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 골육상쟁 (3) >
“저건 또 뭐지?”
“갑룡 형님이다·”
“갑룡 형님이 왜요?”
“인근에 흩어져 있는 강룡당의 표사들을 불러 모아 천라지망을 펼치려는 거야· 아무래도 무언가 중요한 인물을 찾아내 추적 중인····”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신형을 쏘아 인근에서 가장 높은 전각의 지붕 위로 올랐다·
이어 폭죽이 솟구쳐 오른 지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높아야 삼 층을 넘지 않는 갖가지 모양의 전각들이 이십 리에 걸쳐 빼곡하게 펼쳐진 여강고성은 거대한 미로였다·
서쪽에서 폭죽이 솟구쳐 올랐다고는 하나 워낙 멀고 넓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지 않고는 기껏 근처까지 가서 헤매는 수가 있다·
하지만 폭죽의 불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여강고성은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래서는 대략의 방향밖에 알 수가 없었다·
“한발 늦었군·”
다시 골목길로 시선을 돌려보니 이번엔 이을룡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보다 며칠 앞서 여강고성에 도착한 그는 이갑룡과 강룡당의 표사들이 어디를 집중적으로 뒤지는지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덕분에 슬쩍 본 것만으로도 폭죽이 솟구친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떼어 놓기 위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고·
“을룡 형님!”
큰 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대답을 할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목을 쭉 뽑고는 그가 달려가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서쪽 골목을 향해 다음 말을 이어서 외쳤다·
“나 이러고 가도 됩니까?”
한 식경 전 나는 지금과 같은 복장에 검은 복면을 쓰고 나타나 복룡당의 표사들이 머무는 여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을룡을 쫓아왔고 그에게 내상을 입혔으며 상투까지 잘라버리는 폭력을 행사했다·
나 역시 늦게라도 결국은 도착을 할 텐데 만약 지금의 복장에다 복면만 벗은 채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이을룡이 내게 처참하게 당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
나는 형을 두들겨 팬 망나니가 되는 것이고 이을룡은 동생에게 얻어터지고 다니는 등신 머저리가 되는 것이다·
누가 더 손해일까?
갑자기 눈앞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솟구쳤다·
“무슨 수작이야?”
“같이 좀 가십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갈아입을 옷 좀 구해다 주십시오·”
“미쳤어? 그걸 왜 내가 구해다 줘!”
“제가 구하러 간 사이 형님이 혼자 내빼 버리시면 안 되잖습니까· 날씨가 쌀쌀하니 기왕이면 솜이 두툼하게 들어간 옷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런 쳐 죽일!”
이을룡은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불과 조금 전 나한테 두들겨 맞고 죽을 뻔까지 한데다 이제는 하수인처럼 옷 심부름까지 하게 생겼으니 죽을 맛일 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옆에 있는 전각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회백색의 두툼한 요때기 같기도 하고 포댓자루 같기도 한 것이 들려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납서족의 복장이다·”
“이게 옷이라고요?”
“소매를 끼우고 왼쪽으로 여민 다음 허리를 묶어·”
“훔쳐 온 건 아니죠?”
“훔쳐 오지 그럼· 갑자기 옷을 어디서 구해?”
그러면서 이을룡은 함께 훔쳐 온 두건으로 제 머리를 친친 동여맸다·
내가 상투를 잘라버리는 바람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저걸로 감추려는 것이다·
“하긴 뭐 내가 훔친 건 아니니까·”
나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이을룡을 따라간 곳엔 강룡당의 일급표사들이 흑도들과 함께 어느 골목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이갑룡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이을룡이 신법을 펼치며 내려앉자 이갑룡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둘이 왜 함께 오는 거냐?”
“그렇게 됐습니다·”
“첫째 형님을 뵙습니다·”
이갑룡과 을룡과 내가 차례로 한 말이었다·
나와 이을룡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갑룡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특히 나를 향한 눈빛이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차가웠다·
“해남도로 간 일은 잘되었느냐?”
“고생만 진탕 했습니다·”
“그래도 표주와 표물은 알아냈겠지?”
“표주는 해남파의 장문인이었고 표물은 백칠십여 년 전 해남파의 전대고수가 동시대를 떨어 울리던 중원무림의 명숙들로부터 받았다는 보은패였습니다·”
“무림의 명숙들?”
“모르셨습니까?”
이갑룡이 슬그머니 이을룡을 돌아보았다·
이을룡은 자강상단의 뇌주분타주를 통해 일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갑룡에게 일절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이갑룡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함께 금사강으로 온 처지에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경쟁을 했다니·
“중원무림의 명숙들이 누구냐면 말이죠·”
“그걸 왜 내게 말해주려는 거지?”
“누가 됐든 일단은 흉수부터 찾아야지요·”
“내게 한 발을 걸치려는 건 아니고?”
“무슨 그런 말씀을·”
“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운 표행들을 성공시켰든 이번 일에서 밀리면 적어도 천룡표국의 후계자 자리에서만큼은 확실히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라· 나 역시도 그렇게 할 테니·”
“저는 천룡표국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동경했던 유성표의 마지막 표행을 잇는 것으로 그의 명예를 지켜드리기 위해서죠·”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무엇이냐?”
“금전 일천 냥과 함께 표왕의 월인소야검 그리고 명표가 되는데 필요한 경험과 약간의 평판 정도면 족합니다·”
“고삐를 당기면 말도 따라오는 법이다· 그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궤변만 늘어놓고 있구나· 네 속마음이 어떻든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흉수는 이미 내가 찾았고·”
그러면서 이갑룡은 앞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얼핏 보니 쭉 뻗은 골목을 따라 좌우로 붉은 등을 내 건 전각들이 빼곡했다·
홍등가인 모양이었다·
“저곳 어딘가에 그가 숨어 있다· 아홉 명의 명숙들이 누구인지는 그를 잡아서 내가 직접 물어보도록 하지·”
나도 이을룡도 놀란 나머지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네 형제가 항주에서 한날한시에 추적을 시작했지만 한 달여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 손에 넣은 것은 제각각이었다·
나는 해남도로 가서 표주가 누구인지와 표물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정도에서 그쳤다·
점창산으로 간다던 이병룡은 어디서 무얼하고 자빠졌는지 통 소식이 없다·
금사강으로 온 이을룡은 표주와 표물을 알아내는 한편 흉수로 짐작되는 고수가 여강고성으로 숨어들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반면 역시 금사강으로 온 이갑룡은 흉수를 추적하는 데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보다 먼저 흉수가 숨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포획을 앞두고 있었다·
이을룡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외가까지 동원해 가장 많은 정보를 손에 넣고도 이갑룡에게 보기 좋게 선수를 빼앗겨 버린 탓이었다·
반면 의기양양해진 이갑룡은 입가에 미소까지 슬그머니 번졌다·
이제야말로 맏형으로서 면이 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이갑룡의 승리에 쐐기를 박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
홍등가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림자 하나가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며 날아오더니 앞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강룡당의 표사였다·
그는 이갑룡에게 짧게 묵례를 하고는 나와 이을룡에게도 형식적이나마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잠시 이갑룡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 두 사람이 지켜 보는 앞에서 보고해도 좋을지를 묻는 것이다·
“편하게 말해도 좋다·”
“독안추귀가 목표물을 찾았습니다·”
“위치는?”
“여기서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청면살이 흑도들과 함께 그가 묵고 있는 전각을 에워싸자 낌새를 알아차리고 탈출을 시도하면서 교전이 벌어진 상태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갑룡이 고용한 객원표사로 독안추귀는 천리추종술의 대가였고 청면살은 운남성의 흑도들과 인맥이 두터운 자였다·
“가자!”
***
이갑룡을 따라 도착한 곳엔 백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담장과 지붕 위에 올라서서 전각의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오십여 명의 무인들은 당연하게도 천라지망을 좁히고 들어온 강룡당의 표사 오십과 이갑룡이 청면살을 통해 고용한 인근의 흑도 백여 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전각의 작은 앞마당에서는 한바탕 치열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죽림으로 얼굴을 가린 검객이 혼자서 일곱 명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일곱 명의 무인들은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도검을 지녔는데 얼굴에 하나같이 흉성이 가득했다·
딱 봐도 사람께나 베고 죽였을 흑도들이었다·
도검을 쓰는 방식도 살벌하기 짝이 없어서 시종일관 맹공을 퍼붓는 한편 살수만을 펼쳤다·
한데도 죽림의 검객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맸다·
심지어 바닥에는 무려 열두 명에 달하는 십중팔구 흑도로 짐작되는 자들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쓰러진 자들의 몸 상태가 멀쩡했다는 점이었다·
검상을 입어 피를 흘리는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쓰러져 신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죽립인의 신형이 일곱 흑도들이 펼치고 있는 검진을 번개처럼 관통하고 지나갔다·
“허억!”
“어억!”
두 명의 흑도가 짧은 비명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격검의 순간 죽립인이 검 손잡이 아래의 뭉툭한 부분 즉 검두와 팔꿈치로 점혈을 한 것이다·
‘빠르다!’
지금 이곳에 모인 백오십여 명의 무인들 중 조금 전 저 죽립인이 펼친 한 수를 정확히 본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열 명이 채 안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가공할 속도도 속도지만 검초를 펼치는 와중에 두 명의 전권을 파고 들어가 검두와 팔꿈치로 상대의 혈도를 찍는 귀신같은 수법에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끝이 아니었다·
검진을 두 동강 낸 죽립인은 갑자기 벽을 타고 솟구치다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을 바짝 따라붙은 흑도들의 뒤편으로 뚝 떨어졌다·
그의 검과 손과 어깨가 복잡하고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또다시 흑도들의 검진을 유린하듯 휘젓고 다녔다·
“으악!”
“아악!”
“허억!”
이번엔 세 명의 흑도들이 쓰러졌다·
그중에 한 명은 등을 뒤로 활처럼 휘며 드러누워서는 눈동자를 허옇게 까뒤집었다·
이번에도 역시 검초와 함께 펼친 점혈법 때문이었다·
남은 흑도는 이제 두 명에 불과했다·
언감생심 죽립인이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두 사람은 더는 공격할 생각을 못 했다·
그건 죽립인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지붕과 담장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여 명의 흑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십중팔구 흉수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특별 포상금을 내리겠다는 약속까지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혼자서 열일곱 명을 쓰러뜨려 버리는 무공 수위에 놀란 나머지 욕심이 쏙 들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결국 강룡당의 일급 표사 오십 명이 마당 안으로 휙휙 뛰어들었다·
이어 죽립인을 가운데 놓고 차륜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대가 제아무리 절정고수라고 해도 강룡당의 일급표사 오십이 펼치는 검진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를 산 채로 잡으려면 강룡당의 표사들도 상당수가 중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멈춰라!”
다시 격전이 벌어지려는 순간 지붕 위에 있던 이갑룡이 일갈하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나와 이을룡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이갑룡이 죽립인을 향해 두어 걸음을 다가서며 말했다·
“귀하의 무공이 고명한 줄은 알겠으나 천룡표국의 일급표사 오십이 펼치는 검진을 뚫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만 무기를 버리고 신병을 맡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협박을 하려면 본인 소개 정도는 해야지 않나?”
“하려면 통성명을 해야지요· 소생은 천룡표국의 강룡당주 이갑룡이라고 합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
“단석조라고 하외다·”
단석조라는 말에 담장과 지붕 위에 있던 흑도들이 갑자기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갑룡은 흑도들을 흘껏 바라본 후 다시 단석조에게 말했다·
“소생의 견문이 짧은 데다 주로 강동에서 표행을 다니다 보니 운남 무림의 젊은 영웅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천리만리 떨어진 항주에서 온 내가 운남성의 흑도 나부랭이인 너를 어찌 알겠느냐는 뜻이었다·
“내 이름은 보잘것없소만 사문은 꽤 유명하다오· 천룡표국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오·”
“궁금하군요·”
“점창파외다·”
그러면서 사내가 조용히 죽림을 벗어 올렸다·
강건한 기도에 정광이 번뜩이는 눈동자를 가진 마흔 살가량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가 발칵 뒤집혔다·
백여 명의 흑도들은 저승사자라도 건드린 것처럼 충격에 빠진 듯했다·