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4. 짐승들(6)
#A34
“원래는 안 되는 거야. 특례라는 걸 명심하라고.”
앞장서서 걷던 여인이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녀는 바렌과 함께 챔피언의 숙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횃불이 어둠 깔린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으···물 물 좀 줘····”
“커헝! 크아아악!”
발 아래에서는 고통에 찬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바로 아래층 투기장에 배정된 수인들이 내는 소리였다.
바렌은 입술을 질겅이며 격해지려는 감정을 억눌렀다.
조금 전에 슬쩍 보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여긴 미쳤어요.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더운 것도 잊어버렸다.
패전국의 포로도 그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을 터였다.
거대한 철창 안에 갇힌 투사들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목에는 원격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고 하루에 두 번 배급되는 식사는 수용 인원보다 턱없이 적어서 언제나 싸움이 벌어졌다.
그마저도 먹기 위해서는 북풍단원들이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야 했다.
개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으면서.
바렌이 침묵하자 여인이 말을 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네가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헛소리는 집어치우라 했을 거야.”
“···당연하죠 아름다운 레이디. 이번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감정을 다듬은 바렌이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지금은 세크리트를 구출하는 작전에만 신경써야 했다.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윽 너 또 그런 말을····”
원래는 밥 먹듯 남자를 갈아치우면서도 정을 주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잘생긴 놈의 거듭되는 외모 칭찬은 저 밑바닥에 처박혀 있던 수줍음을 인양하는 마력이 있었다.
바렌을 돌아본 여인이 눈웃음쳤다.
“나도 예쁜 거 아니까 너무 그러지 마. 확 여기서 해버리고 싶어지잖아.”
“하하 그건 좀 참아 주시죠.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당연히 농담이지. 나도 털 날리는 곳에서 즐기는 취미는 없어.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는 못 돌아갈 테니까 상사한테 할 변명이나 미리 생각해두는게 좋을걸?”
여러모로 강렬한 도발이었다.
바렌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물론 종족 자체가 달랐기에 그녀가 기대하는 일은 영영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이 말도 안되는 작전이 먹혀서 다행입니다. 제국의 금사자도 아직 죽지 않았군요.’
바렌은 내심 안도했다.
노골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여기까지는 매우 성공적인 듯했다.
책으로나마 인간의 사랑을 많이 접해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복도의 끝에 다다른 여인이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섰다.
“도착했어. 여기가 그 표범 방이야.”
“아하. 그래도 챔피언이라고 독방을 주는군요.”
여기도 챔피언을 우대해주는 관습 정도는 존재하는 듯했다.
쇠창살이 아닌 문짝을 달아줘서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높이가 3m에 이르는 철문은 은행에서나 쓸 법한 육중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특례 중의 특례지. 워낙에 잘 싸우니까 두목도 인정해 주더라. 어느 순간 부터는 성격이 얌전해지기도 했고.”
“안에 들어가볼 수도 있습니까?”
“미쳤어? 아무리 잘해줘도 짐승은 짐승이야. 빈틈을 약간이라도 보이면 너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일걸.”
여인이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챔피언의 열성팬인 그녀는 이 표범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지를 뻗은 그녀가 문에 달린 작은 창문을 가리켰다.
“왜 그렇게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지 모르겠네. 굳이 대화를 하고 싶으면 이 창문을 통해서만 해. 행여나 손가락 같은 거 집어넣어 볼 생각도 하지 말고.”
“명심하지요.”
“좋아. 그럼 부른다? 야 블란타!”
쾅쾅쾅!
갑자기 여인이 거칠게 철문을 두드렸다.
소리가 워낙 커서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머지않아 문 너머에서 반응이 돌아왔다.
“아씨······자고 있었는데. 뭐꼬?”
“자고 있었다고? 너 오늘 저녁에 경기잖아. 이게 빠져가지고는.”
“그까이꺼 대충 해도 이긴다. 그나저나 이 목소리는···베스퍼 지부장 맞나? 댁이 여까지 무슨 일이고?”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창이 벌컥 열렸다.
굉장히 날렵하게 생긴 웨어 팬서 사내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자이파의 친위대군요.’
바렌은 쾌재를 부르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굴만 봐도 강함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안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칼자국은 거칠었던 그의 과거를 암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며 유해졌으나 본성은 여전할 터.
이제야 알게 된 베스퍼라는 이름의 여인이 바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신참이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대서. 잘생겼지?”
“내는 종족이 달라서 잘 모르겠는데···저런 꿀꿀이가 니 취향이었나?”
“꿀꿀이라니 이건 옷을 두텁게 입은 거 뿐이거든? 어쨌든 둘이 인사···”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여인이 블란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던 와중이었다.
퍼억!
벼락처럼 날아든 바렌의 손날이 그녀의 뒷덜미를 가격했다.
“억.”
“뭐 뭐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이 뒤집혔다.
돌발적인 행동에 블란타가 경악했다.
바렌은 고꾸라지는 여인의 몸을 붙잡아 주었다.
‘다행입니다. 죽지는 않았군요.’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한 바렌이 안도했다.
이것으로 먼젓번에 말했던 은혜는 갚은 셈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바로 죽여버렸을 테니까.
블란타가 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니 니 갑자기 뭔데?! 우짜려고 이런 짓을···!”
“반갑습니다 블란타.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여기서 탈출시켜 드릴 테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뭣이라? 도움?”
“네. 자이파 님의 무장친위대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장 구출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이 조직의 보스와 함께 있어서 무력이 필요합니다. 규모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투기장 챔피언 정도는 되어야할 것 같더군요.”
여인을 바닥에 눕힌 바렌이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블란타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설명을 다 들은 블란타가 철창에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세크리트가 여기 있다꼬?! 내가 아는 그 세크리트 맞나?!”
“그렇습니다. 북부를 구한 영웅 중 한명이시죠.”
“그 신출귀몰한 양반이 우짜다가···일단 알았다. 상황은 이해했어. 그런데 내를 여기서 어떻게 탈출시키려고? 니 열쇠는 있나?”
두꺼운 손가락이 철문에 걸린 자물쇠를 가리켰다.
챔피언을 가두기 위한 자물쇠라 그런지 해제 난이도도 챔피언이었다.
“열쇠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건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뭐라?”
“위험하니 잠깐만 떨어져 계시겠습니까?”
별안간 바렌이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가 폈다.
아까부터 힘을 모아 두고는 있었는데 잘 될지가 의문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자물쇠를 감싸쥐었다.
“후우우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러가 맥동하며 발생하는 소리는 뒤룩뒤룩한 살집마저 뚫고 외부로 울려 퍼졌다.
황금빛 색채가 두툼한 손바닥 위로 스며 나왔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바렌은 천천히 자물쇠를 누르는 힘을 더했다.
“크으으으···!”
“이 이기 뭐꼬?”
이윽고 블란타의 눈이 커졌다.
자물쇠 위로 균열이 그어지고 있었다.
거미집 같은 자국을 타고 새나오는 빛무리는 아까와 같은 황금빛을 띄었다.
균열이 자물쇠의 절반 정도를 뒤덮었을 무렵.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바렌이 포효성을 터트렸다.
“하아아압!!”
“커헝!”
동시에 빛으로 휘감긴 자물쇠가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어둠을 가르며 날아간 파편들이 복도 곳곳에 처박혔다.
비명을 지르며 넘어갔던 블란타가 다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산산조각난 자물쇠를 본 그가 헛웃음을 쳤다.
“씨바···니 정말로 인간 맞나? 이런 건 우리 대장도 못 할거 같은데.”
“후욱 후우우···일단은 그렇습니다.”
바렌이 주억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바지가 헐렁해진 것 같았다.
가용 오러의 7할 이상을 써버렸지만 어찌어찌 성공했다.
끼이익···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일단 들어온나.”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래. 안에서 잠그면 금마들도 당분간 못 들어온다.”
블란타가 휘청거리는 바렌을 끌어당겼다.
마침내 드러난 그의 전신은 역시 챔피언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가죽 바지에 상반신만 탈의한 상태.
웨어 팬서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야성적인 근육은 자이파의 친위대에 들어가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저 정도면 가능하겠어.
바렌이 뿌듯한 심정으로 블란타를 훑어보던 와중이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목걸이가?’
다른 수인들은 모두 차고 있던 폭탄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늘씬한 목에 걸려 있는 것은 금을 섬세하게 엮어 만든 화려한 초커였다.
무언가 다른 장치로 관리하고 있다기에는 족쇄나 수갑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보석 장신구만이 손발목 위에서 반짝거릴 뿐.
‘설마.’
불현듯 유령이 뒷목을 핥는 듯한 소름이 바렌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뭐라 말하려던 찰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호. 네가 세크리트와 함께 잡혀들어왔다는 그 쥐새끼군.”
“······뭐?”
바렌이 얼어붙었다.
블란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어지간한 귀족의 침실만큼이나 화려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채워진 공간은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당신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본 바렌이 헛숨을 들이켰다.
붉은 코트를 걸친 사내가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피투성이가 된 세크리트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깔려 있었다.
“북풍단의 수장인 레테다. 만나서 반갑군.
“맙소사 교수님!!”
사내가 인사했지만 바렌의 귀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실로 인간이라 믿을 수 없는 민첩한 동작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자이파의 전 무장 친위대였다.
“이크. 어딜.”
“크악!”
블란타가 바렌의 팔을 뒤로 꺾었다.
앞으로 넘어진 그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눈이 마주친 세크리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바렌···왜 자네가 여기에····”
“교수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수인들을 짐승 취급하는 집단의 수장과 자이파의 친위대가 한통속이라니.
블란타가 바렌을 붙잡은 채 낄낄거렸다.
“야 니 진짜 좆될 뻔 했다니까. 내 아니었으면 우짤 뻔했노?”
“이것 또한 운명이겠지. 참 운도 없는 놈이군.”
자신을 레테라고 소개한 사내가 미소를 머금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두 사람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우리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 않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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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분명 이 주변인데.
검은 웨어타이거가 혀를 찼다.
시커먼 전신은 마치 그림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붉어서 특유의 흑색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토막난 몬스터와 사람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음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는 알칼토 계곡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고드름이 되었다.
커억…허어억…!
그의 손에는 북풍단원 한 명이 잡혀 있었다.
검지와 엄지만으로 목을 붙들린 사내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웨어타이거가 물었다.
이봐. 정말로 모르나? 너희도 조직이 있을 거 아니냐.
“몰 라···사 사려···컥.”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동시에 웨어타이거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우득.
목뼈가 부러진 몸뚱어리가 축 늘어졌다.
“하여튼 귀찮게 하는군.”
웨어타이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몹시도 심기가 불편했다.
며칠 전 숙명의 라이벌과의 대련에서 패배한 탓이었다.
‘그 요사스러운 뱀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뭔가 어려진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리 오랜만에 봤다 해도 너무 강해져 있었다.
자신을 무참하게 패배시킨 남부의 칼잡이는 생전 본 적 없는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필레온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자극을 단단히 받은 터라 수련에 매진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북부의 치안을 관리해야 한다는 중책이 배정되어 있었다.
언월도에 묻은 피를 털어낸 자이파가 다시 계곡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계속 죽이면서 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