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 구대문파의 장문인들(3) >
내실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특히 남궁소소를 비롯한 이갑룡 을룡 병룡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같이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일을 꾸미려고 그러느냐는 표정들이었다·
공진대사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보은패를 저희 천룡표국을 통해 해남파로 보내시면 됩니다· 단 운송 날짜를 따로 정해주지 않으셔야 하고요·”
“날짜를 정하지 않으면 언제 운송하겠다는 건가?”
“일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해남파의 장문인께서 얼마나 빨리 강해지시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때까지는?”
“천룡표국에서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태표(息鏡)!”
남궁소소가 흥분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소리를 질렀다·
이어 실태를 깨닫고는 두 손으로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남궁소소를 보았다·
남궁유룡이 사람들을 대신해 남궁소소에게 물었다·
“그게 무엇이더냐?”
남궁소소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표사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로 표행을 본래 일정보다 고의로 느리게 하여 표주를 골탕 먹이는 걸 말합니다· 강동지방의 표사들은 만표(慢鏡)라고도 부르고요·”
사천에서 백포산군을 상대로 내가 써먹었던 수법이 번쩍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의뢰인이 처음부터 운송 날짜를 먼 훗날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표나 만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취인에게 전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 위탁보관이었다·
표국에서 표주의 개인 사정이나 요구로 돈을 받고 표물을 일정 기간 보관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궁소소의 설명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려는 말뜻은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전달 되었다·
말문을 연 김에 남궁유통이 내게도 물었다·
“하면 아홉 초식은 어쩌고?”
“이미 보은패의 뒷면에 새긴 아홉 초식은 새까맣게 먹칠을 하여 영구적으로 봉인해 버리면 됩니다· 대신 정확하고 안전한 전달을 위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하루에 한 분씩 맹 내의 조용한 장소에서 해남파의 장문인을 만나 직접 전수해 드리면 어떨는지요?”
무공을 글로 배우는 것과 직접 검을 부딪쳐 가며 배우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더구나 그것을 전수하는 사람들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건 그냥 기연이다·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돌아보는 엽초풍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꼭 두 개의 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좋을까?’
단순히 창랑삼십육검의 아홉 초식만이 문제가 아니다·
엽초풍이 남해일검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익힌 지 이제 겨우 삼 년 남짓이었다·
유파를 떠나 무공이라는 광활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물론 양홍경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사형들이 아홉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엽초풍 같은 비정상적인 천재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에는 역량이 많이 모자랐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대문파 장문인들과의 독대는 엽초풍에게 있어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기왕에 표행을 하는 김에 나는 너무나 일찍 죽어버린 그래서 어린 나이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문을 이끌어야 했던 엽초풍에게 잠시나마 사부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에게로 향했다·
보은패를 내게 맡기는 문제도 그렇고 아홉 초식을 직접 전수해 주는 것도 그렇고 모두 그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친전(親傳)이라· 안 될 것도 없겠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요·”
소림사의 공진대사와 무당파의 청허진인이 번갈아 한 말이었다·
그러자 화산파의 옥수진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먼저 당사자의 생각을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젊은 나이일지라도 일파의 장문인이신데 타 문파의 장문인들에게 무공을 배운다는 것이 탐탁지 않을 수도····”
“저는 좋습니다!”
옥수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엽초풍이 손까지 들며 외쳤다·
조금 전만 해도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을 보여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가 지금은 영락없는 열세 살짜리 소년이었다·
실태를 깨달은 엽초풍의 얼굴이 빨개졌다·
공진대사를 시작으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물론이고 설산신검 남궁유룡 사마옥까지도 모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곤륜파의 운학진인이 공진대사에게 말했다·
“보은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공진대사는 즉답을 피한 채 사마옥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에게로 공을 넘겨 버렸다·
표국의 사정에 정통하고 이런 일에도 익숙한 사마옥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사마옥은 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림맹 총군사라는 직책이 민망하군요·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완벽한 계획입니다· 표왕이 계신 천룡표국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나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받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무림맹의 대소사를 나보다 더 잘 이끌 거라는 말은 아니니 너무 겸양할 것 없네· 대체 그런 묘안을 어떻게 생각해 낸 건가?”
“본래 잔꾀는 제갈량보다 저잣거리의 도둑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나 표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니·”
“도둑의 잔꾀가 제갈량의 신기묘산보다 낫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지혜인 셈이지·”
내가 사마옥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구대문파 장문인들은 자신들끼리 조용히 시선을 나누었다·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중지를 모으는 것이다·
이윽고 무당의 청허진인이 내게 물었다·
“표행을 의뢰하는 것이니 응당 표비를 내야겠지?”
“그렇습니다·”
“소문에 듣자 하니 풍운비룡은 매우 비싸다던데·”
남궁소소를 비롯해 이갑룡 을룡 병룡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특히 남궁소소는 마른 침까지 꿀꺽 삼켰다·
내가 보은패의 운송을 우리에게 맡기라며 꼬드긴 이유가 이것이고 여기서 한밑천 크게 땡길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돈의 일 푼은 그녀의 것이고·
“보은패 하나당 은전 한 냥씩입니다·”
남궁소소 · 이갑룡 · 을룡 · 병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같이 ‘내가 잘 못 들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화산파의 옥수진인이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이건 단순히 범부의 호패를 보관하고 있다가 전달해 주는 표행이 아닐세· 보은패를 노리는 수많은 도적과 고수들로부터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 동안 지켜야 하네· 그러고도 잃어버리면 우리를 대신해 천룡표국이 보은패의 소명을 모두 완수해 주어야 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도 은전 한 냥씩만 받겠다고?”
“그렇습니다·”
“어째서인가?”
“고인이 되신 유성표 대협께서 보은패의 운송비용을 처음부터 그렇게 책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명표가 한 냥을 받았는데 일개 표사에 불과한 제가 어찌 더 큰 액수를 부르겠습니까?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석 달 전 유성표는 엽초풍으로부터 보은패 한 개당 은전 한 냥씩 해서 총 아홉 냥을 받고 표행을 시작했다·
나는 이걸 해남도로 들어가서야 알았다·
때문에 이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남궁소소와 엽초풍 그리고 양홍경을 비롯한 해남파의 사형제들밖에 없었다·
그때 남궁소소가 입술을 미세하게 달싹거리고 있었다·
전음으로 남궁유룡에게 열심히 사정을 설명해 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남궁유룡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을 것이다·
남궁유룡에게 전해진 설명이 설산신검과 사마옥을 거쳐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에게로 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걸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표비가 생각보다 싸서 그런지 다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시 공진대사가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표사로서 자네의 의기는 충분히 알겠네· 하지만 유성표가 은전 한 냥으로 운송료를 책정한 건 표주의 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일 걸세· 그리고 우리에겐 우리의 입장이 있네· 바로 이 보은패들이 사문의 사조들께서 쓰시던 호패라는 사실이지· 한데 후예인 우리가 어찌 은전 한 냥에 운송을 맡기겠나·”
공진대사가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공감한다는 듯 전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구대문파 정도 되면 비용보다는 명분이나 체면이 훨씬 중요하기는 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공진대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눈까풀에 가려져 눈동자를 볼 수가 없었다·
눈동자를 볼 수 없으니 나도 모르게 살짝 간이 커지는 것 같았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정 그러시다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해남파의 장문인께 이자를 조금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자?”
“방장 대사님께서 백칠십사 년 전에 빌린 초식을 이제야 주인에게 돌려주신다고 말씀하셔서 그런 맹랑한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표행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해남도에 계신 장문인을 뭍으로 모셔와 온갖 고생에 험한 꼴까지 보게 해드린 죄가 있어 그걸로 갈음할까 합니다·”
“계산이 그렇게 되는군·”
“하면 저는 유성표 대협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선 충분한 비용을 지불하신 것이 되고 해남파의 장문인께선 문파를 일으킬 약간의 밑천을 챙기게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조카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지요·”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공진대사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물었다·
“그래 이자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받고 싶습니다·”
“무얼로 말인가?”
나는 잠시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말들을 한 번에 쉬지 않고 모두 쏟아내 버렸다·
“소림사에서는 대환단(大還丹) 무당파에서는 태청신단(太消神丹) 화산파에서는 자하신단(紫露神丹) 곤륜파에서는 귀녹룡단(歸庭龍丹) 청성파에서는 천왕호심단(天王護心丹) 아미파에서는 통달보리심단(通達菩心丹)을 각 반 알씩만 주십시오· 그리고 공동파와 종남파에서는 각각 봉혈피독단(風血避毒丹)과 백초피독단(百草避毒液丹)을 반 알씩 주시고요·”
순간 소림사 공진대사의 눈까풀이 살짝 들리더니 맹수의 그것처럼 번쩍이는 눈동자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소용돌이치는 격랑과 함께 장내가 얼음 물을 길어다가 뿌린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지길 한참 설산신검이 착 가라앉은 데다 살짝 노기까지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자네가 말한 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 알만 복용해도 반갑자의 내공 증진 효과가 있는 영단들입니다·”
“하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도 잘 알겠군·”
“각각의 문파에서 짧게는 십 년에서 길게는 반 백 년에 걸쳐 만들며 소림사 대환단의 경우 한 세대에 서너 개 정도를 겨우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그걸 이자로 달라고?”
“그렇습니다·”
“어째서?”
“지금 해남파의 젊은 장문인께 가장 필요한 것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한데 그 시간까지 자신의 몸을 지키고 버티려면 무공초식들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공만 가득하다고 모기가 벌침을 놓는다던가!”
“벌보다 무서운 모기도 있습니다·”
“무어?”
“믿기 힘드시겠지만 해남파의 장문인께선 창랑심십육검을 수련한 지 삼 년 만에 육성의 경지를 밟으셨습니다· 한 번 본 것은 뭐든 다 외워 버릴 뿐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눈도 탁월해서 해남도에서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무재라는 평을 듣고 있지요·”
나는 두 달 전 이견과 삼견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삼견의 말에 따르면 전대 장문인인 남해일검은 저 소년 장문인이 자라서 그 옛날 철검무적처럼 해남파를 다시 강력한 문파로 이끌어 주길 바랐다·
내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설산신검이 잠시 시간을 주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도 살짝 당황한 표정들을 지었다·
저들이라면 굳이 격기(激氣)를 통하지 않고도 엽초풍의 근골이며 자질이 예사롭지 않음을 한눈에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창랑삼십육검을 단 삼 년 만에 육성의 경지까지 밟았다는 건 몰랐음이 분명했다·
양홍경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해남파 역사상 철검무적을 제외하고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많은 영단을 어떻게 빚었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철검무적 대협으로부터 아홉 개의 초식이 탄생하기까지도 그랬을 겁니다· 백칠십사 년간의 이자 치고는 그리 비싸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뜻을 꺾지 않는 내 모습에 설산신검 사마옥 남궁유룡이 호목을 부릅떴다·
당사자인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반대로 눈매가 좁아졌다·
남궁소소와 이갑룡 을룡 병룡은 거의 미친놈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엽초풍 그리고 양홍경을 비롯한 해남파의 사형제들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한참 만에야 공진대사가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네·”
칼로 자르듯 뚝 끊어지는 음성이었다·
소림사의 방장이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리 없을 터 엽초풍에게 가장 부족한 내공을 채워 주겠다는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다·
하기사 문파 차원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든 영단을 내놓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전이대법으로 노부의 공력을 조금 나눠 주지· 한 이십 년 정도의 공력이면 되려나?”
“예?”
“아미타불· 백칠십사 년 전의 인연이 돌고 돌아 남해일검을 만났고 또 그가 제자를 내게 보내 새로운 인연을 청하니 어찌 모른 척 할 것인가· 이십 년의 공력도 괜찮다면 소림사는 기꺼이 이자를 지불하겠네·”
“원시천존 비싸다고 해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게 되어 버렸군· 공력을 나눠 주는 거라면 무당파도 기꺼이 이자를 지불하겠네·”
“화산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곤륜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청성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공동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종남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아미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점창파도 기꺼이 지불하겠네·”
“남해일검 전 장문인에게는 이 몸도 해남도로 들어갈 때마다 몇 차례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바· 남궁세가에서는 환혼백초탕(換魂百草 湯)을 준비하겠네· 장문인들께서 나눠 주시는 귀한 공력을 잃어 버리는 것 없이 단전에 전부 갈무리하려면 벌모세수(伐毛洗隨)부터 해야 할 테니 말일세·”
마지막은 남궁유룡이 한 말이었다·
벌모세수는 어린 사람을 대상으로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신체로 만들기 위해 펼치는 대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각종 영약과 독약이 함께 동원되기 때문에 몸의 털이란 털은 몽땅 빠지고 골수까지 씻겨 내려간다·
대신 며칠 간의 고통만 견디면 말 그대로 탈태환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방이 있어야 하는 데다 약재들이 워낙 귀하다 보니 제자가 구름처럼 많은 무림문파에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반면 부유하고 유서 깊은 무림세가의 적통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환혼백초탕은 남궁세가에서 혈족들에게 바로 그 벌모세수의 대법을 펼칠 때 쓰는 약재인 것 같았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에 이은 뇌검 남궁유룡의 폭탄 같은 선언에 장내의 공기가 발칵 뒤집혔다·
일이 이렇게까지 화끈하게 전개될 줄 몰랐던 남궁소소와 이갑룡 을룡 병룡은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말을 꺼낸 나도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선배 장문인들의 배려에 초보 장문인 엽초풍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림말학 엽초풍 죽는 날까지 선배님들의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엽초풍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러자 구대문파의 장문인들 전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엽초풍을 향해 마주포권지례를 했다·
문득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이십 년씩의 공력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 보은패 운송에 대한 제값을 치르기 위해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와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일파를 이끄는 장문인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노사부가 죽고 홀로 남아 해남파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어린 엽초풍을 조금씩만 도와주고 싶지 않았을까?
문파를 떠나 무림이라는 큰 틀에서 보자면 해남파는 정도무림의 귀한 자산이었다·
만약 해남파가 없었다면 해남도와 그 주변 바다는 온갖 흑도들이며 해적들이 들끓는 소굴로 변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인사말이 오고 가길 한참 아직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우리는 다분히 배려가 담긴 설산신검의 축객령을 받고서야 마침내 숨막히는 맹주부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아주 탈탈 털어먹고 나가는군요·”
“강호가 온통 풍운비룡이라는 이름으로 시끄러운 이유를 알겠습니다· 직접 보니 과연 대단한 아이입니다·”
“분명 통찰력은 아닌데 대화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빨려 들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아마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협의지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삼뇌의 농간에 우리가 서로 칼끝을 겨누게 된 상황을 혼자 해결해 놓고도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생색도 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은연중에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해남파의 어린 장문인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잔꾀를 내면서도 말이지요·”
화산파의 옥수진인에 이어 곤륜파의 운학진인 청성파의 무극진인 공동파의 복마신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미파의 혜광사태가 한 말이었다·
소림사의 공진대사가 덧붙였다·
“아들은 아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더니만 맹주께서 욕심내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맹도로 이끌기만 했다면 분명 정도무림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보다는 총군사께서 더 욕심을 내셨지요· 한데 보시다시피 기름 바른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데다 제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쇠심줄이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아주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중 한 분께서 머지않아 저 아이를 수중에 넣으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마옥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남궁유룡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남궁유룡은 이까지 드러내며 눈처럼 하얗게 센 수염을 쓸었다·
“이렇게 다들 모인 것도 벌써 십 년 만이군요· 답답한 맹주부에서 이럴 게 아니라 황하에 유선(遊船)이라도 띄우고 술이나 진탕 마시도록 하십시다· 비용은 전부 이 몸이 대도록 하지요· 껄껄껄·”
맹주 설산신검이 덧붙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정마대전이 시작되면 한동안은 오늘처럼 한가하게 담소를 나눌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