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9. 짐승들(11)
#A39
황색 안개가 자욱했다.
요새 내외로 흘러 넘치는 기체는 수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학 병기였다.
방독면을 쓴 북풍단 두 명이 독무를 가르며 뛰쳐나왔다.
“끼야압! 죽어라!”
“짐승 놈아 여기가 바로 네 무덤···컥.”
자이파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두 명의 머리가 동시에 날아갔다.
곧바로 후방에서 세 명이 더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안개에서 나오기 무섭게 토막이 나 죽었다.
“끝이 없군 그래····”
자이파가 입술을 비틀었다.
아무리 죽여도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
광활한 부지 전역에서 모여든 북풍단은 생각보다 머릿수가 많았다.
더군다나 온갖 최신 장비로 무장한 북풍단과 비교했을 때 그는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몸에는 넝마가 된 망토가 얼굴에는 그것을 찢어 만든 복면 한 장만이 둘러진 채였다.
‘나도 늙었군.’
하지만 헐벗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자이파를 진정 고전시키는 것은 인간이 된 이후로 체감되는 세월의 무게였다.
전투를 개시했을 때보다 현저하게 검이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푹!
기어코 사각을 노리며 날아온 화살 한 발이 옆구리에 박혔다.
“마 맞았다! 내가 맞췄어!”
안개 너머에서 환호가 들려왔다.
자이파는 즉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도약하며 검을 내질렀다.
기뻐하던 단원은 그대로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다.
인근에 있던 세 명을 더 해치운 찰나였다.
“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독안개가 기어이 폐로 스며든 모양이었다.
푹!
푹!
휘청거리는 틈을 타 날아온 쇠뇌 두 발이 각각 등짝과 허벅지에 박혔다.
촉에 소금이라도 발랐는지 통증이 엄청났다.
이어서 손아귀처럼 펼쳐진 그물이 자이파를 덮쳤다.
“허튼 짓을.”
자이파의 검이 십자를 그렸다.
원래 단칼에 베어지던 그물은 아교를 바른 것처럼 뻑뻑해져 있었다.
가까스로 그물을 벗어난 자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팔의 피부가 모르는 새 벗겨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선홍색 근육은 그 결이 확실하게 보였다.
“인간의 몸이란····”
이제는 통증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독무가 시력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눈앞이 부옇게 번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자이파는 근면하게 검을 휘둘렀다.
사람을 베고 날아드는 무기를 베었다.
미처 베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몸을 상하게 했다.
“다들 몰아붙여! 놈도 힘이 거의 다 빠졌어!”
“네놈의 전설도 여기가 끝이다!”
반면 북풍단의 사기는 끝도 없이 높아지는 중이었다.
인간으로 변한 자이파도 나름의 위엄과 패기를 갖추고 있었으나 원래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늘어나는 상처.
피와 땀을 흘리며 분투하는 자이파의 모습은 북풍단으로 하여금 그 또한 괴물이 아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여기까지인가.’
반면 자이파는 여전히 덤덤했다.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사인이 전사(戰死)라는 것을 단 한 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아쉽군.”
다만 씁쓸할 뿐이었다.
전사에도 나름의 격이 있었다.
기왕 싸우다가 죽는다면 나비로제나 로난 슐리펜과 같은 일류 검사에게 죽고 싶었다.
헌데 이런 비루한 모습으로 마무리를 짓게 될 줄이야.
자이파가 벽을 등진 채 분투하던 와중이었다.
-쉬이이익!
별안간 독무 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기다란 창 하나가 그 사이로 날아왔다.
조금 빠르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쳐낼 수 있는 거리였다.
인접한 적을 떨쳐낸 자이파가 창을 받아쳤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는지 손이 징징 울렸다.
이건 쏜 놈을 손봐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검을 고쳐 잡은 자이파가 도약하려던 찰나였다.
콰앙!
등지고 서 있던 벽이 부서지며 아까와 같은 창이 튀어 나왔다.
“······컥.”
자이파가 검붉은 피를 토했다.
시선을 내리자 배를 뚫고 자라난 쇳덩이가 보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의 머리는 자신의 피로 젖어 번들거렸다.
진작에 한계를 초월했던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자이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쓰러졌다! 다들 포위해!”
“절대로 긴장을 놓지 마라!”
벌떼처럼 몰려온 북풍단이 자이파를 에워쌌다.
우연히 눈을 마주친 단원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자이파의 적안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살벌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소란이 한창 커져갈 무렵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자이파.”
웬 중후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삽시간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북풍단의 무리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붉은 코트를 입은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그래 인간의 몸은 좀 마음에 드시는가?”
숙원을 이룬 레테의 입꼬리는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평생을 갈망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온몸에 박힌 화살 독에 절어 변색된 피부.
피투성이가 된 자이파의 몰골은 만신창이라는 단어 따위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자이파의 앞에 멈춰선 레테가 침을 뱉었다.
“그럴 리가 없지. 강인한 짐승에 비하면 연약하기 짝이 없을 테니. 네놈이 변경백령에서 찢어 죽인 자들처럼.”
“두 두목. 너무 가까이 가면 위험합니다!”
“걱정 마라. 짐승 백 마리도 잠재울 마비독이 창에 발라져 있으니까.”
레테는 걱정하는 부하를 진정시켰다.
자이파의 복부를 꿰뚫은 단창은 그가 직접 조준하고 발사한 것이었다.
알칼토 계곡의 거수들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는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바르사에 있었나.”
“그래. 바로 맞췄다. 네놈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고대했는지 모를 거야.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은 그날 밤에 사라졌다.”
콱!
레테가 창대를 짓밟았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울걱거리며 흘러나오는 피는 순식간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크윽····”
“절대로 곱게 죽이지는 않아. 머리를 포함한 네놈의 몸뚱어리는 모조리 박제되어 박물관에 보낼 거다.”
“마음대로. 다만 나로 끝내라···죄 없는 동포들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마.”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는군. 네놈의 죽음은 시작일 뿐이야. 주제도 모르고 북부에 빌붙어 사는 짐승놈들의 주검이 차례대로 네 옆에 전시될 거다.”
레테가 코웃음쳤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단원들이 호응하듯 웃었다.
그들은 고작 자이파의 목을 거둔 지점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북부는 인간의 땅이다. 짐승과의 공존은 아니 될 말이고 시간이 지나도 네놈들의 죄는 사라지지 않아. 우리는 그 단죄자다.”
“···그런가.”
자이파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은 과거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위기에 몰린 것이 처음일 뿐 송곳니의 밤으로 인해 앙심을 품은 자들은 지금껏 수도 없이 만나왔었다.
“결국···달라지는 건 없는 건가.”
가슴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결국 증오의 연쇄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십 년 전의 원한은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서 준동하며 복수의 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면 차라리.
“너는 북부인이 보는 앞에서 처형될 거다. 네 주검은 가장 먼저 바르사에···커헉!”
레테가 쌓인 말을 쏟아내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자이파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레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두목!”
“젠장! 쏴라!”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석궁을 들고 있던 북풍단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에서 쏘아진 쇠뇌가 자이파에게 박혔다.
“······”
상황은 머지않아 끝났다.
고슴도치가 된 노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레테가 목을 부여잡으며 기겁했다.
“크헉! 허어억! 미 미친 자식 같으니!”
다 죽어가던 노친네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세였다.
잠깐 붙들렸던 목에는 검붉은 피멍이 남아 있었다.
서둘러 자이파의 상태를 확인한 레테가 경악했다.
싸늘하게 식은 몸은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이래서 짐승 놈들은···!”
레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자이파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자르지 못하다니.’
평생을 증오하던 원수의 최후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레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블란타가 있었다면 훨씬 일이 쉬웠을 텐데 이 자식은 어딜 간 거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눈치 없는 부하 한 명이 그를 불렀다.
“……그 두목?”
“후우우···뭐냐.”
“뭔가 이상합니다.”
“응?”
레테가 고개를 돌렸다.
부하는 손가락을 뻗어 자이파의 시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백한 주검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바닥에 엎어진 채였다.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지?”
“머리카락이···자라고 있습니다.”
“뭐…?”
레테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과연 부하의 말대로였다.
짧았던 자이파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목덜미까지 뒤덮고 있었다.
자라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건 또 뭐야···?”
레테가 주춤거렸다.
분노로 좁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부하들의 당황 어린 면면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으음 잠깐 대기해라.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
“저 저거!”
레테가 지시를 내리려던 차였다.
갑자기 부하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재차 뒤를 돌아본 레테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명히 죽었던 자이파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이군.”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허리춤까지 자라 있었다.
다시 드러난 몸에는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 도대체 무슨!”
레테가 경악했다.
자이파의 복부를 관통했던 창은 반으로 토막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여타 화살이나 창검도 마찬가지로 몸에서 빠진 채였다.
더군다나 상처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른 몸에서는 노화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완연한 청년의 때로 돌아가 있었다.
“이상하군···분명히 끝난 줄 알았는데.”
자이파가 혼잣말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쥐었다가 피는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레테를 비롯한 북풍단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경직되어 있었다.
“···두목. 도망쳐요.”
“뭐라고?”
“어서요.”
그때 말을 걸었던 부하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자이파에게 고정된 눈동자는 호랑이를 마주친 토끼처럼 떨리는 중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나 감지력이 뛰어났던 그는 볼 수 있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자이파의 기운을.
떡 벌어진 어깨 위로 피어나는 살기는 수인의 모습을 취했을 때조차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레테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씨발 얼른 도망치라고!”
“잠깐 너···!”
부하가 그를 밀쳐냄과 동시에 자이파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벽과 천장.
자리에 있던 모두의 가슴 위로 검은 선이 그어졌다.
뒤로 넘어진 레테의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사방에 그어졌던 선이 일제히 벌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두 동강이 난 몸뚱어리들이 폭발했다.
피와 내장이 비산하는 와중 주변이 무너져 내렸다.
굉음이 작렬한지 머지않아 눈보라 몰아치는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희미해졌던 자이파의 형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거였군. 나비로제.”
탁 트인 풍경이 썩 마음에 들었다.
입가의 피를 핥은 자이파가 스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카장창!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롱소드가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흐아아악!! 크 끄아아악!”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무너진 천장이 레테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거대한 바윗덩이 아래로 끈적한 핏물이 새나오고 있었다.
그를 제외한 생존자는 없었다.
레테를 힐긋거린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사과하마. 내 잘못이다.”
“흐윽…뭐 뭐라고?!”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않아서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했다. 피의 굴레는 결국 피로 지워야 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여기서 모든 것의 매듭을 짓겠다.”
그는 주변에 떨어진 롱소드를 집어들었다.
운이 좋게도 칼집째로 남아 있었다.
자이파의 시선이 절벽 아래 마을을 향했다.
“네 말대로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답이야.”
“그 그만둬라 자이파! 멈춰!”
자이파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오러로 휘감긴 검신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공간을 절삭하는 힘은 과거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진 채 맥동하고 있었다.
“안 돼!!”
“선택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이지.”
마을 하나쯤은 종이처럼 찢어발기고도 남을 터였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쥔 자이파가 횡으로 검격을 그으려던 순간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으읍!”
허공을 가르던 검이 멈춰섰다.
칼날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천지를 흔들었다.
자이파가 고개를 들자 덩치 좋은 웨어라이온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을 황금빛 광채로 휘감고 있는 사자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역사적인 첫 공격을 저지당한 자이파가 눈을 부라렸다.
“넌 뭐냐.”
“바렌 파나시르입니다. 전대 검성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