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 전설의 표행(6) >
수많은 표마차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천룡표국을 빠져나갔다·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진풍경이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에 출발해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멈추는 것이 표행단의 오랜 규칙이기 때문이었다·
비룡당의 일각주 왕일은 그중 하나의 표행단을 이끌고 천룡표국을 나섰다·
열 명의 표사와 열일곱 명의 노련한 쟁자수들로 이루어진 이 표행단은 표마차 아홉 대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출발하기 직전 그가 모시는 주군이자 당주 이정룡은 이렇게 말했다·
“여긴 우리 구역이오· 그걸 절대 잊지 마시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문제는 시원하게 뻗은 대로를 지나 북쪽으로 방향을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앞을 막아섰다·
복장도 용모도 무기도 제각각인 것이 딱 보아도 저 내키는 대로 칼질을 하며 살던 인간들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금쯤 천룡표국을 중심으로 십 리 안에서 사방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길목마다 이런 자들이 표마차들을 막아서고 있을 것이다·
“새벽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짝눈에 들창코에 뻐드렁니까지 남들은 하나도 어려운 삼박자를 두루 갖춘 사내가 인사를 건네왔다·
가슴에 장검 한 자루를 품은 채 팔짱을 꼈는데 가볍게 웃기까지 하는 모습에서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것이다·
“고생은 당신들이 하고 있지· 우리야 방금까지도 집 안에서 불을 쬐다 나왔지만 당신들은 이 추운 날씨에 밤새 밖에서 기다렸을 것 아니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무림인들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추남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재밌는 표사로군·”
“천룡표국 비룡당 소속 왕일이오· 귀하는?”
“바람처럼 스치고 말 사이에 무슨 통성명씩이나·”
“바람이 스칠 지 칼이 목에 스칠 지는 모르는 거니까· 후자라면 서로가 이름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좋지 않겠소?”
“우리가 왜 마차를 세웠는지 잘 아는 것 같은데 몇 가지 협조만 해주면 피차 칼이 목에 스칠 일은 없을 것이오·”
“나도 궁금한게 있는데·”
“어디로 가는 표행이오?”
“나이가 몇이오?”
“표물은 무엇이오?”
“고향은 어디오?”
“우리가 좀 봐도 되겠소?”
“얼굴은 언제부터 그랬소?”
“표사와 쟁자수들의 몸도 전부 수색을 해야 하는데·”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 부모님들께선 알고 계시오?”
“협조가 잘 안되는군·”
“도둑질에도 도(道)가 있는 법이오 남의 표국 앞에서 새벽부터 노상강도질을 하는 주제에 너무 예의를 모르는군·”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
채채채채채챙!
오십여 명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살기를 폭사했다·
표사들 역시 반사적으로 도검을 뽑아 들고 표마차를 막아섰다·
쟁자수들은 쟁자수들대로 모조리 표마차 위에 올라가 활에 화살을 재어 적들을 겨누었다·
비룡당의 쟁자수들은 다른 당의 쟁자수들과 달리 모두 박도와 활을 웬만큼 다루었다·
이는 당주인 풍운비룡이 쟁자수들에게도 기마술과 도법과 궁술을 배우도록 장려하고 기회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쟁자수 출신으로 표사가 되어 풍운비룡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독고완에 대한 선망도 한몫 했다·
훨씬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표사와 쟁자수들이 주눅 드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놈들은 크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때 천룡표국 쪽으로부터 누군가 말을 타고 다급하게 달려왔다·
기마인은 왕일이 이끄는 표행단을 지나쳐 길을 막고 선 놈들에게로 곧장 갔다·
이어 말에서 내릴 사이도 없이 우두머리 추남에게 다급히 보고했다·
“추혼쌍귀(追魂雙鬼)를 비롯해 간밤에 천룡표국으로 들어갔던 특무조 칠십 명이 전부 사로잡혔습니다·”
“뭐!”
“그 중 양귀를 비롯해 아홉 명이 죽고 열세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역시 서둘러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체 어쩌다가?”
“죽은 아홉 명은 천살마녀를 찾기 위해 몰래 표왕부로 침투하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에게 당했고 나머지는 다른 전각들을 뒤지다가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일급 표사들이 계속 감시를 하다가 위로부터 명령이 떨어지자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간밤에 마교도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금 먼 곳의 길목들에다 진을 친 것은 천룡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약 바로 코앞에서 표국을 빙 둘러쌌다면 이종산은 크게 모욕을 느끼고 전 표사들을 동원 바로 전면적인 토벌전을 감행했을 것이다·
하물며 몰래 표왕부에 침투하고 제멋대로 경내를 돌아다니려고 한 자들을 가만두었겠나·
실력 좋기로 유명한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그들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고·
“호법들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
“좌호법께서 천룡표국으로 들어가 표왕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급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내용은?”
“전 교도들은 무조건 싸움을 멈추고 대기하라!”
“저들이 강제로 뚫고 지나가려고 해도?”
그때 또 한 명의 기마인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등에 천룡표국의 표기를 꽂은 그는 왕일의 앞에 이르러 역시나 마상에서 다급하게 전했다·
“국주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천룡표국의 모든 표행단은 흉수들이 강탈을 시도하지 않는 한 공격을 멈추고 대기하라!”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국주가 사로잡은 마교도들을 볼모로 좌호법이라는 자와 협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천마성교의 사자와 천룡표국의 표사는 각각 다른 조와 표행단에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말을 달려 사라졌다·
천룡표국을 중심으로 십 리 안에만 수십 개의 갈림길이 있으니 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도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왕일을 시작으로 가장 멀리 있는 표행단에까지 명령을 전달한 나는 귀환을 위해 천룡표국 쪽으로 말을 달렸다·
이따금 새벽을 깨우는 장사꾼들이 물색 모르고 오갔지만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탓에 누가 알아볼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로에서 이어지는 갈림길들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골목의 입구까지 마교도들이 포진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양민들이 사는 전각의 지붕 곳곳에도 감시의 눈길이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천룡표국을 나온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를 쫓았다·
그러나 아무리 촘촘하게 천라지망을 펼쳐도 빈틈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내가 무려 삼십 년을 살아온 곳이 아닌가·
어느 전각에 누가 살며 개구멍이 어디로 나 있고 이 시간에 어디가 가장 어두운 지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잠깐 나타나는 수로를 옆에 끼고 달릴 무렵이었다·
부지런한 나룻배 한 척이 두 명의 선객을 태운 채 맞은편에서 한가롭게 미끄러져 왔다·
아름드리 수양버들 두 그루를 사이에 두고 나룻배는 수로 위에서 나는 길 위에서 서로를 스쳐 지날 때였다·
돌연 나룻배가 출렁이면서 선객 한 명이 수양버들 사이를 지나 뭍으로 쏜살처럼 비상했다·
신법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선객은 단 세 걸음 만에 내 눈앞 허공까지 날아왔다·
나는 등에 꽂은 표기를 휙 뽑아서 허공에 던져 놓은 다음 반대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사내는 표기를 낚아채 자신의 등에 꽂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안장까지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달려갔다·
반대로 나는 재빨리 수로 쪽으로 달려가 힘차게 도약한 다음 낙엽처럼 사뿐히 나룻배에 올라탔다·
무려 일장을 날아서 착지했지만 나룻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놀라운 신법이군요·”
앞쪽에 앉아 있던 선객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방물장수처럼 행낭을 두 팔로 안은 채 초립을 쓴 그는 남장에 역용을 한 연소교였다·
“추적자는?”
“없었어요·”
나는 뒤돌아보며 강태공에게도 물었다·
“삿대를 제법 잘 찍는구려·”
“제가 한때 수채에 몸담았다는 사실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추적자는?”
“깨끗합니다·”
강태공은 역시나 변복에 역용을 한 호리독사였다·
두 사람 나보다 앞서 비슷한 방식으로 조력자들과 말을 바꿔 탄 상태였다·
우리를 대신해 말을 타고 간 사람들은 비룡당 내에서도 유흥가를 전담 관리하는 삼각의 표사들이었다·
지난밤 나는 바깥에서 표사들을 이끌고 유흥가를 돌고 있던 왕삼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호리독사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수로가 끝날 때까지 북쪽으로·”
그때쯤 동쪽 지평선 너머로부터 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불과 잠깐의 차이로 온 세상이 불 켜진 방안처럼 환하게 밝아왔다·
‘지금쯤이면 출발했겠지?’
오라버니를 따라 양주로 떠났을 남궁소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얼마나 원망했을까?
만약 내가 이 표행을 실패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전장으로 끌려가 만에 하나 불의의 사고라도 당한다면 어젯밤 보았던 게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린다·
반대로 그녀가 살고 내가 표행 중에 목숨을 잃어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소소는 어젯밤의 공기와 풍경과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을 기억하며 오랜 세월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다 결국 딴 놈한테 시집을 가겠지·’
절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표행을 성공시켜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래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해서도 사과를 할 게 아닌가·
“부상은 좀 어떻소?”
“국주님께서 영약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덕분에 훨씬 가뿐해졌어요· 금창약도 잘 듣고요·”
“다행이군·”
“신세는 꼭 갚겠어요·”
“줄 만해서 준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시오·”
“네?”
“열아홉 살의 어린 여자가 혼자 정마대전을 막겠다고 온몸을 던지는데 절강성 제일의 표국에서 영약 몇 개도 주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소?”
“한가지 여쭤도 될까요?”
“말해 보시오·”
“왜 저와 함께 가겠다고 하셨어요? 천룡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정마대전이 벌어지는 게 더 유리했을 텐데·”
“무슨 소리· 표행이 성공할 경우 책임지고 맹주님을 설득해 백지전표를 발행해 주겠다는 약속을 총군사님으로부터 받아내는 거 못 봤소? 내가 무림맹에 얼마를 요구할 줄 알고·”
“확실히 의협심 때문은 아니군요·”
“난 표사요·”
호리독사의 삿대질 솜씨가 제법이더라니 나룻배는 몇 번이나 방향을 꺾어 어느새 항주의 외각을 지나고 있었다·
수향의 도시답게 항주는 수로가 사통팔달로 이어졌다·
그리고 수로의 좌우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도가 깔려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부지런한 사람들이 관도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로 위에 떠다니는 나룻배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호리독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주님 앞을 좀 보십시오!”
마교도들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황급히 전방을 살피던 나는 그만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십여 장 앞에서 남궁세옥이 그의 여동생 남궁소소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또각또각 오고 있었다·
뒤에는 나도 잘 아는 남궁세옥의 수하 십여 명이 역시나 말을 타고 오는 중이었다·
남궁세가가 위치한 양주는 북쪽에 있었고 방향으로만 따지자면 저들도 지금쯤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북쪽으로 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반대 방향에서 오는 건 우리가 지나온 곳 어디쯤에 위치한 다리를 통해 수로를 건너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그녀와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조우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이런 행운이!’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남궁소소의 모습도 점점 선명해졌다·
십여 장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는 그녀의 넓은 이마 위로 새치름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곱게 차려입으셨네요· 오라버니와 함께 어디 어려운 자리에 인사라도 드리러 가시나?”
호리독사도 반가운지 싱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남궁소소가 저렇게 차려입은 사정을 아는 연소교는 무거운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돌아보았다·
남궁소소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꽃과 나비를 은은하게 수놓은 새하얀 비단궁장을 입고 허리에는 넓은 띠를 둘렀는데 그 바람에 안 그래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가 더욱 잘록해 보였다·
허리띠의 오른 쪽에는 나비 매듭에 여러가지 색깔의 보옥으로 장식한 술을 매달아 살짝 멋을 부렸다·
그런가 하면 머리는 한올 한올 참빗으로 곱게 빗어 올려 내가 사준 목련잠으로 야무지게 쪽을 진 다음 꽃 모양의 작은 노리개도 꽂아두었다·
같은 난초꽃이라도 항아리에 담은 것이 다르고 백옥분에 담은 것이 다르다더니 지금 남궁소소의 모습이 딱 그랬다·
단아하면서도 하려하고 화려하면서도 귀족들처럼 기품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잠깐 사이 남궁소소와의 거리는 대여섯 장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제는 살짝 손만 흔들어도 아니 그녀가 무심코 이쪽을 바라보아도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배를 잠깐 세울까요?”
호리독사가 또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남궁소소의 뒤쪽 수십 장 밖에서 걸어오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 눈에 들어왔다·
새벽바람이 추운 듯 팔짱을 끼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양민들 틈에 섞여 걷고 있지만 그들의 걸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추적자!’
지난밤 저 남매가 천룡표국을 다녀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특히 남궁소소는 비룡당으로 찾아와 나까지 만나고 갔다·
꼬리가 붙는 건 당연했다·
“그냥 가시오·”
“예?”
“그냥 가라고 했소·”
놈들이 남궁소소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남궁소소도 이미 일류고수지만 오라버니 남궁세옥이 곁에 있는 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남궁세옥이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고·
남궁소소와 나는 결국 서너 장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지나쳐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른 행인들처럼 초립의 창을 슬쩍 들어서 쓸쓸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훔쳐보는 것뿐이었다·
‘금방돌아오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