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전설의 표행(15) >
천마성교들의 진영이 발칵 뒤집혔다·
혈영노조를 비롯한 팔대호교사자들의 얼굴도 대번에 노래졌다·
진왕이 이곳 육가촌에 오는 것처럼 헛소문을 퍼뜨려 나를 유인했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진짜 왕이 등장했으니 놀라 나자빠질 수밖에·
그것도 수천의 중무장한 기마대까지 이끌고·
나와 연소교와 호리독사는 또 우리대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교룡기를 앞세운 기마대의 행렬은 점점 가까워져 어느새 수십 장 앞까지 다가왔다·
중무장한 대병력이 들이닥치자 역시 도검으로 무장한 천마성교도 이천여 명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혈영노조만 바라보았다·
우리를 죽일 건지 말 건지 기마대를 이끌고 오는 왕의 행렬과 맞설 것인지 달아날 것인지 무언가 명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곱 호교사자들도 혈영노조를 보며 서둘러 결단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마침내 혈영노조의 일성이 터졌다·
“모두 현 위치를 고수한다!”
현재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그래서 일단 시비가 일어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겠다는 게 혈영노조의 판단인 것 같았다·
그 사이 기마대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드넓은 강나루로 들어섰다·
동시에 일렬로 달려오던 병력이 좌우로 길게 퍼지면서 강나루의 동쪽 외곽을 초승달처럼 에워쌌다·
그제야 모두가 완전히 행진을 멈추었다·
자세히 보니 기마대는 갑옷도 무장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갑옷은 모두 세 종류였는데 각각 사병과 관병과 군병을 의미했다·
이들은 전부 도검을 기본 무장으로 패용한 상태에서 다시 궁병과 창병으로 나뉘었다·
일부는 말안장의 좌우에 도검창궁을 전부 장착하기도 했다·
아마도 척후를 살피는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운용되는 별동대인 것 같았다·
무언가 정교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진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앞쪽 한가운데는 놀랍게도 삼국지연의 속 네 인물이 있었다·
큰 키에 멋들어진 수염을 늘어뜨린 관우 떡 벌어진 어깨에 밤송이 같은 수염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장비 앞선 두 사람 못지않은 체구에 수려하면서도 사내다운 용모를 가진 조자룡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족티가 좔좔 흐르는 얼굴에 부슬부슬한 흰색 모피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유비가 있었다·
그들의 복장과 무장 상태와 얼굴을 보고 나는 바로 신분을 알아차렸다·
일단 관우와 조자룡은 고위 관리가 확실했다·
그리고 한 자루 대감도를 허리에 찬 장비는 군문의 장수일 것이다·
구 할이 군병으로 이루어진 기마대는 얼핏 보아도 삼천 명은 될 것 같았다·
대체 어떤 고위 관리들이며 군문의 장수이기에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걸까?
관우와 장비와 조자룡이 정확하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작은 체구에 하얀 얼굴의 유비가 누군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진왕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왕의 얼굴을 알아본 호리독사도 눈알이 빠질 것처럼 튀어 나왔다·
그때 초로의 장비가 말을 몰아 대여섯 장 앞으로 나왔다·
그러곤 마상에서 천마성교도들을 아래로 쓸어보며 우렁우렁한 일갈을 쏟아냈다·
“이 새벽에 감히 어떤 불순한 무리들이 병장기를 들고 강나루에 모여 말썽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때쯤엔 혈영노조와 일곱 명의 호교사자들이 천마성교도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장비가 또 한 번 일갈을 터뜨렸다·
“북경으로 귀궁 중인 왕야의 행차시다· 역도들이 아니라면 모두 병장기를 버리고 황족에 대한 예를 갖추어라!”
천마성교도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듯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 세상의 왕이 아무리 지고한 신분이라고 하나 신을 대리하는 존재인 교주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천마교주가 없는 지금은 팔대호교사자의 수장인 혈영노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혈영노조가 대여섯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퇴검(退刻)하라!”
그제야 천마성교도들이 뽑아 들었던 각자의 병장기들을 물리고 회수했다·
무려 이천여 명이나 되다 보니 그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혈영노조는 자신의 상대는 따로 있다는 듯 장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뒤쪽의 백마 탄 진왕을 향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태도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지나가는 노민(老民)이 왕야를 뵙습니다·”
진왕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선 자리에서 가만히 혈영노조를 내려다보았다·
혈영노조는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기회를 주신다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고래로 관과 무림은 강과 호수처럼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소인은 무림의 인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말미암아 잠시 강나루에 머물고 있사오니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일을 마무리 짓고 도산검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한마디로 ‘우리는 역도가 아니며 당신들에게 반기를 들 생각 또한 추호도 없다·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짓고 본래 살던 세상으로 사라져 줄테니 그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라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십여 장 밖에 있는 진왕을 향해 목을 쭉 빼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표사 이정룡·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진왕이 나를 발견하는 걸 확인하는 순간 나는 최대한 큰 동작으로 머리를 땅바닥에 냅다 꽂으며 엎드렸다·
호리독사도 나를 따라 어버버 거리면서 뭐라고 인사를 하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뒤늦게 교룡기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차린 연소교도 화들짝 놀라서는 호리독사를 따라 그의 옆에 엎드렸다·
그 바람에 나도 연소교도 호리독사도 각종 병장기를 지닌 천마성교들에게 등을 노출하며 한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종산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믿을 것은 손에 쥔 보검 월인소야가 아니라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진왕의 저 눈빛이었다·
진왕이라는 말에 저 멀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양민들과 무림인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마성교도들은 천마성교도들 대로 또 한 번 당황해했다·
하필 자신들이 헛소문을 낸 바로 그 진왕이 왔으니 더욱 찜찜하고 당혹스러울밖에·
“과인이 표사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모두 일어나 고개를 들라·”
천마성교도들이 중간에서 가로 막고 있는 바람에 납작 엎드려 있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친 진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저 미소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순간 진왕의 뒤쪽 중무장한 군병들 틈으로 여덟 필의 말이 이끄는 팔두마차가 보였다·
마차의 오른쪽 창밖으로 달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어린 여자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헛!”
나는 깜짝 놀라서는 다시 얼른 고개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올렸다·
호리독사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고 연소교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자신에게 인사하는 걸 알고는 진왕의 딸 주소야 공주가 배시시 웃었다·
한데 공주가 고개를 내민 곳이 하필이면 언덕 위의 구경꾼들 쪽으로 난 창이었다·
엄청난 용모를 지닌 미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구경꾼들이 또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그러자 공주가 잠시 안쪽을 보더니 자라처럼 머리를 쏙 집어넣어 버렸다·
아마도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왕비에게 꾸지람을 당한 모양이었다·
진왕이 뒤늦게 내게 물었다·
“잘 지내셨는가?”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탈합니다· 전하·”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군·”
무탈하지도 않거니와 보기에도 그렇지 않다·
진왕과 나는 좋지 않은 상황을 역설적인 말로 주고받으며 대범하게 넘겼다·
“전하께선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야말로 작년 겨울 자네가 호위를 잘 해준 덕분에 아직도 무탈하다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전하·”
“껄껄· 항주에 피한을 갔다가 자네를 보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송구하옵니다· 전하·”
“한데 멀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군·”
장비가 다시 나서서 일갈했다·
이번엔 정확히 혈영노조를 향해서였다·
“수하들을 모두 물려라!”
혈영노조는 여전히 꿈쩍도 않고 진왕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아직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이런 불손한 자를 봤나!”
장비가 호목을 부릅뜨고는 허리에 찬 대감도를 기세 좋게 뽑았다·
그러자 이천의 천마성교도들이 회수했던 병장기들을 다시 뽑았다·
그에 반응하듯 걸 삼천 기병대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수천 개의 도검이 강나루 전역에서 거대한 짐승의 비늘처럼 번쩍거렸다·
일촉즉발의 순간 진왕이 초로의 장비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도사(都司)께서는 잠시 물러나시지요·”
“전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하·”
언덕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또다시 크게 술렁거렸다·
도사는 도지휘사를 부르는 약칭이었고 도지휘사는 한 개의 성(省)을 총괄하는 군정의 최고 책임자였다·
쉽게 말해 이곳 남직예성 전역의 수호와 방위를 책임진 장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장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온 관운장과 조자룡도 그 못지않은 품계의 고위 관리일 것이다·
도지휘사와 견줄만한 고위 관리라면 약칭 포정사라 불리는 승선포정사와 안찰사라고 불리는 제형안찰사 정도였다·
남직예성의 행정과 사법과 군을 통솔하는 이들이 전부 출동한 셈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항주의 지부대인은 ’고위’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진왕이 이끌고 온 군벌이며 관리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위직들이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오황자가 정말 황태자로 책봉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런 인물들이 군관병들을 삼천이나 움직여 가면서 진왕을 호위하고 나타날 리 없었다·
또 하나 이 정도 병력이면 단순히 진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사를 하러 왔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군병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움직이는 건 자칫 역모로도 몰릴 수 있을 만큼 크게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근자에 갑자기 황태자로 책봉된 오황자가 병부의 측근을 통해 항주에서 피한 중인 진왕이 안전하게 귀궁할 수 있도록 손을 쓴 것이다·
아마도 오황자는 권력의 축이 자신에게로 이동하는 이 민감한 시기에 진왕이 정적들로부터 시해를 당하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한데 진왕은 그들을 이끌고 여정을 크게 바꿔 가면서까지 나를 구하러 왔다·
혈영노조와 일곱 명의 호교사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들이었다·
그들은 사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분위기는 그대로 전해져 이천 천마성교도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편 장비가 뒤로 물러나자 진왕이 말을 또각또각 몰아 앞으로 나왔다·
장비를 비롯해 뒤쪽에 있던 진왕의 사병들이 바짝 긴장했다·
상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여섯 장을 날아가 벼락처럼 칼을 뻗는 무림의 초절정 고수·
까딱하다간 진왕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었다·
나는 나대로 소맷자락 속에 꽂아둔 비격쌍뇌창을 뽑아 손가락 사이에 가만히 쥐었다·
여차하면 암기술과 염동술을 동시에 펼쳐 혈영노조의 뒷목에 있는 천추혈과 아문혈을 뚫을 생각이었다·
거리가 있으니 편복은왕이 그랬던 것처럼 혈영노조 역시 십중팔구 비격쌍뇌창을 피하거나 막아낼 것이다·
대신 그 틈을 타 장비와 사병들이 진왕을 구출할 수가 있다·
특히 진왕의 사병들은 벌써부터 마상에서 솟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진왕은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혈영노조와 불과 석 장의 거리를 남겨두고 말을 멈췄다·
이어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노인장의 이름이 무엇이오?”
“말씀 올리기 불경스럽습니다만 강호의 형제들은 혈영노조라 별호를 안겨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노민이라 칭하면서 어찌하여 내게는 무림의 별호를 가르쳐 주는 것이오?”
“소인이 누군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건 관심 없으니 호패에 새긴 이름이나 말해 보시오·”
혈영노조 역시 무림인이기 이전에 관아로부터 호패를 발급받은 황제의 백성이었다·
진왕은 그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호패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전하·”
“호패가 없는 백성도 있소이까?”
“오랜 세월 주유천하를 해온 무림인들은 대부분이 그러하지요·”
“무림인이라도 살면서 한번은 호패를 받았을 것이 아니오·”
한때 천하 무림을 질타하던 천마성교의 현 수장과 황태자의 스승인 진왕 사이에 잠시 불꽃 튀는 기 싸움이 펼쳐졌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사람이 무림인과 눈을 마주치면 신분의 고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두려워 피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초절정의 고수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오줌을 지린다·
그러나 강렬한 투기를 폭사할 것이 분명한 혈영노조를 상대하면서도 진왕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본다거나 겁먹은 걸 감추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취조하듯 가만히 내려다보며 혈영노조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혈영노조는 한참 만에 대답을 내놓았다·
“여불회입니다·”
“일족의 선대에 관리가 있으시오?”
“없습니다·”
“고향은 어디시오?”
“산동성 제남입니다·”
“태어난 해는?”
“그런 건 어찌하여 하문을 하시는 건지요?”
“그런 걸 과인이 일일이 설명해야 하외까?”
“갑신년생입니다·”
“전란이 대륙을 휩쓸던 해에 태어나셨구려·”
“그렇습니다·”
“일곱 번의 크고 작은 전란에 아홉 번의 대 흉년과 역병의 창궐까지· 그 모든 질곡을 견디고 넘기며 칠십여 년을 살았으니 일개 황족 쯤은 수월하게 보일 수도 있겠구려·”
“···?”
“갑신년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난 여불회· 네가 감히 황족을 사칭하고도 살기를 바랐더냐· 당장 무릎을 꿇어라·”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화를 내며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이어온 대화의 연장처럼 차분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혈영노조의 두 눈에 자신의 두 눈을 못 박은 듯 꽂아 놓고 조용히 질타하는 진왕의 기세는 가히 앞발로 찍어 누른 사냥감을 내려다보며 으르릉거리는 범과도 같았다·
돌변한 진왕의 태도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언덕 위의 구경꾼들과 천마성교도들 그리고 삼천여 관군들까지 모두가 숨죽여 혈영노조를 지켜보았다·
왕으로까지 책봉된 황족의 명령이었다·
과연 혈영노조는 저 명령을 받아들일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혈영노조는 장차 마신의 신성한 대리인인 천마교주가 되려고 하는 인간이었다·
이천 천마성교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인간의 왕에게 무릎을 꿇으면 특별한 존재로서의 존귀함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무릎을 꿇지 않으면 진왕은 전면전도 불사할 기세였다·
그 역시도 왕으로서 수많은 관군과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방금 한 말을 주워 담지는 못할 테니까·
도검을 뽑아 들고 격돌하지만 않을 뿐이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눈엔 전면전보다 더 격렬하고 살벌하게 느껴졌다·
‘진왕에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호랑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든 짐승들 위에 군림하는 기질을 갖고 있다는 걸·
그렇다고 해도 언제나 호랑이가 이기라는 법은 없다·
진왕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 이천 천마성교도의 수장인 혈영노조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진왕은 재촉하지 않았다·
혈영노조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조용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사람들은 삼천 관군들과 이천 천마성교도들이었다·
병장기를 뽑아 든 채 대치하고 있는 그들의 숨죽인 어깨에서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이 대 삼의 비율이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무림인인 천마성교도들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군들은 전부가 중무장한 기마병들이었다·
귀한 말을 아무나 탈 수 없다·
게다가 무장의 수준까지·
장담하건대 저들 역시 최소 십 년 이상씩 마상무예를 수련한 정예병들이었다·
‘무승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무승부였다·
다르게 말하면 공멸이었다·
한쪽이 치욕을 무릅쓰고 중간에 도망치지 않으면 이 싸움은 공멸로 끝난다·
그리고 동창과 금의위는 물론이거니와 수만의 군병까지 동원되어 천마성교도들을 상대로한 대대적인 토벌전이 몇 년이고 이어질 것이다·
심연 같은 침묵이 이어지길 한참 혈영노조가 결국 털썩 무릎을 꿇더니 양손을 땅에 짚으며 머리까지 조아렸다·
“···!”
언덕 위의 구경꾼들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일곱 명의 호교사자들과 이천여 천마성교도들도 천천히 뒤를 이었다·
이윽고 강나루에는 나와 연소교와 호리독사를 제외한 모두가 땅에 엎드려 있었다·
이천여 명이 한 사람을 향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때 혈영노조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고 있던 장비가 또다시 일성을 토했다·
“왕야께서 아직 기립을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이 정도면 무림인으로서 황족을 대하는 예는 충분히 갖춘 듯하니 일어서고 떠나는 때는 이 몸이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기립하라!”
혈영노조의 일갈에 칠인의 호교사자들과 이천여 천마성교도들 전부가 철거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혈영노조는 마상의 진왕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제 마음대로 작별의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럼 편안한 여정 되시길 바라옵니다·”
그러고는 칠인의 호교사자들과 함께 수하들이 어디선가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이어 말머리를 돌려 나를 한차례 흘깃 보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천여 천마성교도들이 일사불란하게 뒤를 따랐다·
“무엄한 역도들 같으니라고!”
장비가 다시 한번 일갈하며 진왕의 곁으로 와서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소장에게 한나절만 주시면 저 간악한 것들의 씨를 말리고 오겠습니다·”
“그냥 보내 주십시오·”
“전하!”
“황태자의 부르심을 받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과인의 행보가 황태자께 누가 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진왕은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은 피 냄새보다 술 냄새를 맡으며 오랜 만에 만난 벗과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군요·”
무시무시한 천마성교도들이 떠나자 이제야말로 회수를 건널 수 있게 된 언덕 위의 구경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