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골육상쟁 (6) >
여강에서 은하산장이 있는 사천성 벽오산까지 가는 길은 첩첩산중의 연속이었다·
산 하나를 넘을 때마다 고갯마루에 서면 파도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산봉우리들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워낙 오지인데다 지형 또한 험난해서 갑자기 길이 사라져 버리는 곳 역시 부지기수였다·
덕분에 시간은 조금 지체되었지만 경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지금도 집채만한 바위들 사이로 폭포와 소를 만들며 흐르는 계곡을 보고 있자니 흡사 길을 잃고 선계에라도 들어선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어때요?”
남궁소소가 내게 물었다·
일행 중에는 점창오검의 단석조도 있고 해남파의 양홍경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인데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룡당이 가는 길에 합류한 상황이었기에 여정 중 필요한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내 결정을 따랐다·
“아직도 해가 한 뼘이나 남았소만·”
“산속에선 해가 빨리 진다고 하셨잖아요· 아침에 내린 비로 나무가 온통 젖어서 마른 떨감을 구하려면 다른 날보다 시간도 오래 걸릴 거예요·”
무언가 이상해서 슬쩍 옆을 돌아보니 엽초풍이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산이 워낙 가파른데다 길까지 없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말을 한 번도 타지 못하고 끌고만 다녔다·
메추리알만한 단전을 가진 열세 살 소년이 종일토록 산을 일곱 개나 걸어서 넘었으니 지칠 법도 할밖에·
“오늘은 여기서 묵겠습니다· 인원이 많으니 문파별로 장소를 정하고 모닥불을 피우시되 서로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일찍 야숙을 시작한 만큼 내일은 다른 날보다 반 시진 일찍 출발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야숙을 준비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돌을 모아 화덕을 만들고 낙엽 더미를 뒤져 마른 나뭇가지들을 구하거나 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한데 어쩐 일인지 서호삼견은 흩어지지 않고 내곁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일견이 말했다·
“이틀째 육포 쪼가리만 물에 불려 먹었더니 통 힘을 못 쓰겠군· 기왕에 다른 날보다 일찍 여정을 멈추었으니 우리는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들이라도 있는지 한 바퀴 쓰윽 둘러보고 오겠네·”
“곧 어두워 질 텐데요·”
“골이 깊고 산이 울창한 걸 보면 분명 짐승도 많을 터· 셋이서 함께 돌아다녀 보면 금방 한두 마리 잡을 수 있을 걸세·”
“탁중로 표사와 번견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말씀하신 것처럼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호랑이라도 출몰할까 우려됩니다·”
“번거롭게 시리 번견은 무슨· 너무 염려 말게· 아무렴 천하의 서호삼절이 호랑이 한 마리를 두려워할까·”
“호랑이가 있으면 오히려 찾아다녀야죠· 호피 한 장에 은전 스무 냥은 족히 받을 텐데· 안 그렇느냐? 셋째야·”
“꿈 깨십시오· 호랑이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랍니까· 찾는다고 아무 때나 맞닥뜨리게·”
일견의 말에 이견과 삼견이 차례로 쿵짝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는 뭐라 더 말을 붙여볼 사이도 없이 경공을 펼쳐 휙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간만에 짐승을 사냥해 먹을 생각해 다들 회가 동한 것이다·
“야숙을 하기에 좋은 장소는 첫 번째가 동굴 속이고 두 번째가 여기처럼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경사진 절벽 아래예요· 절벽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우면 온기도 가두고 달귀진 벽 때문에 밤새 따뜻하게 잘 수가 있죠·”
남궁소소가 야트막한 절벽 아래에서 엽초풍을 앞에다 앉혀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곤 갑자기 단도를 쓰윽 꺼냈다·
이어 독고완이 땔감용으로 용케도 구해다 놓은 마른 소나무 둥치에서 적당한 굵기의 가지 하나를 툭 쳤다·
다음엔 자른 가지의 단면을 대충 문질러서 살펴보고 냄새도 킁킁 맡아 보더니 말했다·
“송진이 아주 꽉 찼네·”
소나무가 죽으면 볕과 바람에 서서히 마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가지에 남아 있던 송진이 전부 아래의 옹이 쪽으로 모이고 고여서 굳는다·
이걸 관솔이라고 하는데 물에 젖어도 불이 기가 막히게 잘 붙는다·
표사들은 표행 중에 관솔을 모아 임시로 횃불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제 불을 피워 볼까·”
관솔을 칼로 잘게 긁어 만든 부스러기에 화석을 쳐 불씨를 일으키고 그걸 다시 점차 굵은 나무로 옮겨 붙이는 과정이 남궁소소의 손끝에서 능숙하게 펼쳐졌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들에게 먹일 콩을 물에 불리며 남궁소소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표사 다 됐네·’
남궁소소에게 관천망기를 비롯해 야숙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표사의 기술들을 가르친 사부로서 뿌듯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화석의 불똥을 제법 커다란 모닥불로 변신시킨 남궁소소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엽초풍에게 말했다·
“어때요· 쉽죠?”
“선배님께서 쉽게 하신 거죠·”
“장문인께서도 금방 배우실 수 있어요·”
“불이 이렇게 귀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엽초풍은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벌리며 모닥불을 쬐었다·
남궁소소는 뽑았던 칼을 칼집에 척 꽂으며 말했다·
“모닥불은 야숙의 꽃이죠·”
저거 내가 한 말인데·
“그런데 해남도는 따뜻해서 소나무가 없어요·”
“예?”
“있기는 있지만 보기가 쉽지 않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럼 어떻게 불을 피우죠?”
“대신 야자 열매가 도처에 떨어져 있습니다· 잘라서 과수로는 갈증을 달래고 하얀 속살은 파서 배를 채우고 부슬부슬한 껍질은 잘게 찢어 부싯깃을 만들면 딱이지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그런 건 다 어떻게 아세요?”
“사부님께 배웠습니다·”
“그러셨군요·”
남궁소소는 금방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무림의 선배랍시고 어린 엽초풍에게 불피우고 야숙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십 리에 바람이 다르고 백 리에 습속이 다른 법이다·
하물며 바다 건너의 해남도는 모든 게 중원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해남도에서는 표사들이 길을 찾기 위해 별을 보는 법도 다르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 기가 죽을 남궁소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예 엽초홍의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사부님께 또 뭘 배우셨어요?”
“전부요· 숨 쉬는 법 걷는 법 먹는 법을 비롯해 제가 알고 있는 것 전부 사부님께 배웠습니다· 그냥 함께 조용히 산책만 한줄 알았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철 따라 오지산에 피는 꽃들의 이름도 다 그때 배웠더라고요·”
“다정한 사부님이셨군요·”
“엄한 사부님이셨습니다·”
“겉으론 엄하고 속으론 다정한 사부님이셨을 거예요· 사부님들은 다 그러시죠·”
“선배님께선 꽃 이름들을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어머니께요· 집안에 온갖 꽃들을 직접 키우고 가꾸셨는데 어린 제 손을 잡고 다니며 일일이 가르쳐 주셨죠·”
“좋은 분이시군요·”
“물론이죠·”
고아에다 아직 어린 엽초풍을 생각하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어지간해선 꺼내지 않을 법도 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남궁소소였지만 일부러 솔직히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 엽초풍을 배려만 해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동등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려 깊은 엽초풍의 어법 때문이다·
저런 천재들은 상대가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엽초풍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런 건 크게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엽초풍의 얼굴이 훨씬 밝아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송진이 가득 찬 관솔은 어떻게 찾죠?”
“해남도에는 소나무가 없다면서요?”
“배워 놓았다가 훗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려고요· 생각해 보니 장차 해남파의 제자들이 중원으로 천일주유행(千0周遊行)을 오게 되면 요긴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
“천일주유행이요?”
“해남파의 제자들은 성년이 되면 천 일 동안 해남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세상 공부를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한데 앞으로는 중원으로 오게 하려고요·”
“왜요?”
“그래야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요·”
남궁세가와 같은 속가문파의 제자들은 구태여 세상을 배우기 주유행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심산유곡에 뿌리를 내린 산중 문파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은 때가 되면 제자들을 내려보내 삼 년 동안 무일푼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고 익히게 한다·
도가에서는 이를 표주(漂周)라 하고 불가에서는 만행(萬行)이라 한다·
그 외에도 문파마다 풍운행이니 유수행이니 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부르지만 다 똑같은 의미였다·
해남도는 비록 섬이지만 몇 년이 걸려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크고 넓었다·
그래서 과거 해남도의 제자들은 천일주유행을 할 때 구태여 해남도를 벗어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평생 살아야 할 땅도 중원이 아닌 해남도였고·
한데 엽초풍은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여정 중에 여러 차례 대화를 해보니 그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해남파의 뿌리 깊은 분열이 사람들의 협소한 시각에서 비롯됐다고 여기는 듯 했다·
아니면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해남파의 고질적인 분열을 타개할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든지·
어느 쪽이든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열세 살짜리 아이의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십중팔구 고인이 된 사부의 생각일 것이다·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엽초풍은 사부가 무심결에 했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고·
하지만 그런 바람들은 모두 그가 해남오가의 사납고 악랄한 사형들로부터 장문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엽초풍에게서 내가 보였다·
“어려울까요?”
“천만에요· 꽃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쉽답니다· 여기 보시면····”
남궁소소가 말을 끊고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산꼭대기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무언가 이리로 오고 있소·”
“뭐가요?”
“뭔지 모르지만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오·”
주변에서 화덕을 만들거나 땔감을 모아오던 사람들도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심지어 단석조를 비롯한 점창오검은 무언가 잘 못 들은 게 아니냐는 표정까지 지었다·
반면 내가 틀리는 법이 없다는 걸 아는 남궁소소와 독고완 그리고 탁중로는 서둘러 도검부터 챙겼다·
컹! 컹! 컹! 컹!
나무에 묶어 둔 번견들이 갑자기 산꼭대기 쪽을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다·
점창오검도 그제야 무언가 기척을 느끼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강호에 명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표행들을 성공시킨 덕이 클 뿐 무공은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그에 반해 점창오검은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이었고·
한데 자신들은 물론이고 인간보다 여덟 배나 먼 곳의 소리를 듣는다는 번견들까지 압도해 버리는 내 청력에 아연실색할밖에·
잠시 후 닭이 홰를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 개의 인영이 빼곡한 나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달려 내려오는 게 보였다·
“서호삼절 선배님들이신 것 같은데요·”
“저 양반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빨랐지?”
독고완과 탁중로가 한 말이었다·
서호삼견과 수차례 표행을 했지만 우거진 숲속을 저토록 빠르게 달려내려 오는 모습은 나 역시도 처음이었다·
컹! 컹! 컹! 컹! 컹!
서호삼견임을 확인하고도 번견들은 짓기를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도 서호삼견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짖어대는 건 본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냥을 나갔던 노인네들이 산을 저렇게 달려 내려올 이유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뒤에 뭐가 따라오는데요·”
“호랑이다!”
“저게 대체 몇 마리야!”
“다섯 마리· 아니 여섯 마리 아니 일곱 마리입니다!”
호리독사 남궁소소 탁중로 독고완이 차례로 외친 말이었다·
서호삼견의 뒤에는 정말로 암갈색의 얼룩 문양을 가진 호랑이 일곱 마리가 질풍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말(馬)을 한 곳으로 모으십시오· 어서!”
내가 외쳤다·
사람들은 재빨리 흩어져서 여기저기 묶어둔 말들을 절벽 아래로 끌고 왔다·
그런 다음 문파를 구분하지 않고 검진을 펼치듯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앞을 막아섰다·
탁중로는 황급히 달려가 나무에 묶어둔 번견들을 풀어 주었다·
호랑이를 사냥하라는 게 아니라 나무에 묶여 있다가 물려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일단 피신을 하라는 뜻에서였다·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점창오검은 일열을 해남파의 제자들께선 이열을 맡습니다· 일열은 십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열은 일보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내 명령에 따라 표사들과 점창오검은 앞으로 나오고 해남파의 제자들은 뒤로 물러났다·
가장 안쪽 절벽 아래에는 말과 함께 엽초풍이 있었다·
말과 아이는 굶주린 호랑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었다·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남궁소소가 물었다·
“호랑이는 무리를 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겨울철 번식기가 되면 수컷들이 암컷을 찾아오느라 하나의 산에 여러 마리가 잠시 머무는 경우도 있소· 그렇다고 해도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법은 없는데 이상한 일이군·”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서호삼견이 숙영지로 들어서면서 일곱 마리의 호랑이도 함께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움직임은 개의 그것과는 다르다·
한 번의 도약으로도 세 배 이상 높거나 멀리 뛴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거나 도약하는 속도 역시 개 따위에 견줄 것이 아니다·
거기에 멧돼지의 두개골을 뚫는 송곳니와 아름드리 나무를 찢어발기는 발톱까지 갖고 있다·
호랑이는 오로지 무언가를 잡아먹기 위해 탄생한 짐승이다·
인간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호랑이의 타고난 힘과 속도와 공격성을 당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손에 무기를 쥐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무기를 보통의 인간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와 힘으로 휘두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더욱 달라지고·
나는 불을 피우려고 부러뜨려 놓은 몽둥이 두 개를 들었다·
뻑! 뻐벅! 뻑뻑!
껍질이 홀라당 벗겨진 대호의 뒷다리 두 짝이 모닥불 위에서 천천히 구워지고 있었다·
한쪽 끝에는 삼견이 쪼그리고 앉아 고기가 골고루 익도록 통나무를 정성껏 돌리는 중이었다·
일견은 고기에 칼집을 어슷어슷 내고는 열심히 소금을 뿌리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이견이 호랑이 가죽을 쫙 펼쳐 놓은 채 안쪽에 붙은 비계를 살살 긁어내는 중이었다·
호랑이들은 처음 한 마리를 때려 잡자 나머지는 전부 줄행랑을 놓아 버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사냥한 인간이나 짐승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윽고 비계를 모두 벗긴 이견이 가죽을 다시 똑바로 홱 뒤집어 놓았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암갈색의 얼룩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견은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피다가 머리에 이르러 탄식을 쏟아냈다·
“하필이면 인중에 구멍이 나가지고·”
호피는 귀신도 쫓을 정도로 위엄스러운 얼굴이 생명인데 하필 인중에 구멍이 났으니 좋은 값을 받기는 틀렸다는 소리다·
다들 기가 막힌 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아직도 소금을 뿌려대고 있는 일견에게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우거진 덤불 속에서 멧돼지 꼬리가 보이면서 뭔가 커다란 것이 꿈틀거리지 않겠나· 셋째가 냅다 창을 던졌는데 ‘커헝!’ 하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 창을 맞은 호랑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라고·”
“호랑이 꼬리를 멧돼지 꼬리로 착각하셨다고요?”
“그게 아니라· 호랑이가 멧돼지를 사냥해 잡아먹던 중이었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멧돼지를 잡아서 숙영지로 가져가면 모두가 포식을 하겠다며 좋아했지 뭔가·”
“다른 호랑이들은 뭡니까?”
“창에 맞은 호랑이가 젊은 암 호랑이였던 모양이었네· 물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닭대신 꿩이라며 도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덤벼 들었지·”
“그런데요?”
“거의 다 잡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수컷 호랑이들이 떼거리로 나타나더군· 해서 급한 대로 일단 숙영지로 유인을 해 온 것이네·”
“보통은 숙영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위험할까봐 다른 곳으로 유인을 하지 않을까요?”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그랬겠지·”
호랑이가 일곱 마리나 나타나자 놀라서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무작정 숙영지로 도망쳤으면서 유인은 무슨 얼어 죽을·
남궁소소가 엽초풍에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이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혼전 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보이지 않더라니 갑자기 뒤쪽의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엽초풍을 공격했었다·
가장 작고 약해 보이는 인간을 노린 것이다·
엽초풍은 발군의 무재를 지닌 기재답게 창랑삼십육검의 일초식으로 호랑이의 앞발을 질풍처럼 베어버리는 신기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검은 호랑이 앞발의 두꺼운 뼈를 자르지 못했다·
반면에 호랑이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옆초풍을 찍어 눌러 버렸다·
화끈한 고통에 놀란 호랑이가 앗 뜨거라 하면서 앞발을 회수하는 바람에 가슴을 찢기는 참사만큼은 겨우 면했다·
‘문제는 초식이 아니라 내공이야·’
성난 호랑이는 발을 떼는 대신 커다란 송곳니로 엽초풍의 목을 물어 죽이려고 했다·
인간이 호랑이에게 목을 물리면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절명해 버리고 만다·
절체절명의 순간 엽초풍을 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이 있던 양홍경이 아니라 멀리서 다른 호랑이들과 싸우던 단석조였다·
흡사 빛으로 만든 화살처럼 날아가 대호의 인중을 뚫어버린 그 수법은 사일검법의 절초 후예사일(活究射旧)이라고 했다·
엽초풍은 모닥불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단석조를 향해 다시 한번 짧게 묵례를 보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단석조도 답례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엽초풍이 말했다·
“호랑이가 이렇게 생겼군요·”
남궁소소가 물었다·
“호랑이를 처음 보셨나요?”
“해남도에는 호랑이가 없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면 흉을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처음 숲에서 호랑이 일곱 마리가 달려 나올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크기는 해남도에서 흔히 보는 물소의 반도 되지 않았는데 느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어떻게 그런 위압감을 줄 수 있는지····”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잡아 먹히는 중이죠·”
마지막 말은 내가 한 것이었다·
엽초풍을 비롯해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도망친 호랑이들은 지금도 산능선에서 자신들의 동족이 껍짓을 벗긴 채 잘게 잘려 불에 구워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부 산능선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견은 잘 익은 부위의 살점을 발라내 맛을 보려다가 깜짝 놀라서 손을 멈추었다·
“놈들은 이제 날붙이를 든 인간들만 보면 오줌을 지리며 도망칠 겁니다· 사냥을 하는 존재에서 사냥을 당하는 존재로 위치가 바뀐 것이지요·”
“···?”
“오랜 세월 굳어진 내부의 규칙을 뒤집으려면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서로가 명운을 걸고서 하는 싸움인 만큼 승부는 단 한 번으로 끝나죠·”
“···?”
“엿새 후면 은하산장에 도착할 겁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때 해남파의 명운을 잠시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서호삼견과 호리독사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나와 고기를 번갈아 보았다·
단석조와 점창오검 그리고 양홍경을 비롯한 해남파의 제자들은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것이다·
엽초풍은 맑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당주님께서 얻는 건 무엇인가요?”
“표사는 표행을 완수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