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3. 짐승들(5)
#A33
투박한 석조 건물의 내부에서 섬세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나긴 복도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았다.
수인들이 짓게 해서 그런지 주변의 모든 것이 과할 정도로 높고 널찍했다.
“후욱 후우우···이 정도일 줄이야···!”
벽에 기댄 바렌이 가빠진 숨을 골랐다.
감옥을 벗어난지는 정확히 10분이 지나 있었다.
털 없는 피부가 끈적거리는 땀으로 뒤덮이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끔찍해.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건가요.’
뒤룩뒤룩 쪄버린 살은 기어코 발목을 잡았다.
차디찬 알칼토 계곡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일정 온도가 유지되는 건물 내부는 돼지가 되어버린 바렌에게 한증막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도 벗을까···아니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죠.’
옷을 두껍게 껴입은 것도 한몫을 했다.
바렌은 지금 북풍단의 상징인 붉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방금 처리한 세 명 중에서 그나마 가장 덩치가 컸던 자의 옷을 훔쳐 입은 것이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앞섶은 바늘로 콕 찌르는 순간 폭발할 것 같았다.
심지어 얼굴에는 코 아래까지 가려지는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이 또한 단원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는데 죽을 만큼 더워도 효과가 쏠쏠해서 벗을 수가 없었다.
“이봐. 오늘 점심 뭐야?”
“내 오줌.”
“지랄하지 말고.”
그를 방증하듯 두 명의 단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렌의 옆을 지나갔다.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그들은 바렌에게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경비가 삼엄한 건 아닌 것 같군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숨을 다 고른 바렌이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우두머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에 발품을 팔 필요가 있었다.
그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던 와중이었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잘 한다! 짐승 새끼들!”
멀지 않은 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바렌이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대문과 문틈새로 스며나오는 붉은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바렌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쪽으로 걸어갔다.
웨어라이온의 예리한 직감이 진로를 이끌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설마.’
거리는 금새 좁혀졌다.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붉은 조명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후끈한 열풍이 그의 앞머리를 젖혔다.
“·········!”
주변을 둘러본 바렌이 얼어붙었다.
야만의 시대가 도래해 있었다.
광장처럼 널찍한 공간 가운데는 강철로 만들어진 오각형 우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북풍단 수십 명이 우리를 둘러싼 채 열광하는 중이었다.
“늑대놈 지면 박제로 만들어 버릴테다!”
“내 점심값 다 걸었어!”
기본적으로 여가를 위한 장소인지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단원들은 웃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들고 있는 음식을 집어 던지며 앞서 말한 두 가지 행동을 했다.
강철로 된 우리 안에서는 웨어디어와 웨어울프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아···어떻게 이런 일이····”
그 광경을 본 바렌이 탄식했다.
서로 물거나 할퀴고 있는 수인들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모래로 된 바닥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부러진 이빨과 발톱이 조약돌처럼 반짝거렸다.
촤악!
발톱에 눈을 긁힌 웨어디어가 비명을 내질렀다.
“뮈이익! 누 눈이!”
“이 이제 그만 항복해. 나는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고 있다고···!”
웨어울프가 더듬거렸다.
먹먹하게 메인 목소리에서 투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싸움이 치열했는지 그의 한쪽 팔은 이미 부러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눈에서 손을 뗀 웨어디어가 몸을 날렸다.
“웃기지 마. 나도 나도 돌아가야 해!”
“커억!”
허리를 붙잡힌 웨어울프가 뒤로 넘어졌다.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봤지만 허사였다.
대형 순록을 기반으로 태어난 웨어디어는 이빨과 발톱이 없는 대신 거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역전당하기 전에 죽여버려! 사슴 새끼야 내가 얼마를 걸었는지 알아!?”
“처형! 처형! 처형! 처형!”
사람들이 환호했다.
마운트 포지션을 잡은 웨어디어가 오른팔을 높게 쳐들었다.
발굽만큼이나 강인한 주먹은 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우리 어제까지 같이 떠들고 밥 먹었잖아.”
웨어울프는 저항을 멈추고 호소했다.
그의 주둥이는 애진작에 부러져서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런 걸 맞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웨어디어가 신음했다.
“크으으으···으으으···!”
“친구 제발!”
주변에서는 여전히 끝장을 내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기서 죽이지 못한다면 죽임당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웨어디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쾅!
허공에서 부들거리던 주먹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
반전은 없었다.
묵직한 주먹은 웨어울프의 안면을 완전히 으깨 버렸다.
천천히 주먹을 뽑아낸 웨어디어가 흐느끼듯 읊조렸다.
“미안···미안하다.”
하나 남은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곤죽이 되어 버린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승패가 갈린 것을 확인한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 멋지다!!”
“퉷 쓸모없는 개새끼 같으니라고.”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승패 예측에 성공한 단원들이 테이블에 놓인 돈을 챙겨갔다.
다시금 족쇄와 수갑이 채워진 웨어디어가 투기장 바깥으로 끌려갔다.
한참이나 벙쪄 있던 바렌이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였을 줄이야···!”
상상 이상의 잔혹함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악의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결투가 진행되는 내내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는 몸을 막아야 했다.
‘교수님을 구하는 게 먼저다.’
세크리트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덕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이런 마경을 운영하는 자와 함께 있다니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투기장은 사람이 많아서 정보를 수집하기에 제격이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바렌이 다시 움직이려던 찰나.
“너 못 보던 얼굴 같은데.”
“······!”
웬 여성 단원이 바렌을 불렀다.
탱크톱 차림의 그녀는 외투를 허리춤에 묶은 채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있었다.
투기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지던 시선의 주인이었다.
“올가 패거리 쪽 신참인가? 눈이 반반한데 마스크 좀 내려봐.”
마 마스크를 말입니까?
인간이라면 휘파람을 불어 아깝지 않은 몸매였으나 바렌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바렌은 주저하다 마스크를 내렸다.
…그러지요.
“너···!
동시에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왜 왜 그러십니까?
바렌이 굵은 침을 삼켰다.
굉장히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를 죽여 입막음하더라도 여기서는 추격대가 곧바로 따라붙을 터였다.
어쩔 수 없나요.
혈전을 각오한 그가 오러를 발동하려던 차였다.
“역시 엄청 잘생겼네. 밖에 있을 때 재미 좀 봤겠어.”
네?
바렌이 당혹성을 흘렸다.
여인은 그의 얼굴을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뜯어보며 주억거리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바렌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휴가 나갔던 사이에 왔나보네. 너 같은 꽃돌이를 못봤을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옷을 뭐 그리 많이 껴입었어?”
음? 그렇게 많이 껴입지는 않았…아아.
바렌이 끄덕였다.
극단적인 대비가 불러온 착시였다.
유일하게 갸름한 얼굴은 비대한 몸뚱어리와 이어져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게···제가 추위를 좀 많이 타서요.”
“춥다고? 하긴 내가 몸에 열이 많은 편이기는 하지. 그래도 넌 좀 과하다. 무슨 공 같아.
아하하하….
여인이 바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장난스런 웃음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이게 다 살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기겁하면서 나가떨어질 텐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좋아 신참. 혈투는 좋아해? 금수들끼리 싸우는 거.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너무 잔혹해서.
에이 그건 네가 수준 낮은 경기만 봐서 그래. 오늘 저녁에 할 거 없으면 나랑 경기나 보러 오자. 얼마 전에 왔으면 챔피언도 못 봤을 거 아냐.”
“챔피언?”
“응. 끝내주는 표범이 한 마리 있거든. 여기 잡혀 온 이후로 한 번도 지지 읺은 괴물이야. 수인을 보고 섹시하다 느낀 건 그 자식이 처음이라니까?”
여인이 과장된 손짓을 하며 요란을 떨었다.
다른 투사들의 세계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스타가 있는 모양이었다.
손을 갈고리처럼 만든 그녀가 바렌의 가슴을 긁으며 말했다.
뭐 출신을 생각해 보면 강함이 이해되기는 해. 그 자이파 터르겅의 무장 친위대 소속이었거든.
자 자이파 말입니까?!
그래.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걸 우리가 붙잡았지. 미친놈 자고 있는 걸 덮쳤는데도 열 명이 넘게 죽었어.
여인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바렌의 눈이 커졌다.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방금 분명 자이파의 친위대라고 했다.
‘그런 인물이라면…!’
앞을 가리던 안개가 갠 것 같았다.
무장 친위대의 명성이라면 이미 수도 없이 들어왔다.
강인한 북부 수인 전사 중에서도 특출난 이들만이 그 영광스러운 집단에 소속될 수 있었다.
당장 아내인 네메아가 친위대의 전신 격인 여명 부대 출신이었으니 그 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그와 어떻게 접촉하냐는 것 뿐.
묘책을 떠올린 바렌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부인. 동족이 아니니까 부디 용서해 주시길.’
심장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
지금부터 그는 유부남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해야만 했다.
여인은 아직도 사심 넘치는 눈으로 바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결의한 바렌이 행동에 나섰다.
아가씨.
뭐 뭐야?
순식간이었다.
바렌이 여인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너…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놓겠습니다.
…그건 아닌데.
여인이 시선을 피했다.
그윽한 눈빛은 마주보기도 힘들었다.
웨어라이온의 세계에서 미남인 바렌은 인간으로 변해도 미남이었다.
그녀가 반대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저기 일단 내 방으로 갈래? 저녁까지 할 일도 없어서.
그것도 좋지요. 헌데 부탁드리고 싶은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
네. 그 친위대 출신이었다는 표범 말입니다.
바렌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여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고도비만의 진실을 모르는 그녀의 눈에 바렌은 키 크고 풍채 좋은 멋쟁이었다.
멋쟁이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