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때는 정말로 등골이 오싹했죠.”
바렌이 미소지었다.
검격을 막는 순간부터 아련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수십 년 전 그는 로난에게 살의를 품고 접근하려는 자이파를 저지한 적이 있었다.
자이파를 위아래로 훑은 바렌이 말을 이었다.
“환골 탈태의 경지를 보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군요. 시간을 베어낸 것을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는 나비로제 그 뱀이겠지.”
“정확합니다. 원래도 강하셨지만 이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셨지요.”
“그리 꼴사나운 패배는 처음 겪었지. 헌데 막상 같은 입장이 되니 이해가 가는군.”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나비로제와 마찬가지로 젊음을 되찾았기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참패할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단순히 신체가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는 걸 떠나서 기량 자체가 늘어나 있었다.
‘다행히도 기분이 나아지신 것 같군요. 부디 말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바렌이 굵은 침을 삼켰다.
식은땀이 발바닥에 맺히고 있었다.
한껏 폼을 잡으며 가로막았지만 사실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자이파의 검격을 막아낸 오른팔은 아직도 징징 울리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야. 기필코 본모습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저지해야 한다.’
인간화 저주에 걸렸는데도 이 정도였다.
수인 대 수인으로 상대했다가는 승산이 없었다.
아까처럼 막아내기는커녕 사지가 종이처럼 잘려나갈 터.
자이파의 눈치를 살피던 바렌이 사근사근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노기가 가라앉으셨으면 함께 돌아가시지요. 뒷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매듭을 짓는 것은 내 역할이니. 잠깐 비켜라.”
“예?”
갑자기 바렌을 밀친 자이파가 검을 쳐들었다.
넘실거리며 올라온 오러가 순식간에 검신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가볍게 휘두르는 동작과 함께 허공에 검은 선이 나타났다.
“자 잠깐만요!”
바렌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자이파의 손목을 잡아채자 아슬아슬하게 궤도가 비틀렸다.
공간을 가르는 참격은 마을이 아닌 그 옆의 해안가에 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아-!!
검은 선이 바다를 가로지름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벽처럼 일어난 물보라가 지평선을 가렸다.
하늘에 머물러 있던 물이 쏟아지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맙소사.”
바다 한복판에 폭포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확히 자이파의 오러가 긋고 지나간 자리였다.
해저에 새겨진 공간의 균열이 게걸스럽게 바닷물을 삼키는 중이었다.
“뭐 뭐야 이건?!”
“히이이익! 바 바다가!”
마을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막 북풍단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들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민간인 부대가 들이닥칠 걱정은 덜었다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두 번째 공격까지 저지당한 자이파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왜 방해하는 거지.”
“방해라니···! 제발 진정하세요 자이파 님. 저들은 민간인입니다!”
“알고 있다. 수인에게 맹목적인 증오를 품고 있는 민간인이지. 저들이 남아 있는 한 북부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직 죄가 없는 사람들을 죽일 생각입니까? 저 사람들 중에는 아직 아이들도 있다구요. 피는 결코 피로 씻을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난 수십 년 간 내가 저지른 과오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 그럼에도 증오란 결코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더군.”
자이파가 레테를 힐긋거렸다.
그는 아직도 잔해를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다리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앉은뱅이의 말이 맞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대물림되는 증오가 더 확산되기 전에 나는 매듭을 짓겠다.”
“그 매듭이라는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입니까?”
“전체로 보면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저들처럼 깊은 원한에 사로잡힌 자들만 철저하게 축출할 거야. 역병 환자를 격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지.”
“그런 궤변을···!”
바렌이 경악했다.
그럴싸하지도 않은 헛소리였다.
아무리 철저하게 숙청 작업을 해도 생존자는 반드시 나타난다.
모든 것을 잃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는 다시금 대륙 어디선가 대화재가 될 불씨를 키워낼 터였다.
저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레테가 그러하듯이.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자이파 님이 맞기는 한 걸까?
한참이나 괴로워하던 바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군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깨달아?”
“네. 지금의 자이파 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인간화 저주와 환골탈태 중 뭐가 원인일지는 몰라도 충격을 받아 머리가 이상해지신 것 같군요.”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 없는 신랄한 비난이었다.
실제로 자이파는 어딘가 이상해진 채였다.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붉은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흥미를 느낀 자이파가 눈썹을 으쓱였다.
“호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입니다. 제가 볼 때 지금의 자이파 님은 선망받던 검성도 제 아내가 존경했던 상관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니 상당한 달변가였군. 그럼 누구라는 거냐.”
“누구긴 누굽니까? 동생의 농간에 속아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전대미문의 학살자지요. 무고한 변경백령의 시민들을 학살하며 분노를 표출하던 그 괴물 말입니다.”
바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승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이파가 인간이 아닌 수인 상태였더라도 똑같이 말했을 터였다.자이파의 얼굴이 굳어졌다.
“······솜털. 죽고 싶나?”
“그렇게 노려보셔도 번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데샨 대장군께서 작금의 상황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요. 애당초 자이파 님이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은 제국군에게 무고한 처자식을 잃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자이파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가족은 그의 몇 안되는 역린이었다.
주저없이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찰나였다.
‘이 애송이 힘이····’
자이파의 미간이 구겨졌다.
바렌에게 붙들려 있는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아귀보다는 거대한 바위 틈새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인간화 저주에 걸려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세상에 이래서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군요.”
덩달아 놀란 바렌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인간의 몸으로 겪은 개고생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전성기의 컨디션을 되찾은 신체 능력은 뒤룩뒤룩하게 쪄 있을 때보다 눈에 띄게 나아져 있었다.
“놔라.”
“그러지요.”
바렌은 순순히 손의 힘을 풀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는 결판을 지을 수 없었다.
붙들렸던 자이파의 손목에는 멍자국이 짙게 남아 있었다.
“아무튼 저는 자이파 님을 막아야겠습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최고의 해결법이 있더군요. 우리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게 뭐지.”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유구한 전통을 지닌···전사의 방식이지요.”
파아아아···
별안간 바렌의 몸 위로 금빛 광채가 피어났다.
갑옷처럼 전신을 휘감은 빛무리는 고도로 응축된 오러였다.
“나 바렌 파나시르가 결투를 청하노니.”
군살이 사라진 자리에 근육이 들어찼다.
선명하게 올라온 핏줄은 넘칠 듯한 생명력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임전의 자세를 취한 바렌이 준엄하게 읊조렸다.
“용기가 있다면 응하시오. 자이파 터르겅.”
“하.”
자이파가 실소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정식 결투 요청이었다.
상황과 조건을 불문하고 패자는 승자에게 승복해야 하는 힘의 재판.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바렌과 마주보고 섰다.
“받아들인다.”
눈동자에 맴돌던 광기가 잦아들었다.
자신의 절반도 살지 않은 애송이가 보내는 결투 신청은 그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그것도 훌륭한 전사의 자질을 갖춘 애송이가.
“각오는 되어 있겠···”
자이파가 경고하듯 읊조리던 와중이었다.
눈앞으로 쇄도해온 바렌이 정권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검을 눕혀 방어한 자이파가 입꼬리를 올렸다.
“버르장머리 없기는.”
자이파는 바렌을 탓하지 않았다.
본인이 승낙한 순간 결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려던 차였다.
쉬릭!
채찍처럼 날아든 바렌의 꼬리가 자이파의 몸을 휘감았다.
“······!”
“갑니다.”
한순간의 결박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바렌의 주먹이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자이파가 다시 방어했지만 바닥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해 버렸다.
“큭.”
쾅!
쾅!
쾅!
쾅!
쾅!
다섯 개의 층을 부수며 추락하던 자이파가 지면에 처박혔다.
바렌은 즉시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강풍에 나부끼는 갈기가 황금색 불길을 연상케 했다.
주먹에 온 힘을 끌어 모은 바렌이 오래도록 잊고 있던 야성을 담아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
싸움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결판이 났다.
“컥! 커흥 분하다···!”
바렌이 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감싸던 황금빛 오러는 잔불처럼 미약해진 채였다.
그의 가슴 위로는 이전에는 없던 다섯 갈래의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제법이군. 솜털.”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그는 완파된 요새의 잔해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구름이 물러간 자리에 만월이 빛나고 있었다.
바렌이 울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쿨럭 저주만 풀리지 않았어도···!”
“네가 이겼을 수도 있겠지. 아마도 이겼을 거다.”
그리 대답하는 자이파는 수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쇠했던 웨어타이거의 육체도 젊음을 되찾은 채였다.
털을 타고 흐르는 달빛이 아름다웠다.
“역시 내 몸이 좋군.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저주였나.”
자이파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온 몸에 힘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바렌이 패배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시종일관 자이파를 몰아 붙이던 바렌은 그가 갑자기 본모습을 되찾자마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육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기술이 형편없더군.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아···하아아····”
“뭐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내 부하들을 다 합친 것보다 나았어. 설마 너 같은 솜털에게 발톱을 꺼내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이파의 발치에는 산산이 조각난 언월도가 뒹굴고 있었다.
기나긴 전투 도중에 바렌이 부러뜨린 것이었다.
바렌은 자이파가 수인으로 변한 뒤에도 한참을 버티다 쓰러졌다.
어찌나 맷집이 좋은지 곤두세운 발톱에 오러를 부여한 뒤에야 결정타를 먹일 수 있었다.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 그 기술을 받고 살아있는 건 다섯 놈이 안 되거든. 오랜만에 좋은 승부를 했다.”
“민간인 학살을···그만 두십시오. 더는 사람이 서로를 상처입혀서는…안 됩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몇 번을 봐도 참 이타적인 사자였다.
자이파가 입맛을 다셨다.
한바탕 날뛴 그의 머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던 자이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별안간 몸을 일으킨 자이파가 레테에게 다가갔다.
그는 끝내 잔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실신해 있었다.
쿵.
자이파가 가볍게 발길질하자 그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던 잔해가 날아갔다.
“끄 끄아아아아악!”
정신을 차린 레테가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다시 통하는 바람에 통증이 재발한 탓이었다.
자이파와 눈이 마주친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흐억···자 자이파?!”
“살아 있군. 썩 꺼져라.”
자이파가 턱짓했다.
레테는 뭐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등을 돌려 엉금엉금 기어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바렌이 벙쪄 버렸다.
“자이파 님.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미움에 눈이 멀어 다시 한 번 악순환을 일으킬 뻔했어. 내 죄는 앞으로도 내가 안고 가겠다.”
누구의 음모에 걸려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것은 자이파 본인이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원망과 증오는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처의 예후는 시간에 맡기지. 증오의 굴레는 여기서 끊는다.”
정말…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무고한 피가 흐르는 참사는 막은 듯했다.
바다 한복판에 새겨진 폭포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이제 세크리트와 함께 뒷수습만 하면 될 터였다.
바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차였다.
그럼 슬슬 따라와라. 오랜만에 키울 만한 놈을 만났군.
예?
“네놈의 가장 큰 문제점은 둔하다는 거다. 그런 몸을 타고났으면서 군살이 붙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내가 그 썩어빠진 근성을 고쳐주마. 바렌.”
자이파가 바렌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부상에 신음하던 바렌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름으로 불리는 건 처음인지라 몹시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