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 전설의 표행(2) >
원래는 천룡표국에 무사귀환을 보고하자마자 곧장 월성교로 달려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기다리는 비룡당 식구들의 모습에 그만 무너져 버렸다·
비룡당에서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술판으로 밤을 보낸 다음 날에는 아침을 먹기 바쁘게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장궤 전립성 표두 가불염 상자수 용소백으로부터 밀린 보고를 받았다·
다행히 내가 없는 동안에도 비룡당은 아무 일 없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항주와 무한 그리고 무한에서 다시 의빈을 오가는 장강의 범선들과도 공조가 잘 이루어졌다·
전립성의 말을 빌리자면 계절적으로 비수기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만선인 채로 운항 중이라고 했다·
그만큼 잠재적인 수요가 많았던 것이다·
덕분에 비룡당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여기에 내가 해남오가로부터 표비로 받은 금전 일천 냥까지 내놓자 사람들은 그만 입이 쩍 벌어졌다·
하나같이 은전 아홉 냥짜리 전위표였음을 아는데 이건 또 언제 챙겼냐는 표정들이었다·
가장 걱정했던 항주에서 북경으로의 공물 운송도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지부대인을 비롯해 힘 있는 아전들에게 은전을 넉넉하게 뿌렸더니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기면 알아서 척척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보고가 끝나갈 무렵에는 가불염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식도 들었다·
“당주님께서 표행을 떠나 계신 동안 진왕 전하께서 항주의 이화원으로 피한을 오셨다가 이틀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남경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들렀다가 북경으로 귀궁하신다고요·”
“진왕 전하께서요?”
“애초 비룡당에 호위를 부탁하셨는데 저희는 일이 워낙 많은 데다 당주님도 계시지 않고 해서 국주님께서 진왕 전하께 양해를 구한 후 황룡당이 맡도록 했습니다· 물론 황룡당주님께서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셨고요·”
“황룡당주님이시라면 진왕 전하와 친분도 각별하신 데다 벌써 두 번째이니 충분히 믿을만 하지요· 그래 전하께서 지내시는 동안에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고요?”
“국주님과 황룡당주님께 덕분에 편안히 잘 지내다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당주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을 마지막까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진왕이 항주로 피한을 와서 소동이 벌어진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난 모양이었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공주 마마께서요·”
‘”음?”
“항주에 머무시는 두 달 동안 공주 마마께서 호위를 대동하고 다섯 번이나 천룡표국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마다 표국이 발칵 뒤집혔지요·”
“공주마마께서 왜요?”
“당주님으로부터 언제 돌아온다는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았냐고 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서구가 도착하면 곧장 이화원으로 달려 가서 말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도 구태여····”
황금장표 석불원과 함께 일본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북경에서 공주를 다시 만났었다·
그때 알게 된 공주의 이름은 주소야였다·
나와 남궁소소에게 북경에서 가장 맛있는 만두를 사주겠다며 며칠만 묵고 가라고 붙잡던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때 그녀를 설득한 말이 겨울이 되면 항주에서 다시 만나자였다·
부푼 기대를 안고 머나먼 항주까지 왔는데 막상 같이 놀아줄 동무들이 표행을 떠나고 없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렇다고 표국이 발칵 뒤집힐 것까지야·”
나는 지나가는 말로 무심히 뱉었다·
한데 세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살짝 머뭇거렸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기는 한데 체면 때문에 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그러자 아까부터 숯과 새로 산 다기들을 잔뜩 가지고 와 옆에서 차를 열심히 끓이고 있던 장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건 공주마마의 용모 때문입니다·”
“공주마마의 용모가 왜?”
“저는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황룡당주님께서 하시는 말을 들으니 어머니이신 왕비마마의 젊은 시절이랑 똑같다더군요· 작년 겨울에 봤을 때도 미모가 예사롭지 않은 줄 알았지만 일 년 만에 절대미인이 되셨을 줄이야·”
“절세미인이겠지·”
“맞다· 절세미인·”
자고로 어린 사람을 함부로 괄시하지 말라고 했다·
어린 남자는 나이가 차면서 언제 큰돈을 벌지 모르고 어린 여자는 언제 말도 섞어보기 어려운 미녀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귀엽지만 조금은 평범한 얼굴에 주근깨도 많은 그녀였는데 어느새 피부 속에서 잠자고 있던 본래의 형태가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어머니인 왕비가 경국지색의 미녀인데 그녀의 용모가 평범할 리 있겠나·
물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
월성교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북해투왕은 그때까지도 너럭바위 위에 배를 드러내 놓고 누워서는 신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솥은 여기 걸고· 장작은 저기 부려 놓고·”
“돗자리는 움막 앞에다 깔까요?”
“거긴 쉰내가 진동해서 어지간히 이력 붙은 거지가 아니고서는 밥을 먹을 수가 없어· 저기 물가 바람이 살살 통하는 쪽에다가 깔아줘·”
“알겠습니다· 당주님·”
내 지시에 따라 장삼이 지게에 잔뜩 지고 온 물건들을 걸고 부리고 깔았다·
일을 전부 끝낸 그가 손을 탈탈 털고는 사라졌다·
그제야 잠에서 깬 북해투왕이 아랫배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사부님·”
“내가 사부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배에 살이 오른 걸 보니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한 십 년쯤 되셨지요?”
“됐고· 이것들은 다 뭐야?”
“제자가 위험한 표행을 마치고 두 달 반 만에 돌아왔으면 다친 곳은 없는지 안부 정도는 한번 물어봐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제자일 때 얘기지·”
“사천성에 갔더니 커다란 냄비에 육수를 끓여서 각종 고기와 채소와 면을 데쳐 먹는 화과아 요리가 일품이더라고요· 사부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끓여 드리려고요·”
“기왕에 화과아 맛을 보여 주려면 좋게 사다 줄 것이지· 백선반점에 가면 천하의 요리를 다 파는데·”
“제가 이래 봬도 표행을 하며 요리를 워낙 많이 해봐서 웬만한 숙수보다 훨씬 낫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표사들이 길바닥에서 해먹는 게 무슨 음식이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북해투왕은 어느새 고개를 쭉 빼고 식재료들을 살폈다·
장삼이 돌덩어리 사이에 결어두고 간 솥에 육수를 붓고 장작불을 피우는 과정이 능숙하게 펼쳐졌다·
이윽고 육수가 끓기 시작하자 구수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북해투왕은 불을 쬐는 척 하며 슬그머니 솥단지 가까이로 다가와 앉았다·
“그래서 무얼 데쳐 먹는다고?”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를 비롯해 각종 채소와 면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가져 왔습니다· 육수가 조금 더 졸아들면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살짝 데쳐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순으로 먹자고· 채소는 고기 먹을 때 곁들여 먹고 면은 가장 나중에 입가심으로 먹고·”
“잡내가 많은 양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순으로 먹어야 뒷맛이 개운합니다· 나머지는 저도 동감이고요·”
“모르는 소리· 비싸고 맛있는 것부터 차례로 먹어야 식재료 본연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법이야· 가장 맛있는 걸 나중에 먹으면 배가 불러서 점점 맛이 없어진다고·”
“오늘은 제 방식대로 드십시오·”
“나 끓여주려고 가져온 거라며?”
“저도 옆에서 조금 먹어야지요·”
”이상한 걸로 고집을 피우네·“
“사타구니 그만 긁으시고 얼른 손부터 씻으십시오·”
“아랫배거든·”
“방금 쑥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 봤습니다·”
“까탈스러운 놈!”
최고의 숙수가 최고의 식재료로 만든 요리인 만큼 화과아는 정말 맛있었다·
특히 뜨겁고 진한 육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의 구수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배고플 때는 그런대로 먹을 만 하겠다·”
“많이 드십시오·”
“안주는 쓸만한데 술이 없군·”
“그럴 리가요·”
장삼이 가져다 놓은 보퉁이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북해투왕 앞으로 쓰윽 밀어 놓았다·
“이게 무엇이냐?”
“송하주라고 산동성 곡부(曲卓)에서 공자의 후손들이 직접 농사지은 쌀로 무림맹주님께서 손수 빚으신 술입니다·”
“어디서 났느냐?”
“무림맹 총군사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열 병을 선물하셨는데 그중에 한 병을 사부님께 갖다 드리려고 슬쩍 빼돌려 두었습니다·”
“잘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맞고 말고·”
“아직 마시지도 않으셨잖아요·”
“보나 마나 맞을 거야·”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북해투왕은 밀봉을 제거한 후 병째로 신나게 마셔대기 시작했다·
술이 바닥 날 때까지 너도 한 모금 마셔 보라는 소리 한번 없었다·
순식간에 한 병을 비운 그가 알아서 보퉁이를 뒤졌다·
하지만 더는 보이지 않자 아쉬워 하며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배도 채우고 취기도 살짝 오른 북해투왕이 한층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이번엔 또 뭐냐?”
“무엇이요?”
“나한테 무언가 골치 아픈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 거 다 알고 있다· 어차피 들어주지도 않겠지만 술을 얻어먹은 값으로다가 얘기까지는 들어주지· 빨리 말하고 돌아가라· 한참 맛있게 잠이 올려고 하는 중이니깐·”
“사부님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갑자기 고향은 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부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더라고요· 명색이 일인전승의 적전제자 아닙니까·”
“은근슬쩍 자꾸 사부님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어르신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청해성 동쪽에 위치한 서녕(西事)이란 곳이다· 주위가 온통 높은 산과 커다란 호수와 맑은 강들로 둘러싸여 있는 고원 도시지·”
“말씀만 들어도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아름답다 말다· 중원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고장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북방 이민족들의 잦은 침략 때문에 남자고 여자고 좀 거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뿐·”
“곤륜파와는 왜 앙숙이 되신 겁니까?”
“빨리 할 말만 하고 가라니까 왜 자꾸 딴소리야?”
나는 품속에서 또 다른 호리병 하나를 반쯤 꺼내다가 말았다·
조금 전 북해투왕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이 생긴 호리병이었다·
“그건 또 뭐야?”
“원래 제가 한 병을 몰래 챙겨 놓았는데 아버지께서 사부님을 뵙고 오라시며 한 병을 또 따로 챙겨 주시더라고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면서 북해투왕이 한 손을 쑥 내밀었다· 하지만 호리병은 내 품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냐?”
“먼저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강제로 빼앗는 수도 있다·”
“이젠 저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
“···?”
“대체 왜 이러는 게냐?”
“제자는 사부의 은원도 계승 한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이건 사부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순간 북해투왕과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일었다·
언제라도 폭발하듯 뻗어 올 것만 같은 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도 두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금나수를 펼치는 순간 귀영무의 보법에 삼백 년의 공력을 담아 튕겨 오를 작정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북해투왕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배가 불러서 참은 줄 알아라·”
“코피라도 터지는 줄 알고 잠깐 긴장했습니다·”
“싸움을 아주 잘하는 여자가 있었다· 청해성 동쪽 일대에서 말썽을 부리는 흑도란 흑도들은 죄다 두들겨 패고 다녔지· 어느 날은 나를 찾아왔더군·”
“사부님도 흑도이셨습니까?”
“나를 추앙하고 따르던 무리들 중에 흑도가 많았다· 내가 워낙 화끈하게 싸우니까· 그중 한 놈이 은전 열 냥 때문에 일가족을 죽이고 서녕으로 도망쳤는데 내가 숨겨 준 걸로 믿고 있더군·”
“그래서요?”
“내 손으로 놈을 찾은 다음 목을 비틀어서 가져다주었다· 그날 이후 다른 곳에서 사고를 친 흑도들이 서녕으로 도망치기만 하면 나를 찾아오더군·”
“매번 잡아다 주셨군요·”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까 계속 찾아오셨겠지요·”
“나도 그렇게까지 귀찮게 굴 줄은 몰랐다· 정말 집요한 여자였지·”
“그분을 많이 좋아하셨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잡아다 드린 것 아니었습니까? 북해투왕의 협명이 갑자기 청해성에 퍼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요·”
“앞서가지 마라· 그녀는 사문을 떠나와 청해성 일대에서 표주(漂周)를 다니고 있던 곤륜파의 젊은 제자였다· 나랑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표주는 도가문파의 제자들이 삼 년 동안 무일푼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말한다·
마침내 곤륜파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아주 오래되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매음굴 깊은 곳에서 장안으로부터 원정을 온 흑도들과 시비가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북해투왕은 홀로 매음굴로 향했다·
부리나케 달려가던 중 피를 흘리고 의식을 잃은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납치되어 가고 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북해투왕은 질풍처럼 뛰어들어 한 놈의 머리통을 그 자리에서 박살 내고 두 놈의 팔다리를 부러뜨렸다·
가까스로 횡액을 피한 다섯 놈들과는 길바닥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여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터라 마음이 너무 급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여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녀는 머리가 터진 채 누워 있는 한 놈과 팔다리가 꺾인 채 쓰러져 있는 두 놈 그리고 피로 흥건한 북해투왕의 두 주먹을 보고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변복을 한 채 흑도들로부터 그녀를 구출해 매음굴을 빠져나가던 곤륜파의 제자들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녀의 사형을 일장에 때려죽인 거지· 그녀의 사형들도 내가 다짜고짜 덤벼들어 살수를 펼치자 여자를 빼앗으려는 흑도인 줄 알고 맞서 싸웠고·”
“어떻게 그런!”
“모든 게 그동안 나한테 당한 걸 복수하기 위해 서녕의 흑도들이 꾸민 함정이었다· 그녀와 곤륜파의 제자들을 매음굴로 유인한 것도 그녀가 위험에 빠졌다며 내게 소식을 전한 것도·”
머리가 터진 곤륜 제자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팔다리가 부러진 제자 두 명은 암경이 뼛속까지 파고 든 나머지 평생 무공을 쓸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이후 여자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곤륜산 어느 골짜기 깊은 동굴로 들어가 십 년간의 기나긴 면벽수련을 시작했다·
곤륜파는 복수를 천명했다·
그들은 이 일에 관계된 흑도들을 모조리 색출해 동참한 정도에 따라 숨통을 끊거나 사지근맥을 잘랐다·
이어 고수들을 내려 보내 북해투왕을 추적게 했다·
“전후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 드리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최소한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음은 아셨을 텐데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더란 말이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북해투왕은 곤륜파의 복수를 피해 이곳까지 도망친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여제자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도망쳐 왔다는 걸·
“너의 뱃속에 삼백 년 묵은 이무기가 들어앉아 있음을 안다· 그 힘을 잘 간수하거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함부로 쓰지 말라는 뜻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품속에서 술 호리병을 꺼내 조용히 앞으로 밀어 놓았다·
북해투왕이 호리병을 들고 꺾었다·
입 주변으로 흘러내리는 술이 오늘따라 그의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북해투왕이 술 호리병을 다시 내려놓으려 했을 때는 그 자리에 오래되고 낡은 호패가 먼저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뭐냐?”
“백칠십사 년 전 곤륜파의 어느 장로께서 누군가에게 준 보은패입니다· 어쩌다 보니 돌고 돌아서 제 수중에 들어와 있더라고요·”
“설마 당금 강호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그거 맞습니다·”
“이것도 훔쳤느냐?”
“곤륜파의 장문인께서 해남파의 장문인께 돌려주신 걸 해남파의 장문인께서 다시 제게 의뢰비로 주셨습니다· 제가 밤새 술을 가르쳐 드렸거든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그리고 지금 제가 사부님께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다는 사부님께서 더 요긴하게 쓰실 것 같아서요·”
“···!”
보은패가 어떻게 쓰일지는 알 수 없다·
이걸로 더는 자신을 쫓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잠시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지금쯤이면 면벽수련을 끝내고 나왔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으면서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헤어져 버린 여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든지·
어떻게 쓰이든 더 늦기 전에 북해투왕이 곤륜파와의 은원을 좋은 방향으로 정리하길 바랐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어 걸음을 물러난 후 돗자리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대례를 올렸다·
“누가 뭐래도 제게는 존경해 마지않는 사부님이십니다· 십초박 아니 뇌격진천연환백팔타와 귀영무를 부지런히 익히고 그 힘을 바르게 써서 비영문(秘影門)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해투왕의 눈이 격정으로 흔들렸다· 보은패를 집어 드는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솥단지와 그릇들을 챙겨서 돌아가려는 나를 그가 붙잡았다·
“그녀도 나를 좋아했을까?”
“너라면 왠지 알 것 같아서·”
“그건 확실합니다·”
“어째서?”
“아니면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사부님을 찾아오셨겠습니까?”
나는 다시 묵례를 한 후 월성교를 떠났다·
첫 번째 사부이자 천하십대권사의 한 명이었던 북해투왕 혁방세와 나는 그렇게 서투른 모습으로 작별을 했다·
***
늦은 밤 천룡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다시는 북해투왕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쉽게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서 혼자 조용히 술이나 한잔할 계획이었다·
집무실에는 공주가 표국을 찾아올 때마다 핑곗김에 들고 왔다는 즉묵노주(卽墨老酒)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녀가 직접 빚어서 북경에서부터 가져온 즉묵노주는 작년에도 이화원에서 한 차례 마셔 본 적이 있었다·
그땐 거의 맹물에 가까웠는데 그사이 각성이라도 했는지 어제 비룡당의 식구들과 마셨을 때는 제법 술맛이 났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콧구멍을 파고들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피!’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다음 천천히 주변을 쓸어 보았다·
드넓은 집무실의 구석진 곳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가만히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객인가?”
그림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무실을 들어왔을 때는 분명 좋은 목적으로 온 게 아닐 터·
상대가 누군지는 일단 때려눕히고 나서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파앙!
귀영무의 보법과 함께 벼락처럼 신형을 쏘았다·
단전에 삼백 년의 공력을 갈무리한 이후 내 움직임은 번쩍이는 섬광과도 같았다·
놈의 턱주가리를 부수어 버리려던 나는 불과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황급히 주먹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었다·
그림자가 피하거나 반격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갑자기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쓱 넘어졌기 때문이다·
털썩!
어처구니없게도 그림자는 내 품에 안긴 채 그대로 의식을 잃어 버렸다·
“어랍쇼?”
이게 뭔 일인가 싶어 그림자를 일단 바닥에 눕힌 다음 촛불을 밝혔다·
복면을 뒤집어쓴 그림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슨 놈의 자객이 때리지도 않았는데 쓰러져?”
한 손으로는 얼굴을 비추고 한 손으로는 복면을 홱 벗겼다·
그러자 하얀 피부에 매혹적인 얼굴을 가진 젊은 여자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아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다·
“연소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